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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수민 Sep 10. 2023

신나는 덕질과 꺾이는 덕질

1. 오타쿠의 시작점

  

초등학생의 방학이란 흐르는 시냇물처럼 붙잡을 수 없는 시간이었을 것이다. 매일 매일 놀아야 할 것들이 얼마나 많았던지 모르겠다. 6학년 때의 어느 방학이었다. 그 와중에도 방학 숙제는 밀리지 않고 꼬박꼬박하는 어린이였다. (그 해 숙제가 자율 주제라 가능했을 것이다) 플로피 디스켓에 자작시를 차곡차곡 저장했고, 무지 스프링 노트에는 의류 디자이너의 스케치처럼 마네킹 같은 마른 몸매의 여자 위에 내가 상상한 옷을 그려 넣었다. 꽤 두꺼운 노트를 가득 채웠으니, 솜씨가 어떠했건 간에 그 열정만은 대단했을 것이다. 누가 가르쳐 준 적도 없었지만, 그때부터 손으로 무언가 하는 걸 참 좋아했다. 그렇게 방학 동안 열심히 했던 성과물(두꺼운 노트와 여러 개의 검정 플로피 디스크)을 들고서 당당하게 개학 날 학교에 제출했다.


 며칠 간의 숙제 검사와 점수 매기기를 끝낸 난 담임 선생님이 나를 조용히 부르셨다.


 "수민아, 그림 그리기 너무 훌륭하고 잘했어. 언제 이렇게나 많이 그렸을까. 대견해. 그런데 디스켓 안의 시는 어디서 보고 적은 걸까? 이건 점수를 줄 수 없어서 0점이야."


 그 말과 함께 돌려주신 디스켓에는 내가 붙인 이름 스티커 위에 검정 동그라미 하나만 덜렁 그려져 있었다. 억울했다. 정말 나는 어디서 보고 베껴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잠깐 나는 손에 그걸 쥐고서 선생님 자리 앞에 아무 말 없이 서 있었다. 담임선생님은 키가 크셨는데, 네모난 안경알 뒤의 단호한 눈빛이 나를 내려다보며 더 혼내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선생님 이거 제가 진짜 생각해서 쓴 게 맞아요. 이 글이 정말 선생님 말씀처럼 어떤 글을 베낀 거라면, 선생님이 뭔지 찾아서 저에게 그 글을 보여주세요."

"정말...... 만약에 그렇다면 너는 0점으로만 끝나지 않을 거야. 괜찮겠니?"

"네. 진짜 아니에요. 저"


 당시 우리 반에는 '어린이 재판'이라는 규칙이 있었다. 담임 선생님은 전체 조율을 하시고 마지막 정리를 하는 역할(지금 생각해 보니 대법관인가)을 맡으셨다. 반 친구들 중에서 사건과 연관이나 친분이 전혀 없는 사람이 판사 역할을 할 수 있었다. 사건의 당사자들은 피고인도 됐다가 상대방을 고발하는 검사도 됐다. 그리고 변호사가 되어 스스로를 편들어야 했다. 까딱하다간 나는 이 공개재판에 회부될 판이었다. 거기서 반 아이들에게 공개 망신과 더불어 전교생에게 그리고 온 학교 선생님들에게 내가 어떤 식으로 소문이 날지는 이미 6학년이던 내가 더 잘 알고 있었다.


 개학하고 다시 며칠이 흘렀다. 학교에 가는 길이 더 이상 신나지 않았다. 언제 갑자기 어떤 일이 생길지 몰라서 나는 반에 들어가는 순간마다 떨렸던 것 같다.  베낀 글로 점수를 얻으려던 사기꾼 신분으로 '보류' 중인 상태가 서러웠다. 선생님은 나를 싫어하지 않으셨다. 그 선생님을 떠올리면 하하핫 웃는 통쾌한 웃음소리와 시끌벅적 이던 반 아이들을 카리스마 있게 통솔하시던 멋진 기억들이 더 많다. 아마 선생님은 정말 열심히 '어떤 글'을 찾으셨을 것이다. 어쩌면 정말 비슷한 무언가가 있었을 수도 있다. 그런 성격이었다. 매사 꼼꼼하고 또 공명정대하신 분.


 하지만 비슷하게 베꼈다던 '그 글'은 결국 발견되지 않았다. 나는 드디어 다시 점수를 받을 수 있었다. 선생님은 내게 플로피 디스켓에 다시 점수를 적어서 돌려주셨다. 그러면서 칭찬인지 사과인지 모를 말을 해주셨는데 그 대화만은 정확히 잘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그 방학 이후로 나는 학교 대표로 산문시를 쓰는 대회에도 나가지 않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중학생이 되었다. 억지로 검사받아야 하는 일기조차 쓰지 않아도 되는 학생이 되었다. 나는 시도 일기도 쓰지 않는 학생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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