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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군 Sep 26. 2023

[단편소설]독서동호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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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메일을 보내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의 답장이 왔다. 내가 이미 가입이 되어 있어서, 재가입은 안 해도 된다는 내용이었다. 다음 모임 안내와 함께 영화나 연극으로 만들어진 책을 읽어 오면 된다고 하면서 시간이 없으면 첨부된 안톤 체호프의 <귀여운 여인>을 읽고 오라고 적혀 있었다. 그리고 책을 읽지 않아도 괜찮으니 편하게 참석하라는 친절한 안내도 있었다.

  안톤 체호프라니……. '-프' 자로 이름이 끝나는 것을 보니 러시아 쪽 작가 같았다. 검색해 보니 아니나 다를까 러시아 작가였다. 톨스토이, 또 음……. 아는 작가 이름이 더 생각나지 않자, 눈을 감았다. 모임에서 이야기하다가 아는 작가를 말하라고 했다면……. 얼굴이 구겨졌다.

  메일 첨부 파일에 <귀여운 여인>이 들어 있었다. 나는 모임에서 만나게 될 그녀를 생각하며 종이에 빨간 줄을 치며 읽어 내려갔다. 눈길이 소설의 마지막 문장에 이르렀다. 나는 프린터를 뒤져 뒷장이 빠졌나 확인했다. 뒷장이 잘렸나? 사샤의 잠꼬대로 끝나는 게 맞나 싶어 첨부 문서를 다시 다운로드 해 확인했다. 이렇게 끝난다고? 이 애매한 기분, 찝찝하고도 모호한 감정을 풀어줄 상대를 찾고 싶었지만 쉽지 않았다. 정치와 드라마 외에는 관심이 없는 회사 동료들에게 안톤 체호프의 소설에 대해 갑자기 이야기하거나 운동과 맛집에 빠져 사는 지인들에게 올렌카의 인생이야기를 갑자기 할 순 없었다. 회사 근처 서점에 가봤지만 절판된 책이었다. 인터넷으로 주문해도 이틀은 걸렸다.


  “안톤 체호프라고 들어봤어?”

  “알톤은 아는데 자전거 메이커인가요?” 담배를 피우던 조연출이 말했다.

  “선배님, 그때 이야기한 독서동호회 드셨어요? 급하신가 보네.”

  조연출을 째려보자 그는 능글맞게 웃으며 오른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팔뚝에 영어 필기체의 타투가 눈에 띄었다.

  “모임 제목이 좀 특이했었는데 뭐라고요?”

  “애들은 몰라도 돼.”

  “근데 아까 안톤 어쩌구는 뭔가요?”

  “읽어야 할 작가인데 책을 구할 수가 없네.”

  “선배! 바쁜 세상에 무슨 책을 정독합니까! 아마추어처럼. 그냥 유튜브에서 리뷰를 보면 되지.”

  “오! 천잰데.”

  인터넷에서 검색해 나온 책 리뷰도 있었지만, 유튜브에도 콘텐츠가 넘쳐났다. 안톤 체호프 탈탈 털기, 잠잘 때 듣기 좋은 단편선, 안톤 체호프 오디오북 등 한 영상을 보고 나면 알고리즘이 다음 관련 영상을 계속 추천하면서 떠 먹여주었다. 리뷰와 정리된 영상을 보니 이미 안톤 체호프가 동네 형처럼 친근하게 느껴졌다. 그래도 정보가 더 필요했다. 한 번도 가보지 않은 독서 모임을 생각하며 마우스를 계속 클릭했다.


  “독서 모임 너도 나가게?”

  옆자리 김 선배가 자리에 있는 프린트물을 보더니 말을 걸었다. 깜빡이라도 켜고 들어오면 좋겠는데, 늘 불쑥 나타났다. 그냥 보고 있다고 얼버무렸다.

  “선배가 나 예전에 독서동호회 가입시켰죠?”

  그는 기억이 가물거린다며, 본인은 코로나 이후 사내 독서동호회에 관심을 끊었다고 했다. 초창기에 나갔는데 재미가 없어서 지금은 그만뒀다고 말했다. 그동안 내게 왔어야 할 책을 어떻게 했냐고 묻고 싶었다.

  “지금이라도 같이 가실래요?” 예의상 물어봤다.

  “독서 모임? 나는 밖에서 하잖나. 회비 내고 하는 독서 모임이야. 고전탐방이라고.”

  일주일에 400페이지 넘게 읽어야 한다고 하자, 옆에서 듣고 있던 조연출은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며 대단하다고 호응했다. 일도 바쁜데 어떻게 시간을 내는지 의문이었다.

  “자연은 솔직하잖아. 책도 그래.”

  그게 무슨 말인가 하고, 선배를 쳐다보니 그는 눈을 찡긋거렸다. 그는 책을 다 읽고 모임에 가는데, 꼭 유튜브만 보고 오는 애들이 있다며 그런 사람과 대화를 하면 티가 난다고 했다. 그리고 자기는 그걸 눈치 채고, 상대방이 파악하지 못한 것을 질문하거나 이야기할 때 희열을 느낀다고 했다.

  “유튜브가 좀 문제죠.”

  앞에 있던 양 작가가 컴퓨터 화면을 보며 거들었다. 그녀는 문창과 졸업 이후 독서 모임을 시작해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고 했다. 특히, 모임에서 유창하게 말하는 이성이 있으면 멋지다면서, 나보고도 제발 동식물들을 그만 찾고 연애 좀 하라고 했다. 말 잘하는 것에 속으면 안 된다고 조연출이 이야기했다. 소개팅이라도 시켜주고 그런 말을 하라고 내가 말하자, 그녀는 연상도 괜찮냐고 물었다. 

  “우리 선배는 소개팅 싫어하는 것 같습니다” 조연출이 정색을 하며 말했다.

  박 피디가 자만추인 줄 몰랐다며 양 작가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자연스러운 만남을 추구하는데, 매일 촬영 나가서 보는 게 자연이면……. 

  “아 자연스러운 만남이 그 자연이구나!”

  양 작가가 농담을 던지며 웃자, 조연출은 이런 아재 개그에 웃으면 안 되는데 하면서 낄낄거렸다.

  대학 첫 소개팅에서 만난 그녀는 애니메이션을 좋아해서 이야기가 통했다. 영화관에서 혼자 지구에 남아 있는 청소로봇 애니메이션을 함께 관람했는데 극장을 나오며 그녀는 혼자 지구에 남아 있던 로봇이 너무 불쌍하다고 눈물을 글썽였다. 그 모습이 좋아서 그녀와 잠깐 사귀었다. 눈물을 흘리는 것에 반해 여자를 사귄다는 것이 어이없지만 이상하게도 나는 그럴 때 여자에게 마음이 끌렸다.

  “나는 자연과 결혼한 사람입니다. 국장님이 이걸 아셔야 하는데.”

  내가 너스레를 떨자, 김 선배는 검지를 흔들며 내 자리에 앉아 어제 읽은 책 내용을 뜬금없이 말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조연출과 양 작가는 자신들의 컴퓨터 화면을 보며 듣는 둥 마는 둥 했다. 양 작가의 말이 머릿속에서 계속 남았다. 

  긴장하면 말을 흐리는 습관이 있어서, 대학 때도, 회사 면접 때도 미리 말할 것들을 적어서 달달 외우곤 했다. 책을 읽을 때면 펜을 들고 다니며 줄을 치곤 했다. 특히 한자가 많거나 문장이 길어져 내용이 이해가 안 될 때는 줄을 치고, 단어를 쪼개서 읽었다. 중학교 시절 친구들은 이런 내 책을 보고 공부를 잘하는 우등생으로 나를 오해하기도 했다. 대학 시절 소개팅한 여학생과 대학로 CGV에서 (그녀가 너무 보고 싶다는) 영화 <러브레터>를 관람했다. 극장을 나온 후 그녀는 마지막 장면이 너무 슬프다며 약간의 눈물을 보였다. 나는 그녀의 눈물과 짧은 머리 스타일에 반해 영화 마지막 장면에 나온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전집을 선물했다. 그녀는 고맙다며 내게 먼저 읽어 보라고 1권을 줬다. 나는 하루가 지나고 일주일 아니 한 달 동안 스완네 집 앞부분에서 더 이상 진도를 나갈 수 없는 이상한 마법에 빠졌다. 어린 시절 난독증이 다시 도진 게 아닌가 고민하며 책을 등한시했고 그녀와도 자연히 멀어지게 됐다.

  모임에서 유창하게 말하는 스킬이 필요할 것 같았다. 그렇다고 유창하게 말하는 화법 책을 보거나 학원에 갈 수도 없고, 연습만이 답이었다. 첫 독서 모임을 대비해 자기소개와 책 내용을 정리한 다음 회사와 집을 오가며 말하기를 반복하면서 모임 전날까지 달달 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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