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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여, 안녕!

by Pelex

세월이 흘러도,

마음의 서랍 한편엔
여전히 친구가 살고 있다.

— 《해묵은 편지를 꺼내며》



프롤로그

오래된 친구에게서 한 통의 편지를 받았다.
낡은 종이 위에 눌러쓴 글씨에는
세월의 무게와 함께 묻어나는 진심이 있었다.

그 시절,
우리는 서로를 믿고, 웃고, 울었다.
세상이라는 강을 건너며
가끔은 멀어지고, 다시 가까워졌다.

그리고 이제—
한 통의 편지로
다시 그 시절의 마음으로 돌아간다.


1. 나의 편지


친구여, 안녕!

나에게는 오랜 세월을 함께한 친구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모든 모습이 내 마음에 쏙 들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어느새 나는 그들의 곁에 맞추려 애쓰고,

그들을 위해 기꺼이 배려하며 참는 법을 배웠습니다.

어쩌면 친형제들보다 더 그들을 아끼고 좋아했던 것 같습니다.

나는 언제나 그들에게 좋은 친구이고 싶었습니다.

그들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듣고,

그들의 마음을 이해하려 애썼으며,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려 노력했습니다.

그 덕분에 그들은 내 삶의 든든한 동반자처럼 마음을 나누는

진정한 친구가 되어주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나는 그들을 떠나려 합니다.

지난날, 문득문득 '내가 이렇게 열심히 살아가는데,

왜 아무도 이 마음을 알아주지 않을까'

하는 허전함이 밀려올 때도 있었습니다.

누군가 내 마음을 깊이 이해해 주고,

조용히 응원해 주는 친구가 곁에 있어주기를 바랐지요.

돌이켜보면,

그것은 어쩌면 나 혼자만의 간절한 짝사랑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아픈 딸을 간호하며 모든 것을 절약하고 아껴야 했던 시기였습니다.

이는 한 아버지로서 감당해야 했던 절박한 현실이었음을

부디 너그럽게 이해해 주기를 바랍니다.

그 절박함 속에, 내 주위의 소중한 이들을 미처 돌아보지 못했습니다.

물질적 가치에 휩쓸려 나 혼자 앞만 보고 뛰면 되는 줄 알았던,

주변을 세심히 살피지 못한 철저한 이기주의자였습니다.

마땅히 지켜야 할 사람의 도리를 다하지 못했고,

때로는 무례하고 서툰 모습도 많았습니다.

이 자리를 빌려 진심으로 머리 숙여 용서를 구합니다.

이제 인생의 후반전, 이순(六旬)을 바라보는 나이에

새로운 나라에서 다시 시작하려 합니다.

그동안 보여준 변함없는 관심과 따뜻한 배려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부디 건강하시고, 하시는 모든 일에 행운이 가득하기를 빕니다.

감사합니다.

2. 친구의 답신


친구여……!

정말 떠나는가?

나는 이 세상을 출발할 때,
마음 깊은 곳에 세 명의 친구를
아주 깊이 숨겨두고 떠났네.

그 이유는 말이지—
세상에 태어나 큰 나무 그늘 아래에서
보호만 받으며 살아왔기에,
험한 세상으로 나서면
거친 풍랑에 휩쓸려 서로를 놓칠까 두려웠기 때문이야.

그래서 첫째 친구는 가슴 깊은 곳에,
둘째 친구는 우심방 뒤편에,
마지막 친구는 좌심방 뒤 아무도 모르는 곳에
조용히 숨겨두었지.

그리고는 마음을 놓고,
이 세상의 풍랑 속으로 뛰어들어
세파를 헤치며 살아왔네.

그렇게 세월을 보내며
진정한 친구가 없어도 괜찮았어.
언젠가 나이가 들면
고향의 동심으로 돌아가
숨겨두었던 그 세 친구를 꺼내어
다시 우정을 나눌 수 있을 거라 믿었으니까.

세월이 흘러 30년, 40년—
드디어 그 친구들을 꺼내어
동심의 세계로 돌아왔네.

그동안 세 친구는
세파에 시달려 많이 닳고 훼손되었지만,
그래도 그 원형은 그대로였지.
참으로 감격스럽고,
아름다운 옛 친구들과의 회포였네.

그러나—그 정겹고 따뜻한 우정도 잠시뿐이었어.

나는 지금까지
이순을 바라보며 단 네 번의 눈물을 흘렸네.
두 번은 부모님을 떠나보내며,
세 번째는 가슴 깊이 묻었던 친구의 이별로,
그리고 마지막 한 번은—
우심방에 숨겨두었던 친구가
호주로 떠난다는 소식을 듣고서였지.

그 순간 나는 잠시 넋을 잃었고,
스스로를 의심했네.
마음을 다잡고 친구에게 사실을 확인하는 순간,
눈가에는 하염없이 눈물이 흐르고
목이 메어왔네.

……아, 나이 들었나 보다.
왜 이렇게 눈물이 나는 걸까.

나는 그 친구에게
무슨 이유인지 묻고 싶지 않았어.
그가 말 못 할 사정이 있는 건지,
아니면 새로운 미래를 향한 걸음인지는
묻고 싶지 않았네.

묻는다는 건, 곧 이별을 인정하는 일이니까.
엄연한 사실이지만,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거야.

그 순간 나는 속으로 다짐했네.
“이제 좌심방의 친구마저 떠난다면,
이 세상에서 더는 새로운 친구를 맺지 않으리라.”

그때는 신앙의 세계에서
새로운 친구를 찾으리라, 그렇게 말이야.

마지막 보루였던 옛 친구들,
그토록 사랑하던 친구들,
가슴 깊이 숨겨두었던 그 친구들……

결국, 스쳐 지나가는 세상 친구들과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아—아, 너무나 그립구나.
그렇게 소중히 간직했던 친구들,
이제 하나둘 내 곁을 떠나가고 있어.

마음이 한없이 서럽고,
가슴이 저려온다.
가을날 외롭게 뒹구는 낙엽처럼,
그 위를 힘없이 밟으며 걷는
내 모습이 너무 초라하게 느껴진다.

50년 지기로 쌓이고 쌓인 고운 정, 미운 정—
다 어찌하여 그리도 속절없이 흩어져 가는가.
그 많은 정들, 이제 다 어쩌란 말인가.

너무나 외롭고, 너무나 서럽다.

친구여—기어이 가야겠다면,
이 못나고 어리석은 친구를
부디 기꺼이 용서해 주게.

그리고,
어디에 있든
멋진 인생으로 마감하길 바라네.

친구여……!


에필로그

인생의 길 위에서
우리는 수없이 만나고 헤어진다.

그러나 진정한 친구는
떠나 있어도 마음속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시간이 흘러도,
편지 한 장이 다시 마음을 잇고,
낙엽처럼 흩어졌던 정이
어느새 내 안에서 따뜻하게 되살아난다.

이제 나는 안다.
우정은 함께한 시간이 아니라
서로를 잊지 않는 마음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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