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저녁빛이 머무는 자리

종심(從心)을 지나 다시 길 위에 서며

by Pelex

프롤로그

세월은 때로 나를 밀어내고, 때로는 아무 말 없이 품어 안았습니다.
멈추려던 발끝에는 바람이 머물고, 마음은 끝내 다시 길을 찾더이다.
그래서 오늘도 나는, 저녁빛에 젖은 마음 한 조각을 조용히 불러 세웁니다.

저녁빛이 머무는 자리

종심(從心)의 문턱을 넘어이미 황혼을 지나

바람의 결조차 읽어낼 나이가 되었건만,

내 마음은 오래된 처마 끝에서 여전히 천천히 흔들리고 있습니다.

세월을 견딘 동료들과 어깨를 맞대면

친구들은 현역인 나를 부러워하지만,

가족을 향한 마음의 끈은 낮은 숨결처럼 조용히

그러나 묵직하게 내 어깨를 감싸옵니다.

(누구에게도 손 내밀지 않고 오롯이 버텨낸 자존심만이

지금껏 나를 지켜준 그림자였습니다.)

길게 굽이돌아 온 삶을 쓰다듬어 보니

손에 남은 지혜라곤 한 줌뿐이더이다.

그저 고개를 숙일 줄 아는 것, 그 겸손 하나가 나를 여기까지 데려왔습니다.

집은 크고 넓으나

마음 기댈 자리가 아득해지는 순간이 있습니다.

눕고 앉아보아도 문풍지 사이 바람이 스며들 듯 외로움이 찾아옵니다.

몸의 리듬은 더디어져 가지만

그 느린 박동 속에서도 책임은 여전히 나를 일으켜 세웁니다.

“나를 부르는 일터의 소리는 저녁 하늘을 스치는 새의 그림자처럼

조용하고도 깊게 스며들었습니다.”

그리하여 나는 늦깎이 직장인으로 오늘을 삽니다.

버거운 하루라 여겼다가도 젊은 눈빛들과 마주하며

문득 듣는 ‘상무님’ 한마디에 삶을 지탱하는 기둥 하나가

소리 없이 다시 세워집니다.

긴 세월이 남겨준 결론은 원대하지 않았습니다.

나를 낮추고, 말을 줄이며, 부드럽게 “예” 하고 순명(順命)하는 것.

그 단순한 길이 이제야 비로소 손에 잡히는 지혜입니다.

오늘도 작은 미소 하나 가슴에 품고 천천히 출근길로 발을 내딛습니다.

에필로그

황혼의 길 끝자락에서
나는 비로소 세월이 남긴 낮은 숨결을 들었습니다.

인생은 화려한 마침표를 약속하지 않지만,
조용히 걸어온 발자국들은
저물녘 달빛 아래에서도 한동안 빛나더이다.

오늘 하루를 견뎌낸 사람들이
아프지 않기를,
슬프지 않기를,
바람이 멎은 저녁 하늘 아래
나는 소리 없이 마음을 내려놓습니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들리지 않는 곳에서 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