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해가 저물 듯, 인생에도 깊은 가을이 찾아왔습니다.
문득 서랍 속에서 오래된 메모를 발견했습니다.
젊은 날의 글과 지금의 연륜이 묘하게 섞여 있는 짧은 기록입니다.
그 위에 오늘,
일흔을 넘긴 나의 마음을 덧입혀봅니다.
늦가을을 보내며,
나 자신에게 쓰는 편지입니다.
연이은 흐린 날씨가 괜스레 마음을 우울하게 합니다.
바람과 비에 젖은 낙엽들이 우수수 떨어집니다.
저 낙엽들이 생명의 시간을 서둘러 일깨우는 듯합니다.
외투 깃을 올리고 나뒹구는 낙엽들을 따라 한 발 한 발 발을 옮깁니다.
많은 월급은 아니지만, 직장 생활을 이어간다는 것 속에는 이러한 푸근함도 있었습니다.
일흔이 넘어선 나이에도 허둥지둥 출근한다는 그 자체가 즐겁습니다.
비록 봐주는 사람은 없지만, 제일 멋진 옷을 골라 입고 나섭니다.
매일매일 다른 옷으로 말입니다.
한창때 계절마다 두어 벌씩 샀던 옷들이 입을 기회조차 없었는데,
이제야 비로소 제철을 만난 듯합니다.
나이 들어 보이는 게 싫어, 지하철을 탈 때는 경로석 근처에는 얼씬거리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일반석에서 자리를 양보하는 젊은이도 없으니,
그저 출입구 옆에 기대어 섭니다. 다행히 친구들이 어려 보인다고 하니,
아직 꼰대 티는 안 나는가 봅니다.
언제까지 일지는 모르지만, 이 자리에 머물러 있는 동안만은 최선을 다하려 합니다.
가끔은 할 일이 없어 사장님 눈치가 보이기도 하지만,
아직 제 능력에 가능성이 남아 있다고 생각하기에 일로서 그 모든 것을 보상하려 합니다.
어쩌면 이 노동의 시간이 나를 지탱하는 마지막 자존심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현직에 얼마 남지 않은 친구들,
여유롭게 세월을 낚는 친구들. 이제 서로 다를 게 무엇이 있겠습니까?
세월의 강물 앞에서 욕망도, 지식도, 외모도, 재산도 하나의 수평선으로 잔잔해진다는 것을.
그것이 삶의 진실이겠지요.
하지만 나이 듦이 주는 평온함 속에서도,
품위를 지키기 위한 경제적, 정신적인 여유는 필요할 듯합니다.
그것은 가족들과 근사한 하고, 친구에게 술 한 잔이라도 넉넉히 사줄 수 있는
마음의 너그러움과 직결될 것입니다.
마지막까지 멋있고 추하지 않게 살아가는 비결은,
이 작은 여백을 스스로 채우는 노력에 있지 않나 싶습니다.
이제야 비로소 삶의 가을에 접어들어 철이 드는가 봅니다.
남은 인생의 여유를 확보하고, 진정한 나 자신을 마주하기 위한
인생의 마지막 가을 채비를 시작합니다.
스스로에게 묻습니다. 내가 경제 활동을 할 시간은 또 얼마나 남았으며,
남은 생은 얼마나 될까요?
시간이 흘러 몸이 아프게 되면 그때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그 어떤 가치와 명예도 소용이 없겠지요.
늦가을의 잎들이 재촉하듯, 이제는 머뭇거릴 시간이 없습니다.
미루어 두었던 모든 것들에 마침표를 찍고, 남은 시간을 소중히 가꾸어갈 결심을 합니다.
에필로그
이 가을의 끝에서, 나는 다시 한번 시작을 다짐합니다.
남은 시간들이 황혼이 아닌, 여전히 푸르른 아침일 수 있을
오늘, 나는 가장 멋진 옷 입고 출근합니다.
남은 날들을 위해.
자존심과 품위를 지켜낼 작은 여유를 허락해 준 삶에 감사하며,
미련 없이 다음 계절을 맞이할 채비를 마칩니다.
어느 해 가을날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