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의 언어 발달을 유심히 관찰하는 건 나의 직업병이었다.
학교에서 배운 언어 습득 이론과 발달 단계 지식을 떠올리며, 아이의 소리 한마디, 표정 하나를 분석하듯 바라보곤 했다.
알고는 있었다. 언어 발달은 아이마다 다르고, 조급함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걸. 그저 풍부한 언어 환경을 만들어주고, 충분한 자극을 제공하면 된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모든 지식을 품은 채, 나는 불안했다. 인스타그램에서 발달 지연이나 자폐 스펙트럼 아동의 초기 징후에 관한 글을 무심히 넘기다가도, 혹시 우리 아이에게 비슷한 부분이 있는지 곱씹었고, 왜 아직도 나를 ‘엄마’라고 부르지 않나 발을 동동거렸다.
그 불안의 본질은 무엇이었을까. 지금 돌아보면, 나는 아이가 걱정되었던 게 아니라 나 자신이 두려웠다. 혹시 아이에게 언어 습득이 지연될 만한 신경학적 혹은 생물학적 요인이 있다면, 그 아이를 평생 어떻게 잘 키워낼 수 있을지 두려웠고, 그런 요인이 없음에도 말이 늦다면, ‘영어 교육 전문가의 아이가 언어 발달이 늦다’는 시선을 받게 될까봐 두려웠다. 우스운 일이다. 아이의 속도는 그저 아이의 것일 뿐인데, 나는 그 아이를 나의 증명서로 만들고 있었다.
우리 아이는 신체적으로도, 언어적으로도 또래보다 눈에 띄게 빠르진 않았다. 발달 지연이라고 할 정도는 전혀 아니었지만, 나는 혹시 모를 가능성 0.0001%조차 남기고 싶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뒤처지지 않기’만을 바라지 않았다. 조금은 앞서 주기를, 조금은 더 탁월하기를 바랐다. 물론 그런 마음을 입 밖에 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나는 아이를 사랑했지만, 그 사랑 안에는 두려움이 섞여 있었다. 아이의 성취에는 안도했고, 또래보다 조금 늦는 것 같으면 불안했다. 그건 아이를 위한 감정이 아니었다. 전부 나를 위한 것이었다.
언어 교육을 가르치며 수없이 강조해온 말들이 있다.
“아이를 비교하지 마세요.”
“기다려주는 게 최선입니다.”
강연에서도, 글에서도 나는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데 정작 내 아이 앞에서, 나는 그 모든 원칙을 지킬 수 없었다. 이론은 알았지만, 실천은 별개였다. 전문가로서의 나와 엄마로서의 나 사이에는 깊은 골이 있었다.
나는 아이의 말을 기다리면서도, 기다리지 못했다. 모든 언어적 환경을 조성해줄 수는 있어도, 대신 말을 배워줄 수는 없다는 단순한 진실을 알면서도, 느긋하게 기다려주는 일이 가장 어려웠다.
나는 깨달았다. 내가 두려워했던 건 아이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통제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나는 영어 교육 전문가니까, 언어 발달에 대해 잘 아니까, 무언가 해줄 수 있을 거라 믿었다. 아니, 믿고 싶었다.
하지만 아이는 내 지식의 결과물이 아니었다. 아이는 자신만의 시간표를 가진, 독립된 인격체였다. 내가 아무리 많이 알아도, 아무리 완벽한 환경을 만들어줘도, 아이는 자신의 리듬으로 자랐다. 그리고 바로 그 무력감이 나를 더 불안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결국 아이는 자신의 때에 맞게 발달 과제를 하나씩 달성해갔다. 어느 날 갑자기 논리적인 문장으로 자신의 생각을 말하며, “얘가 언제 이렇게 자랐지?” 부모를 놀라게 했다.
그때 나는 깨달았다. 아이는 늘 잘 자라고 있었다. 문제는 아이가 아니라, 나였다. 아이를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내 두려움의 렌즈를 통해 바라보았던 나. 너무 사랑하고, 너무 많이 알아서 오히려 아이의 하루를 온전히 즐기지 못했던 것 같다. 걱정과 우려 섞인 눈빛으로 그 예쁜 시기를 불안과 함께 흘려보냈다.
아이의 첫 옹알이, 첫 단어, 첫 문장. 그 순간들을 경이로움으로 받아들이는 대신, 나는 그것들을 체크리스트의 항목으로 만들었다.
‘18개월인데 단어가 10개 미만’,
‘24개월인데 두 단어 조합이 어색하다’.
숫자와 기준, 평가로 아이를 재단했다. 지금 생각하면 너무 미안하다. 그 시간은 다시 오지 않는데.
이제는 안다.
나의 지식이 아이를 자라게 하는 게 아니라, 나의 믿음이 아이를 자라게 한다는 것을.
그리고 무엇보다, 아이의 발달이 나의 가치를 증명하지 않는다는 것을.
나는 여전히 영어 교육 전문가다. 하지만 내 아이 앞에서만큼은, 그냥 엄마이고 싶다.
전문가의 눈으로 분석하는 대신, 엄마의 눈으로 사랑하고 싶다.
완벽한 언어 환경을 만들어주려 애쓰는 대신, 그저 함께 웃고 놀고 싶다.
아이의 성장을 내 능력의 증거로 삼는 대신, 아이 자체를 기적으로 받아들이고 싶다.
이제는 아이의 발달이 아니라, 내 마음의 성장을 배워야 할 때다.
통제하려는 욕망을 내려놓는 법, 불완전함을 받아들이는 법, 두려움 대신 신뢰를 선택하는 법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