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80년대 학번입니다. 당시에는 학생 운동이 한참이라 학교 주변에 최루탄 냄새가 진동하는 날이 많았고 예고 없이 갑자기 휴교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한 번은 중간고사날이었는데 공부보다는 노는데 집중하다 보니 시험 당일에야 벼락치기 공부를 하려고 새벽에 학교 도서관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런데 학교에 도착해 보니 예고 없이 2주 휴교령이 내려진 상태여서 "2주 동안 열심히 공부해야지"라고 굳게 마음먹고 집에 돌아왔지만 2주 후 시험당일 같은 새벽시간에 벼락치기 공부를 하려고 학교 도서관으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세월에도 낭만은 충만하여 연애를 했는데 첫눈이 오면 함께 자주 가던 생맥주집에서 만나자라고 여자 친구와 약속을 했습니다. 초겨울 어느 날 여전히 공부를 하지 않고 당구장 2층에서 당구를 치다가 첫눈발을 보고 당장 그 생맥주집으로 달려갔습니다. 아직 이른 저녁시간이라 아무도 없어 혼자 여자 친구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마침 친구들이 우르르 들어 오더군요. 잘 됐다 싶어 그들 무리와 함께 맥주를 마시며 제 여자 친구를 기다렸는데 1시간, 2시간이 지나도 그녀는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처음에는 혼자 기다리는 저를 놀리던 친구들이 시간이 지나니 제 눈치를 슬슬 보더군요.
그 당시에 연락할 방법은 여자 친구집에 전화를 거는 수밖에 없었었습니다. 그녀의 부모님이 전화를 받으실 위험을 무릅쓰고 용기를 내어 전화를 걸었더니 아직 학교에서 오지 않았다 하시더군요. 결국 밤늦게까지 그녀는 나타나지 않았고 그녀의 부모님과 다시 대화할 자신도 없어 더 이상 전화도 못 걸고 집에 와서 쓰러져 버렸습니다. 기분이 안 좋은 상태에서 술을 많이 마셨는지 너무 피곤하더군요.
다음날 결국 통화가 되었는데 그녀의 대답이 저를 맥 빠지게 했습니다. 그녀의 학교가 위치한 지역은 그날 눈이 오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원래 첫눈은 산발적으로 내리는 경우가 많은데 제가 다니던 학교와 그녀의 학교는 상당한 거리가 있었기 때문에 저 혼자 학교 주변에 조금 내린 눈을 보고 설레발을 친 것이었습니다. 핸드폰으로 서로의 근황을 실시간으로 확인할 수 있는 요즘 시대에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지만 당시는 서로 집에 있지 않는 한 도저히 연락을 할 수 없는 시대였습니다. 집 전화번호를 모를 경우에는 편지를 상대방의 과 사무실로 보내 연락을 시도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너무나 불편한 아날로그 시대였지만 나름대로의 낭만과 기다림의 여유, 설렘이 있던 그 시대가 가끔 그립습니다. 아니, 어쩌면 그 시절의 제 젊음이 그리운 것일지도 모르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