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은 오래된 친구들의 한마디
삶을 다시 반짝이게 만든다.
세월이 우리를 멀리 데려가도,
그 말 한마디에 마음이 고향으로 돌아간다.
“더 늙기 전에 고향에 돌아가 농사나 지으며 쉬겠다”라고
말하던 용* 친구의 따뜻한 초대로, 오랜만에 내가 태어났고
초·중학교를 다녔던 정든 고향을 찾았다.
이번 길에는 고등학교와 대학교를 함께하며
인생의 멘토처럼 의지해 온 승* 친구도 동행했다.
오랜만에 찾은 고향이라 가슴이 벅차고 설레었다.
먼저 동부시장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
시장의 활기와 덤으로 얹어주는 후한 인심,
그리고 낯설지 않은 사투리 속에서 묵은 그리움이 스며 올라왔다.
물건을 사고파는 사람들의 얼굴마다 소박한 행복이 묻어나는 듯했다.
잠시 후, 용* 친구의 집에 도착했다.
역시 내 친구 용*이다 싶었다.
얼마 전 그의 ‘창립 40주년 행사’에 다녀와 감동의 글을 쓴 적이 있었는데,
이번에는 직접 보고, 듣고, 느꼈다.
그는 일궈낸 성공의 대업을 아들에게 훌륭히 물려주고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그의 삶은 여전히 역동적인 미래를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육백 년을 넘겼다는 노송들이 웅장하게 마중을 나와 있었고,
그 옆에는 왕대나무 숲이 늠름하게 도열해 있었다.
그 기세에 잠시 기가 눌릴 정도였다. 그런데 친구가 웃으며 말했다.
“여기에 파크골프장을 만들고 있어.”
말뿐이 아니었다. 이미 땅을 고르고 있었다.
내가 보기에도 조금만 손을 보면,
노송과 대나무가 조화롭게 어우러진 우리나라 제일의 파크골프장이 될 듯했다.
정원 중간에는 예전 예식장을 리모델링한 멋진 카페가 있었다.
이곳에서의 커피 한잔은 일품이었다.
낡은 건물에 새 숨결을 불어넣은 그 센스, 그것마저 친구다웠다.
차로 조금 더 가니, 눈앞에 음암저수지가 시원하게 펼쳐졌다.
오랜 시간 쌓였던 마음의 번민이 바람 한 줄기에 흩날려 사라지는 듯했다.
승* 친구가 동해 바다에서 직접 낚시로 잡아 온 신선한 대구로 끓인 시원한 탕,
냄새만 맡아도 집 나간 며느리도 돌아온다는 전어구이,
그리고 서산 한우 숯불구이까지— 입은 즐겁고, 마음은 더없이 따뜻했다.
그날 밤, 세 가족이 모닥불을 피워놓고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었다.
친구들과의 깊은 추억과 삶의 진솔한 이야기를 나눌 때,
옆에서는 아내들이 쉴 새 없이 정겨운 수다를 이어갔다.
"집안 대소사부터 시작해서 손주들 자랑,
심지어 남편들 흉(?)까지 보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는 후문이다.
아침 새벽에 일어나 2층 거실에 비스듬히 누워 저수지에서 떠오르는 햇빛을 바라본다.
고요한 물안개 위로 쏟아지는 아침 햇살은 복잡했던 세상사를 잠시 잊게 해주는 듯했다.
그 평화로운 풍경 앞에서 비로소 제대로 쉬고 있음을 느꼈다.
돌아오는 길, 다시 동부시장에 들렀다.
싱싱한 바지락과 굴비, 향긋한 감태, 그리고 포근한 호랑이콩 등을 사고서 장바구니를 가득 들고 나오는데
그냥, 저절로 행복이 묻어 있었다.
다음 달이면 완성된 파크골프장에서 다시 만나기로 약속했다.
그날, 승* 친구는 직접 낚시로 방어를 잡아와 즉석에서 셰프 노릇을 하겠다고 큰소리쳤다. 모두들 환호하며
대찬성,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이제 우리의 약속은 단순히 공을 치고 회를 뜨는 것을 넘어섰다.
우리는 앞으로 고향 주변의 아름다운 산천을 찾아다니고,
숨겨진 맛집을 순례하며 인생의 여유를 만끽할 것이다.
종심을 반이나 차지하는 나이에, 서로의 안부를 묻고 함께
웃는 이 시간들이 가장 값진 선물임을 알기에.
서로의 얼굴에 새겨진 세월의 흔적보다, 변치 않는 우정의 빛이 더욱 찬란하게 반짝였다.
“더 늙기 전에, 더 자주 만나자.”
그 한마디에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는 성취보다 함께 있음이 더 값지고,
속도보다 온기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우린 알고 있었다.
삶의 후반부에서
우리가 지켜야 할 건 그리 많은 게 아니다.
함께 웃을 친구 몇,
마음을 기댈 자리 하나.
그것이면 족하다.
고향의 바람이 오늘도 귓가를 스친다.
더 늙기 전에,
우린 더 가까워지기로 했다.
“친구와 고향은 언제나 내 인생의 쉼표다.”
“이 글을 읽는 당신에게도 그런 친구가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