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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날고싶은JH Jan 06. 2024

이 경험이 누군가를 구하리라

_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을 때 읊조리는 주문


"사내대장부로 태어나서 저 넓은 천안문 광장은 한 번 밟아봐야 안되겠나~" 

삼성 협력업체에서 프린트기를 성형, 사출하는 아르바이트를 한 적이 있다.

한날 철야 작업을 하고 나오던 길,

어슴푸레 밝아오는 새벽하늘을 보며 옆에 있던 당시 남자친구가 말했다.

순간 왜였을까.

피식 웃으며 올려다 본 하늘에

천안문 광장이 쫘악-펼쳐지며

종소리가 울리는 듯했다.

'그래, 내가 한 번 가봐야겠다!'

그렇게 그 당시 군대 가는 남자들이나 하던 휴학을 하고

6개월 동안 아르바이트와 중국어 공부를 병행한 뒤, 

2001년 7월 31일

중국 천진으로 가는 진천 페리에 몸을 실었다.

불과 6개월 전까지만 해도 해외는 관심조차 없던 나의 40여 일간의 중국 배낭여행이 시작되었다.

출국 신고서를 작성하며 손이 달달달 떨려 글씨가 안 써졌다.

보안검색대를 통과한 후 배낭을 힘껏 둘러매고는 세상 흐릿한 게 좋아 잘 쓰지 않던 안경을 꺼내 썼다.

그러고는 눈물이 줄줄 흘렀다.

나 자신을 오롯이 내가 책임져야 한다는 사실에 그 순간의 난 꽤나 두렵고 또 비장했던 것 같다.

(막상 배 탑승 후부터는 언제 그랬냐는 듯 현지화되었지만 :)

그 첫 여행은 내게 '세계 일주'라는 새로운 꿈, 평생의 취미, 평생을 마음에 담고 갈 사람을 선물해 주었고 많은 부분에 걸쳐 내 삶을 좋은 방향으로 변화시켰다.

두려움을 딛고 한 발 내디뎠을 때, 그 걸음은 변화와 성장의 시작이리라. 

어쩌면 삶을 통째로 바꿀 수도 있는.



병원 생활에도 다년간의 배낭여행 덕을 많이 보았다.

간병 당시, 대개 새벽 5시면 일어나 23~24시에 잠들었다.

밤중에는 어머니를 휠체어에 태워 화장실 왕복하길 몇 번씩 해야 했는데, 처음 1년은 평균 2~3번 꼴로 화장실을 가셨었다. 

보호자 침대를 밀어 넣고, 휠체어를 가져온 후 어머니를 일으키고, 세우고, 휠체어에 앉히고. 

휠체어를 밀고 화장실로 뛰어가서(워낙 자주 가시다보니 병실 사람들의 숙면을 위해 외부 화장실을 이용했다)  어머니를 부축해 일으켜 세우고 변기에 앉히고.

볼 일이 끝나면 다시 일으켜 세우고 휠체어에 앉히고 병실로 돌아가 다시 엄마를 일으켜 세우고 침대에 앉히고 침대에 올려드리고 눕히고. 마지막으로 보호자 침대를 꺼내고. 

그러다 보면 잠이 싹 달아났다.

한때는 1시간에 한 번 꼴로 화장실을 갈 때가 있었는데, 오가는 시간을 빼면 1시간에 40분 정도를 잘 수 있다. 바로 잠이 든다는 가정 하에. 그렇게 1시간에 40분씩 끊어 자는 일을 4번 반복하면 다시 하루가 시작된다. 

기저귀를 하면 편하기야 하겠지만, 기저귀 떼는 데 들였던 공을 생각하면 그럴 수 없었다. 

게다가 어쨌거나 재활은 빠른 속도로 일상생활을 향해 나아가야 하기 때문에 더더욱 기저귀를 차고 패드를 깔던 때로 회귀할 수는 없었다. 

버티는 힘, 체력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었다. 1년에 두세 번씩 배낭 메고 열심히 걸어 다닌 나는 '그 당시' 다소 말랐지만 잔근육이 잡힌 몸이었고 에너지가 굉장히 좋았다. 참 다행이었다.

새벽 5시, 눈뜨자마자 무언가를 드셔야 하는 엄마에게 간단한 먹을 것을 드린 후 병실 밖으로 간다. 

누구보다 빠르게 매트를 하나 선점한 다음, 전신 스트레칭과 가벼운 운동을 시켜드린 후 아침밥이 들어오는 시간을 맞춰 병실로 돌아온다.

대개는 식사 후부터 바로 재활이 시작됐다.

짜인 시간표대로 치료사와 함께 재활치료를 하시는데 보통 나는 치료사의 동의를 얻어 치료에 함께 참여했다. 

엄마가 어떤 목적을 가진 어떤 동작을 훈련하는지, 치료사가 리드하는 방향은 무엇이고 엄마는 그걸 어느 정도 수행하는 컨디션인지 알아야 했다. 

치료 과정에서 치료사가 적절한 피드백을 한다. " 맞아요, 바로 그거예요!" "엉덩이 더 들고!", " 바로 지금 그거!" 그럼 그때그때 유심히 보면서 그 성공적인 움직임이 어떤 것을 말하는 것인지 파악했다. 

"키 크게, 체중 싣고, 뒤꿈치로 바닥을 밀어요!" 특정 동작을 훈련할 때 치료사가 쓰는 '큐'를 나도 동일하게 연계해서 적용시켰다. 그렇게 치료 시간 사이사이 짧은 틈, 재활이 마무리된 저녁 시간에 내가 개인 치료사가 되어 엄마와 운동을 이어갔다. 

치료실에 환자를 보내두고 쉬거나 소소한 일을 처리하는 30분마저 치료에 투자한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고, 치료사에게 이유를 설명하고 동의를 얻는 것도 용기도 필요한 일이었다. 주변에선 대단하다고 칭찬했지만, 치료사들에게는 딱히 환영할 만한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다행히 엄마 담당 치료사분들은 모두 흔쾌히 동의해주시고,  애타는 내게 뭐든 하나 알려주려고 하는 고마운 분들이셨다. 하지만 주변의 치료사들에게 유별난 보호자처럼 여겨지는 것도 감수해야 했다. 

부산에 이어 서울경기권에서 여러 병원을 다녔는데, 그 중 분당의 보바스 병원은 기구 운동과 특정한 날에만 보호자 참여가 가능했고, 대부분은 불가했다.

그러면 그 30분 동안 매일 침대 시트를 갈고, 병원 식단에 더할 요리를 한다든지, 마을버스를 타고 장을 봐온다든지 했다. 시간을 아주 빈틈없이 쓰는 것은 전략이다. 끊임없이 머릿속에서 할 일을 파악하고 일의 순서를 정하고 시간을 배분하며, 다양한 요소를 고려해 착오 없이 이뤄지도록 생각하며 움직여야 한다. 

빠른 판단과 문제 해결력 또한 혼자 한 배낭여행의 경험에서 다져진 부분이었다.



타인을 해하거나 위법을 저지르지 않는 이상, 세상의 모든 경험은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엄마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 일. 

이 새로운 삶 속으로 두려움 없이 몸을 던져 최선을 다하기 위해 '여행하는 나'로서 단단하게 준비되어 왔다는 느낌이 들었다.

배낭여행에서 얻은 것들이 이렇게 쓰일지 예상 못 했지만, 어쨌거나 이런 내가 엄마 옆을 든든하게 지키고 있음이 참 다행이지 않은가.  "배낭여행하길 참 잘했다."

그 말은 곧, 엄마와 함께 하는 이 생활도 나의 경험치가 되어 언젠가는 내 삶의 자양분이 된다는 뜻일 거다. 바로 한걸음 앞이 보이지 않아 발 디디기 어려울 때도, 그런 생각으로 매일 나를 일으켜 세웠다. 

이 경험이 지금 엄마를 구하고, 언젠가 나와 또 다른 누군가를 구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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