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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크레이지 라마 Aug 19. 2024

연옥

THE MIDDLE WAY




                  * 연옥 : 죽은 영혼이 천국에 들어가기 전에 남은 죄를 씻기 위하여 불로써 정화하는 장소



바람소리와 쾌속정 모터소음이 들려온다. 뱃머리가 가르는 강줄기는 거짓말처럼 두 개의 색으로 뚜렷하게 양분돼 흐른다. 2013년 여름이다. 쾌속정 한 대가 십 여명의 관광객을 싣고 광대한 아마존강을 시원스레 달린다. 쌈바 리듬의 브라질 민속 음악이 낡은 스피커에서 터져 나온다. 가이드가 선체 기둥을 잡고 마이크에 음성을 싣는다. 물과 기름처럼 경계를 이루며 흐르는 두 개의 지류는 이 상태로 수 킬로미터를 흐른다고 한다. 원인은 부유물 때문이란다. 밝은색 지류는 오랜 시간 암석층에서, 어두운 지류는 밀림지대의 낙엽이나 풀뿌리에서 녹아나온 물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두 개의 지류가 섞이는 순간이 있는데, 바로 비가 올 때라고 한다. 우중에는 수온차가 비슷해지면서 하나가 된다고 덧붙인다. 말 끝나기 무섭게 거짓말처럼 굵은 물방울이 하나 둘 떨어진다. “어?“ 손바닥을 펼쳐 떨어지는 빗방울을 감지하는 관광객. 천둥 소리와 함께 본격적으로 비가 쏟아진다.  관광객들은 짜증 가득한 얼굴로 손우산을 하고 겉옷을 벗어 머리 위로 쓴다. 가이드는 괜스레 미안한 표정이다. 선원들은 차양막을 펼친다. 관광객들 모두 그 밑으로 들어가 비를 피한다. 다른 색으로 흐르던 두 개의 지류는 가이드의 말대로 거짓말처럼 하나가 된다. 마치 서로가 서로를 삼키듯 휘감긴다. 


                                            *                     *                     *                    *                     *          

                                                     

룸미러에 매달린 조그만 트리장식과 새해 문구가 클로즈업되어 보인다. MERRY CHRISTMAS & HAPPY NEW YEAR ’2024‘. 어두운 차 안에서 한 남자가 눈을 뜬다. 방석중 (남 41)이다. 석중의 왼쪽 눈 동공은 짙은 회색이다. 온전한 오른쪽과 비교해 움직임이 부자연스럽다. 아마도 왼쪽 눈의 시력을 거의 잃은 듯 보인다. 석중은 숙취에 괴로워하며 몸을 일으켜 밖을 본다. 어두운 지하 주차장 7층이다. 마감이 덜 된 거친 벽과 천정 그리고 바닥을 비추는 낮은 조도의 백열전등. 게다가 흰색이어야 할 주차라인은 빨간색이고 주변에 다른 차는 한 대도 없다. 석중은 차 바닥에 떨어져 있는 휴대폰과 안경을 집어 든다. 동그란 안경알은 옅은 오렌지색인데, 때문에 왼쪽 눈이 덜 부담스럽게 보인다. 휴대폰을 켠다. 프로필 화면에는 환하게 웃는 어린 여자애(딸)와 석중의 사진이 깔려있다. 현재 시간은 표시되지 않는다. 통화권 이탈에 인터넷 신호도 잡히지 않는 상황. 문득, 시선이 운전석과 조수석 사이에 놓인 명함 크기의 광고지에 꽂힌다. 집게 모양의 로고 밑에 상호명과 휴대폰 번호가 인쇄돼 있다. 상호명은 ‘핀셋 대리운전’이다. 석중에게 간밤의 기억이 파편처럼 스친다. 만취해 유흥가를 비틀대며 걷는 자신의 모습. 바닥에 떨어진 전단지들 속에서 ‘핀셋 대리운전’ 광고지를 줍는 자신의 손. 인파를 헤치고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대리기사. 역광을 받아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 석중이 기억하는 건 여기까지다. 운전석으로 넘어가 블랙박스 녹화 영상을 검색해보지만 모두 삭제된 상태다. 


차량 전원을 켠다. (석중의 차는 전기차다.) 내장된 커다란 화면에 불이 들어오면서 배터리 부족 경고 메시지가 뜬다. 1퍼센트에서 깜박이고 있다. 차가 곧 꺼진다는 뜻이다. 석중의 표정에 낭패감이 스치고 시선은 차창 너머 상층부로 오르는 통로로 향한다. 

잠시 후, 석중의 차가 천천히 오르막을 오르고 있다. 지하 6층에서 지하 3층까지 오르며 석중은 주변을 계속 살핀다. 여전히 다른 차는 한 대도 없다. 어둡고 텅 빈 주차구역에 빨간색 라인만 반듯하고 선명하게 그어져 있다. 그리고 그 위로 수많은타이어 자국들이 기다랗게 지나고 있다.   

석중의 차가 지하1층에 진입한다. 멀리 대각선 방향 끝에 있는 출구를 향해 차를 몬다. 거리가 좁혀들수록 석중의 표정은 놀라움으로 변해간다. 지상으로 오르는 출구는 콘크리트로 막혀 있고, 그 앞은 마치 병목구간처럼 십 수대의 차들이 방사형으로 퍼져 있다. 운전석 문은 열려 있고 시동은 꺼져 있으며 사람은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석중은 차에서 내려 콘크리트와 가장 맞닿아 있는 선두 차량으로 다가간다. 범퍼와 본네트가 흉하게 찌그러져 있다. 빠른 속도로 달리다가 콘크리트와 충돌한 것으로 짐작됐다. 운전석 에어백이 터져있고 피가 적갈색으로 굳어있다. 뒷차들도 연쇄적으로 충돌한 상태다. 기막힌 광경 앞에서 할 말을 잃는다. 


(시간경과) 탁! 탁! 탁! 석중은 차갑고 거친 콘크리트(입구)를 손바닥으로 두드리며 소리를 지른다. 밖에 누가 없는지, 있다면 도와달라고 필사적으로 외친다. 하지만 답은 없다. 벽에 귀를 대봐도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난처한 얼굴로 계속 귀를 기울이는데, 등 뒤에서 희미한 벨소리가 들린다. 소리는 멀찍이 세워진 자신의 차 안에서 들려오고 있다. 석중은 허겁지겁 자신의 차로 뛴다. 


운전석 도어를 열자, 조수석 바닥에 떨어진 휴대폰이 요란하게 울리고 있다. 화면에 표시된 발신자명은 ‘내 운명’으로 석중의 아내 명선이었다. 통화 연결 버튼을 누르자 싸늘한 음성이 들려온다. 명선은 어디냐 물었고 석중은 지하 주차장에 갇혔는데 어딘지는 모르겠다고 말한다. 그러자 명선은 경찰이 찾아왔었노라 말하고, 덧붙여 석중의 명의로 된 빌라가 백 채가 넘는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고 덤덤히 말했다. 석중은 순간 올 것이 왔다고 짐작했다. 하지만 억울했다. 모든 건 병태가 벌인 짓이다. 병태는 석중과 부동산 분양 컨설팅 회사를 운영하는 공동 대표였는데, 녀석은 빌라 전세 세입자를 상대로 사기를 치기 시작했고, 석중에게 수익을 나눠주겠다며 명의를 빌려간 상태였다. 하지만 그게 백 채가 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건 불과 며칠 전이었다. 명선은 눌러놨던 화를 본격적으로 폭발시켰다. 석중은 고개를 숙인 채 입술을 깨물었다. 이때, 휴대폰으로 메시지 폭탄이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다. 발신자는 모두 병태에게 전세 사기를 당한 피해자들이었다. 욕설과 협박 그리고 분노로 가득찬 메시지들이 쇄도했다. 동시에 스피커를 뚫고 아내의 신세한탄도 들려왔다. 순간, 석중은 명선이 위험해질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당장 집에서 나오라고 소리쳤다. 하지만 명선은 전화를 끊어버렸다. 다시 걸지만 전원이 꺼져있다는 자동응답이 돌아왔다. 석중은 급한 마음에 카톡창을 열고 지금 위험하니 집에서 나와 있으라며 문자를 찍어 보냈다. 하지만 숫자 1은 끝끝내 사라지지 않았다. 다급해진 석중은 지도앱을 열어 현재 위치를 검색했다. 텅 빈 그리드에서 붉은색 점 하나만 반짝이고 있었다. 여긴 대체 어디란 말인가... 석중은 주변을 둘러봤다. 비상구는 어디에도 없었다. 지잉- 지잉- 요동치는 휴대폰 진동음만이 적막을 깨고 있었다. 



                                                        1장. 점화 (點火) 


석중이 문 담배에 불이 붙고 화르르- 소리를 내며 타들어갔다. 석중은 병태에게 전화를 걸어 따지고 있었다. 지금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고. 명의만 빌려주면 뒷일은 알아서 한다고 말하지 않았느냐고. 병태는 이미 비행기에 탑승해 이륙을 기다리고 있었다. 속았다는 사실을 깨달은 석중은 병태를 향해 괴성을 내지르지만 달라질 건 없었다. 그렇게 또다시 통화가 종료되고 석중은 112를 눌렀다. 하지만 차마 통화연결 버튼이 눌러지지 않았다. 자신에게도 죄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지역번호 02로 시작하는 낯익은 숫자로 전화가 걸려왔다. 집이었다. 석중은 받자마자 명선의 이름을 불렀다. 집에서 빨리 나오라고. 하지만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온 음성은 악덕 사채업자 편성협 대표였다. 


석중은 순간 머리가 주뼛 서는 기분이었다. 편대표는 병태와 함께 분양 컨설팅 회사를 창업할 때 돈을 빌린 대부업체 사장으로 조폭이나 다름없는 무서운 자였다. 석중이 사기 혐의로 경찰에 고소 고발됐다는 사실을 전해듣자 집으로 쳐들어온 것이었다. 불행 중 다행으로 아내 명선은 집에 없는 것 같았다. 편대표는 자신에게 빌려간 돈을 갚지 못한다면 아내를 찾아내 다시는 만날 수 없게 해버리겠노라 협박했다. 석중은 그가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인물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어떻게든 아내를 지켜야 했던 석중은 만약을 대비해 준비해둔 무기를 꺼내 들었다. 무기는, 과거 편대표가 채무자를 협박하는 내용이 담긴 녹취 파일이었다. 채무자는 한남동 유명 갤러리 관장으로 얼마 전 실종된 것으로 세간에 알려져 있었다. 아마도 죽었으리라, 짐작하고 있었다. 석중은 만약 아내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이 파일을 경찰에 넘기겠노라 협박하지만, 도발은 헛발질로 끝났다. 편대표는 이미 자신의 수하들을 시켜 석중이 지금 갇혀있는 곳의 출입구를 뚫고 있었다. 석중은 출입구를 가로막은 콘크리트에 귀를 댔다. 벽 너머에서 희미하게 모터 소음이 들려오고 있었다. 편대표의 말은 사실이었다. 그는 곧 만나자는 말과 함께 이번엔 온전한 오른쪽 눈마저 감겨주겠다고 말했다. 석중은 전화를 끊고 뒤돌아 자신의 차로 뛰었다. 차량은 급격히 유턴곡선을 그리며 왔던 길을 돌아 내려갔다. 석중의 차는 지하 2층을 지나 지하 7층까지 빠른 속도로 질주해 내려갔다. 공포에 질린 석중은 과거 편대표와 처음 대면한 날을 떠올리고 있었다. 


서울의 어느 고급 호텔 스위트룸이었다. 화창한 햇살이 내려오는 테라스 체어에 앉은 편대표는 가운 차림으로 LSD (환각제)를 흡입하고 있었다. 거친 숨소리를 내뱉으며 고개를 뒤로 젖혔고, 하아....... 숨소리와 함께 환희에 차 눈을 감았다. 천국이라도 다녀온 얼굴이었다. 멀리 성당 종소리가 들려왔다. 테라스와 연결된 넓은 거실 쇼파에는 수트를 차려입은 석중과 병태가 긴장한 얼굴로 나란히 앉아 있었다. 편대표는 자리에서 일어나 비틀대며 거실로 들어섰다. 살벌한 체격과 인상을 가진 경호원들이 호위무사처럼 지키고 서 있었다. 


잠시 후, 석중과 병태는 편대표 앞에서 계약서에 서명을 하고 있었다. 편대표는 나른한 눈빛과 자세로 두 사람을 내려다보고 있었고, 입회한 변호사가 서명이 날인된 계약서를 건네 받았다. 변호사가 계약 내용을 브리핑하자, 편대표는 가로막고 한 가지만 강조했다. 그것은 신용이었다. 덧붙여 자신에게 신용을 잃게 되면 그곳이 지옥이라 할지라도 끝까지 찾아내 책임을 묻는 게 자신의 사업 원칙이라고 말했다. 편대표는 미소를 띠고 있었지만 번들대는 눈은 살기로 가득했다. 병태는 마치 사무라이가 주군에게 충성을 맹세하듯 “네!“ 라고 짧고 굵게 말했고, 석중은 안타깝게도 타이밍을 놓쳤다. 편대표는 석중을 보더니 한쪽 눈을 찡긋했다. 석중의 보이지 않는 왼쪽 눈을 놀리 듯이.


(현재) 석중은 어느새 지하 17층을 내려가고 있었다. 핏빛이나 다름없는 붉은색 라인이 주차 구획을 나누고 있을 뿐, 차는 한 대도 보이지 않았다. 내리막 통로에 진입해 코너를 돌아내려가는 순간이었다. 검은 무언가가 바닥을 슥- 지나갔다. 놀란 석중은 핸들을 틀었고, 차는 날카로운 소음과 함께 멈추며 동시에 전원도 꺼졌다. 배터리가 완전히 방전된 것이다. 석중은 핸들에 처박았던 얼굴을 들어 밖을 봤다. 하마터면 벽과 충돌할 뻔한 상황이었다. 움직이던 검은 무언가는 보이지 않았다. 석중이 주변을 둘러보는데 순간, 운전석창에 시커먼 손이 턱- 닿았다. 석중은 머리가 주뼛서는 기분이었다. 창에는 떼가 꼬질꼬질 낀 사람 손바닥이 달라 붙어 있었다. 그리고 봉두난발을 한 검은 얼굴 하나가 슥- 올라왔다. 석중은 기겁하며 조수석까지 물러났다. 차 밖에서 거지꼴을 한 칠십 먹은 노인에가 검은 이를 드러내며 웃고 있었다. 노인은 손나팔을 만들어 창문에 갖다대더니 자신은 사람이니 겁내지 말라고 했다. 석중은 두 눈이 휘둥그레져 노인을 쳐다봤다.


차에서 내린 석중이 노인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두툼한 검정색 패딩으로 몸을 휘감은 노인은 바닥에 주저앉아 석중을 올려다봤다. 패딩 밑단으로 드러난 가느다란 종아리는 힘을 전혀 쓰지 못하는 듯 보였다. 석중은 노인에게 누구냐고 물었고, 그는 얘기를 좀 하자며 썩은 이빨을 다시 드러냈다. 입 안에서 벌레가 기어나온다해도 조금도 이상할 것 없어 보이는 치아였다. 석중의 등 뒤로 콘크리트 타공음이 희미하게 들려왔다. 이럴 때가 아니라고 판단한 석중은 노인을 지나쳐 밑으로 뛰어 내려가려고 했다. 하지만 노인의 손이 석중의 손목을 붙잡았다. 생각보다 센 악력이 었다. 석중은 놓으라 말했고, 노인은 걱정하지 말라며 벽이 두꺼워서 쉽게 뚫리지 않는다고 안심시켰다. 노인은 거지꼴을 하고 있었지만 빛나는 안광이 뭔지 모를 믿음을 전해주고 있었다.  


잠시 후, 석중은 손에 든 휴대폰으로 여기저기 다니며 신호를 잡으려고 애쓰고 있었다. 하지만 통화권 이탈과 인터넷 송수신 불가를 알리는 신호는 그래로였다. 노인은 느긋한 자세와 목소리로 꼰대처럼 말했다. 지하 1층 출구 앞에서만 되고 그 밑으로는 안 잡힌다고, 옛날에 다 해 봤다고 꼰대처럼 말한다. 석중은 결국 포기하고 카톡창을 열었다. 아내 명선에게 보낸 바 있는, 위험하니 집에서 빨리 나가라는 메시지에 달린 숫자1은 사라진 상태였다. 일단 마음이 놓였지만 멀리서 들려오는 타공음은 석중을 계속 자극했다. 상황을 짐작한 노인은 자신이 이곳에 들어온 지 삼년이 넘었는데, 지켜본 바에 의하면 가장 빨리 뚫고 들어온 사람이 닷새 걸렸노라 말했다. 석중은 닷새가 걸렸다는 말보다 여기서 삼년을 지냈다는 말이 놀라웠다. 길게 자라난 노인의 허연 수염과 머리칼에서 지난 시간이 짐작됐다. 노인이 걸친 패딩은 악취를 풍겼지만 몽끌레어 브랜드, 그 중에서도 최고급 라인에 속했다. 석중은 이곳이 어딘지 물었다. 그러자 노인은 주머니에서 ‘핀셋 대리운전’ 광고 명함을 꺼내 내밀었다. 석중의 차에 있던 것보다 훨씬 더 낡고 훼손된 상태였다. 노인은 삼년 전, 술에 취해 대리를 부른 뒤 이곳에서 눈을 떴노라 말했다. 하지만 그 역시도 이들의 정체와 이곳의 실체를 알지 못했다. 놈들은 조폭인 것 같기도 하고 사이비 종교 집단 같기도 하다며 확인되지도 않은 말을 늘어놨다. 그러더니 대뜸 석중에게 돈 필요하지 않느냐 물었다. 노인은 석중의 마음을 꿰뚫어 보는 것처럼 말했다. 검은 손끝으로 천정을 가리키더니, 지금 저 위에서 벽을 뚫고 내려오려는 자들이 너에게 돈을 받으러 온 빚쟁이들이 아니냐고 물었다. 석중은 뜨끔했지만 아닌 척 했다. 하지만 속내를 알아 챈 노인은 자신의 패딩 주머니에서 뭔가를 한 움큼 꺼내 바닥에 늘어놓았다. 시계, 목걸이, 반지, 귀걸이, 벨트, 지갑 등등 모두 값비싼 명품 브랜드 물건이었다. 노인은 이것들 모두 압구정 중고 시장에 내다 팔아도 사오천은 족히 모일 거라고 장담했다. 사실이었다. 물건이 진품이라는 것을 알아 본 석중은 노인을 다시 보게 된다. 노인은 지하로 향하는 내리막 통로를 가리키며 저 아래로 계속 내려가다보면 이런 물건들을 가마니로 퍼담을 수 있는 곳이 나온다고 말했다. 하지만 숨겨져 있어서 자신만이 정확한 위치를 알고 있다는 단서를 달았다. 석중은 그 물건들이 몇 층 그리고 어디에 있는지 묻지만 노인은 대답 대신에 자신이 원하는 바를 말하기 시작했다. 그가 원하는 것은, 지하 101층 까지 내려가는 것이었다. 그곳이 이 주차장의 최하층인데, 자신을 차에 태워서 거기 내려주면 물건이 숨겨진 장소를 알려주겠노라고 말했다. 덧붙이길, 그곳에는 이런 명품들 말고도 현금 수백 억이 쌓여있다고 했다. 석중은 노인의 말을 다 믿을 수 없었지만, 그렇다고 안 믿을 근거도 없었다. 멀리서 들려오는 타공음은 좀 더 크고 묵직해지고 있었다. 소리에 귀 기울이던 노인은 코아비트가 유압식으로 바뀌었다느니, 커터헤드가 오백 파이로 교체돼서 뚫리는 시간이 단축될 것이라느니, 남 얘기 하듯 말했다. 다급해진 석중은 결국 노인의 말을 믿기로 했다. 그리고 등에 업히라고 말했다. 지하 101층까지 데려다 주겠노라고. 노인은 고개를 내저었다. 석중이 타고 온 저 차를 타고 가야만 한다는데... 이유는 차차 알게 될 거라고 말했다. 하지만 석중의 차는 이미 배터리가 방전된 상태였다. 상황을 전해들은 노인은 지하 21층에 가면 전기 코드 꽂을 데가 있다며 거기까지만 차를 밀어서 내려가자고 제안했다. 석중은 천정에 박힌 백열전구들을 올려다봤다. 낮은 조도이긴 하지만 지하 주차장에는 분명 전기가 통하고 있었다. 



                                                                 2장 발화 (發火) 


석중이 차를 뒤에서 밀었고 노인은 운전석에 앉아 방향을 잡았다. 석중의 차는 지하 19층을 지나고 있었다. 타공음은 조금 희미해졌지만 여전히 인지되고 있는 상황. 겁이 났다. 차라리 차를 버리고 밑으로 갈 수 있는 데까지 뛰어내려가 숨는 게 최선이지 않을까 싶었다. 내려가는 길에 혹시 비상구를 만날 수도 있을 테고...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하지만 노인의 말을 흘려버릴 수도 없었다. 현금으로 수백 억이라니... 그 돈이면 빚을 모두 갚은 다음 평생을 놀고 먹어도 될 금액이었다. 오만가지 생각이 찾아들면서 어느새 석중의 온 몸은 땀으로 젖어들었다. 범퍼를 미는 양팔 사이로 고개가 숙여지고 시선은 바닥을 향했다. 바닥에는 다른 차들이 먼저 지나며 남긴 자국들이 길게 이어지고 있었다. 이 자국들이 석중에게 떠올리기 싫은 그날을 되뇌이게 만들었다. 


석중이 여섯 살 때였다. 택시에 탄 어린 석중은 엄마와 함께 눈이 소복히 내린 농로를 달리고 있었다. 눈길에는 기다란 타이어 자국이 찍혀 있었고, 라디오에서는 강원도 고성지방을 중심으로 조류 인플루엔자가 확산되고 있다는 보도가 흘러나왔다. 어린 석중은 창 밖으로 스쳐 지나는 비닐하우스를 바라봤다. 닭농장이었다. 그 앞으로 깊게 파인 웅덩이 속으로 덤프 트럭이 뭔가를 쏟아붓고 있었다. 살아있는 닭들이었다. 인플루엔자에 감염된 수백 마리의 닭들이 생매장되는 광경이었다. 그 앞에 선 농가 주인이 참담한 얼굴로 구덩이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린 석중이 시선을 돌리자 차창 전면으로는 작은 보육원 건물이 다가오고 있었다.  


택시는 보육원 앞에 멈췄다. 석중의 엄마는 젖은 눈으로 어린 아들 앞에 쪼그려 앉아 머리를 쓰다듬었다. 두사람 뒤에는 보육원 수녀님과 보육교사가 서 있었다. 석중의 엄마는 곧 데리러 온다는 말을 남겼고 이것을 철썩같이 믿은 어린 석중은 천진한 얼굴로 빨리 오라며 보챘다. 석중의 엄마는 울음을 참느라 안간힘을 썼고 눈물이 흐르기 전에 단단한 표정을 만들며 택시에 올랐다. 문이 닫히고, 택시는 왔던 길을 다시 되돌아 달렸다. 뒷좌석 창에 앉은 엄마는 돌아보지 않았다. 그 뒷모습이 석중이 기억하는 엄마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현재) 회한과 분노가 가득 한 얼굴로 있는 힘껏 차를 밀던 석중은 노인의 목소리를 듣고 정신을 차렸다. 차는 어느새 지하 21층에 도달해 있었다. 노인은 운전석 창으로 고개를 내밀고 집중하라며 면박을 줬다. 하마터면 벽이랑 또 부딪힐 뻔 했다고. 석중이 주변을 둘러보니 온갖 잡동사니가 널브러져 있었다. 지하1층 출입구 앞에 방치돼 있던 차들에서 꺼내온 것들이었다. 사발면과 과자 그리고 생수 등등. 석중은 지하 1층에서 목격한 차들을 얘기하며 그 사람들은 지금 다 어디로 갔는지 물었다. 노인은 밑으로 내려갔다는 말만 했다. 노인의 모호한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석중은 참았다. 노인은 벽에 설치된 콘센트 박스로 석중을 인도했다. 녹슬고 곰팡이가 피어 있었다. 석중이 차량 충전 라인을 꺼내 콘센트와 차를 연결했다. 운전석 모니터를 확인했다. 전압이 너무 낮았다. 이 속도면 완충까지 서른 두 시간이 넘게 걸릴 것이었다. 시간이 없었다. 이 사실이 조금도 걱정되지 않는 노인은 석중의 차 트렁크를 열어 적재된 물건들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세차용품과 워셔액, 나이키 운동화, 골프가방, 부동산 관련 광고 전단 등이 나왔다. 석중은 시간이 없으니 차라리 다른 차를 타자고 제안하지만, 노인은 고개를 저었다. 전부 방전된 데다가 점프선도 없기 때문에 움직일 수 있는 차가 없단다. 속이 탔다. 노인의 행태가 석중을 더욱 자극했다. 노인은 트렁크 안 물건들을 마음 대로 만지다가 묵직한 전단지 뭉치를 발견하더니 한 장을 빼내 읽었다. 순간, 발끈한 석중은 노인의 손에서 전단지를 빼앗고 트렁크를 거칠게 닫았다. 전단지는 4년 전 실종된 석중의 어린 딸을 찾기 위해 만든 것이었다.   


노인은 석중이 딸을 찾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미안하다며 사과했다. 한번 터진 석중의 화는 쉽사리 가라앉지 않았다. 담배를 뻑뻑 피워대며 겨우 감정을 추스르는데, 석중의 시선에 무언가 보였다. 어둠 속에서 빨간 점 두 개가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순간 석중의 호흡이 거칠어지더니 불 붙은 담배를 바닥에 떨어뜨렸다. 쓰러진 석중은 발작을 일으키며 가슴을 부여잡고 짧은 숨을 토했다. 금방이라도 숨이 끊길 것 같았다. 노인이 기어와 진정시켰다. 하지만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고통에 몸부림치던 석중의 뇌리에는 두 번 다시는 떠올리고 싶지 않은 그날이 스쳐가고 있었다. 


어린 석중이 보육원에 버려지고 일년이 지났을 무렵이었다. 핏빛 노을 아래 황량한 들판이 펼쳐져 있었고 풀어헤쳐진 현수막이 바람에 휘날렸다. 야생조류에서 AI가 검출되어 출입을 금지한다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너머로 덩그러니 선 비닐하우스 폐닭장이 보였다. 닭장 안에는 집단 폐사한 닭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눈을 부릅뜨고 죽은 닭의 동공은 전부 핏빛이었다. 그 한 가운데, 팬티만 입은 어린 석중이 의자에 묶여 있었다. 몸 곳곳은 학대를 당한 흔적들로 가득했다. 석중 앞에는 원장 수녀가 무서운 얼굴로 서 있었고, 뒤로 남자 보육교사가 보였다. 원장 수녀는 석중에게 말했다. 외부 손님이 방문했을 때 한 번만 더 멋대로 지껄여 보라고. 그 벌로 내일 밤까지 이곳에 가두겠다고. 잘못했다고 울며불며 애원하는 어린 석중을 뒤로하고 원장 수녀와 보육 교사는 밖으로 나갔다. 어린 석중은 몸부림 치다가 의자와 한 몸이 되어 쓰러졌다. 굼뱅이처럼 몸을 뒤틀어 보지만 단단하게 묶인 끈은 풀리지 않았다. 석중을 둘러싼 폐사한 닭들에서 악취가 진동했다. 일부는 아직까지 살아서 힘없이 퍼덕였다. 석중은 서러운 울음을 터트렸다.   


밤이 됐다. 울다 지쳐 잠든 어린 석중이 천천히 눈을 떴다. 어디선가 기척이 들렸다. 소리가 난 쪽으로 시선을 돌리자, 봉분처럼 쌓인 닭 사체 위에 검은 새떼들이 모여 앉아 있었다. 까마귀떼였다. 천정에 찢겨진 비닐 틈새로 들어온 것 같았다. 까마귀들의 눈도 모두 시뻘갰다. 까마귀들은 아직 숨이 붙어있는 닭을 쪼아 먹고 있었다. 날카로운 부리에 내장이 뽑혀 올랐다. 파르르- 힘없이 날개짓을 하며 발을 떠는 모습에 어린 석중은 공포에 휩싸였다. 까마귀 한 마리가 어린 석중을 향해 고개를 틀었다. 푸드덕- 날개짓을 하며 코 앞에 내려 앉았다. 석중은 숨소리 조차 낼 수 없었다. 까마귀는 시뻘건 눈으로 어린 석중의 겁먹은 눈을 쳐다봤다. 숨 막히는 긴장 상태가 지속됐다. 순간, 까마귀의 날카로운 부리가 어린 석중의 왼쪽 눈으로 달겨들었다. 비닐하우스 밖으로 어린 석중의 비명이 퍼져나갔다. 먼 언덕 위에 세워진 교회의 빨간 십자가가 깜박이고 있었다. 


(현재) 악몽 같았던 그날의 기억에서 깨어난 석중은 긴 숨을 토해내듯 뱉었다. 노인이 석중을 일으켜 세우고 등을 두드렸다. 석중이 쏟아낸 것은 물이 전부였다. 식은 땀을 흘려대며 빨간 눈을 목격한 어둠을 다시 봤다. 아무것도 없었다. 환각이었다.


차량 배터리 충전량은 3퍼센트를 지나고 있었다. 이 정도면 십 킬로미터를 주행할 수 있는 양이었다. 천정에서 들려오던 타공음은 이제 거인의 느린 발자국 소리처럼 묵직해졌다. 불안한 석중은 이제 내려가야 한다고 말하지만 노인은 여전히 고개를 가로 저었다. 밑으로 내려갈수록 열기가 뜨거워질 것이다. 에어컨을 최대로 틀어야하는데 그러려면 충전을 넉넉히 해야 한다고 말했다. 내려갈수록 뜨거워진다니... 여긴 대체 어디란 말인가... 도무지 노인의 말을 신뢰할 수 없었던 석중은 강수를 둔다. 지하 101층에 뭐가 있는지 말하지 않으면 더 이상 함께 가지 않겠노라고 선언한다.  


석중이 물러서지 않을 거라고 직감한 노인은 답을 줄 터이니, 충전이 지속될 동안 자신을 업고 한층만 더 내려가 달라고 말했다. 석중은 만약 내려가서도 설명 못하면 당신과는 여기서 끝이라고 선을 그었다. 이후 석중은 노인을 업고 지하 22층으로 내려갔다. 노인은 석중의 휴대폰을 손에 쥐고 내장 손전등으로 앞을 비췄다. 어둠 속을 걸어내려가다가 노인이 물었다. 조금 전 발작했을 때 무엇을 봤는지. 석중이 대꾸하지 않자 노인은 그것이 섬망이라고 말했다. 이곳 공기 안에 뭔가 섞여 있는데 그 때문에 별의별 소리가 다 들리고 별의별 게 다 보이는 것이 분명하다고 말했다. 게다가 사람마다 각자 보고 느끼는 것이 다 다른데, 공통점은 살아오며 잊고 싶은 기억들이라는 점이라고 덧붙였다. 석중은 대꾸하지 않았다. 실체를 확인할 때까지 노인과는 거리를 두고 싶었다. 내리막을 다 내려와 코너를 돌자, 깊은 어둠이 두 사람을 가로 막았다. 노인이 손전등으로 바닥을 비추자 뭔가가 보이기 시작했다. 원과 삼각형이 겹쳐진 기이한 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석중이 긴장하자 노인은 겁먹지 말고 천천히 걸어가라고 말했다. 좀 더 들어가자 중심에 나무로 만든 소반이 놓여져 있었다. 위에는 향로가 바닥에는 잿통이 놓여 있었다. 노인의 손전등이 각도를 세우자, 구부정하게 앉아 말라비틀어진 사람의 뒷모습이 보였다. 시체였다. 석중은 비명을 내지르며 나자빠졌고 덩달아 노인도 바닥을 굴렀다. 석중이 바닥을 기며 왔던 길을 돌아가려는데 누군가의 손이 발목을 붙잡았다. 석중은 더욱 기겁하며 소리를 질렀다. 노인이었다. 노인은 진정하라며 시체일 뿐이라고 안심시켰다. 석중은 가까스로 정신을 가다듬으며 다시 봤다. 가부좌를 튼 채 숨이 끊어진 시체는 잿빛 법복을 걸친 승려였다. 부패가 한참 진행돼 뼈와 가죽만 남은 상태였다. 


노인이 이르길, 시체는 자신이 살던 지하 21층 바로 밑에서 살던 중이었다고 했다. 이 사람은 우리와 달리 ‘핀셋 대리운전‘에 의해 여기 던져진게 아니라 스스로 들어온 인물이라고 말했다. 노인이 가리킨 곳에는, 얼마나 휘둘러댔는지 날이 다 무뎌진 삽과 곡괭이들이 눕혀져 있었다. 중이 출입구를 막은 콘크리트를 깨부수고 들어올 때 쓴 작업도구였다. 노인은 중이 이곳에 처음 발을 디딘 그 순간을 묘사했다. 그가 지하 1층에 들어서자마자 위에서 누군가 액화 콘크리트를 쏟아부었다. 지상에서 내려오던 빛은 금새 사라졌다. 노인은 망연한 표정으로 막혀가는 출구를 올려다봤다. 삽자루를 움켜쥔 중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내리막 통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지상에는 조금도 미련이 남아있지 않은 사람처럼 말이다. 중이 말하길, 이곳은 지옥으로 내려가는 통로라고 했다. 지옥으로 내려가는 통로... 석중은 한 대 얻어맞은 얼굴로 가만히 쳐다보다가 실소를 터트렸다. 허탈한 웃음이었다. 노인의 말을 믿고 여기까지 내려온 자신이 한심했다. 노인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기억에 심취해 말을 이어갔다. 중이 이르길, 지하 101층에 가면 철문이 하나 나올텐데, 그 문을 나서면 지옥이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헌데, 그 지옥문은 보통 지옥문과는 달랐다. 바로 이점이 포인트였다. 그 문을 나가면 생전에 자신이 세상에 남긴 모든 흔적들을 지울 수가 있다는데... 썩은 이빨을 뽑고 나면, 시간이 지나 잇몸이 차오르고 새로운 치아가 올라오듯이 자신의 빈 자리가 다른 누군가에 의해 자연스럽게 채워진다는 얘길했다. 석중이 더 이상 믿지 않는다는 것을 직감한 노인은 입을 다물어 버렸다. 침묵... 또다시 묵직한 타공음이 석중의 고막을 파고 들었다. 둥- 두둥- 더 커지고 분명해져 갔다. 소리를 가만히 듣던 노인은 놈들이 다이너마이트를 터트리기 위해 장약공을 만들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폭약이 터지면 순식간에 출구가 뚫릴 것이다. 다급해진 석중은 노인의 멱살을 움켜쥐며 몰아세웠다. 여기 어딘가 돈이 있다는 말이 사실인지, 있다면 어디에 있는 것인지, 아니면 그것도 다 미친 소리였는지 말하라고. 노인은 석중을 노려볼 뿐 입을 꾹 다물었다. 화가 난 석중은 노인을 바닥에 넘어뜨리고 패딩 주머니를 뒤졌다. 일전에 노인이 보여준 명품 시계와 금부치들을 강탈했다. 노인은 빤히 올려다 볼 뿐 저항하지 않았다. 석중은 급한 대로 이거라도 갖고 올라가 편대표와 쇼부를 볼 심산이었다. 석중이 자리에서 일어나 내려온 길을 다시 올라가려는데, 발 아래 뭔가가 툭- 떨어졌다. 벤츠 로고가 박힌 차키였다. 노인이 말하길, 출입구에 세워진 차들 중에 벤츠가 있을 텐데, 뒷좌석을 열어보면 자신의 말을 믿을 수 있을 거라고 했다. 만약 그것을 보고도 믿기지 않는다면 어쩔 수 없다는 말도 덧붙였다. 석중은 벤츠키를 움켜쥐고 지하 1층까지 달렸다.  


지하 1층에 당도하자, 타공음은 벽과 바닥 전체를 울리고 있었다. 콘크리트 밖에서 마치 거대한 공룡이 머리를 치받고 있는 것 같았다. 다시금 통화권으로 들어온 석중의 휴대폰은 미친 듯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경찰조사 출석 명령이 담긴 문자 메시지부터 전세 피해자의 협박문자까지, 모든 것이 석중의 목을 조르고 있었다. 석중은 어지럽게 세워진 차들 속에서 노인이 말한 벤츠를 찾았다. 그리고 트렁크를 열었다. 안에는 불에 그을려 눌러붙은 소가죽 가방이 하나 들어 있었는데, 안에는 지폐 다발이 가득했다. 족히 일억은 돼 보였다. 하지만 절반은 불에 타 쓸모가 없어진 상태였다. 벤츠키를 넘기며 노인이 했던 말을 상기했다. 노인이 이것이 혼자서 밑으로 내려갔을 때 갖고 온 돈가방이라 했다. 용광로처럼 뜨거워진 지하층에서 불씨를 맞고 타 버린 거라고 덧붙였다. 석중은 괴로웠다. 노인이 말이 부디 사실이길 바랐다. 좀 전부터 끈질기게 진동하는 휴대폰을 꺼내 발신자를 확인했다. 사채업자 편대표였다. 석중은 콘크리트 벽을 쳐다보다가 휴대폰 전원을 꺼버렸다. 그리고 왔던 길을 다시 돌아 내려갔다. 


땀으로 범벅이 된 석중을 노인이 올려다보고 있었다. 불에 탄 지폐 다발을 본 석중은 이전보다 노인을 더 신뢰하고 있었다. 하지만 완전히 믿게 된 것은 아니었다. 석중은 노인이 왜 그토록 지옥에 가고싶어 하는지 물었다. 죄책감 때문이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자신이 지은 죗값을 마누라와 자식들이 지상에서 받고 있노라 말했다. 지하 101층의 문을 통과하고 자신의 존재가 완전히 사라져야 가족들이 불행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했다. 그들의 기억 속에서 자신의 존재가 영원히 사라진대도  괜찮다 했다. 석중이 노인의 얼굴을 쳐다봤다. 회한이 서려있는 눈빛이었다. 처음으로 노인에게 마음이 동하고 있었다. 석중은 기도하는 자세로 사망한 중을 가리키며, 저 사람도 여기 들어온 목적이 같느냐고 물었다. 노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노인은 중이 살아있을 때, 그의 등에 업혀 지하 68층까지 내려갔다가 뜨거운 열기와 끔찍한 섬망 때문에 발길을 돌려야 했던 그날을 떠올리고 있었다. 법복이 불에 타고 온 몸에 화상을 입은 중이 노인을 업고 필사적으로 오르막을 뛰어 올랐다. 두 사람 다 밑에서 뭘 봤는지 커다랗게 뜬 동공은 충격과 공포에 휩싸여 있었다. 석중이 지금 서 있는 지하 22층으로 다시 올라온 중은 그날부터 기도를 드렸고 백일 만에 응답을 받아냈다. 하지만 진기가 모두 소진된 중은 결국 숨졌고, 다행히도 그가 받아낸 응답은 종이에 남았다. 노인은 그것을 석중에게 보여줬다. 문장이 적혀 있었다. 


                                    "아미타 부처께서 귀인을 낙뢰에 태워 보내시어 

                                 죄인을 인도하리니 업장과 죄업은 모두 소멸 되리라."


노인은 이 문장에서 ’귀인‘과 ’낙뢰‘라는 단어에 주목하고 있었다. 낙뢰는 번개를 뜻했고, 이는 석중이 몰고 내려온 전기차 번호판에 그려진 마크와 같았다. 결국 귀인은 석중이고 낙뢰는 전기차였던 셈... 노인이 굳이 석중의 차를 타고 내려가야 한다고 고집했던 이유가 밝혀지는 순간이었다. 노인은 중이 남긴 예언을 철썩같이 믿고 있었다. 이번이 다신 오지 않을 기회라며 자신을 지옥문 앞까지만 무사히 데려다만준다면 반드시 돈이 있는 곳을 알려주겠노라 힘주어 말했다. 이때, 쾅! 소리와 함께 지금까지 들어본 것 중 가장 큰 폭음과 진동이 찾아들었다. 놈들이 폭약을 터트린 것이었다. 노인의 표정도 전과 달랐다. 다급한 얼굴이었다. 


두 사람은 다 황급히 차에 올랐다. 배터리 충전량은 5퍼센트 남짓이었지만 출발해야했다. 노인은 생수병 일곱 개를 2열 시트에 내던지고 조수석 벨트를 조였다. 석중의 차가 급출발하며 콘센트에 연결된 충전라인이 탁- 끊어지듯 분리됐다. 석중이 핸들을 거칠게 틀자, 두 사람의 몸이 반대편으로 일제히 쏠렸다. 노인은 비장한 목소리로, 멈추지 말고 단숨에 내려가야 한다고 말했다. 석중의 차가 빠르게 주차 공간을 가로질러 나선통로로 진입했다. 바닥에 굴러 떨어진 생수병들이 덜컹이며 튀어 올랐다. 노인은 생수병을 따서 들이키더니 석중에게 건넸다. 석중이 건네받아 입에 물었다. 목젖을 꿀럭이며 한번에 다 마셨다. 내리막을 다 내려와 코너를 돌자 지하 32층이 나왔다. 차창에 뿌연 성에가 끼기 시작했다. 외부 온도는 벌써 51도까지 올라가고 있었다. 석중은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전방을 바라봤다. 에어컨이  가동됐다. 배터리는 벌써 4퍼센트로 떨어졌다. 석중의 얼굴에 긴장과 불안이 스쳤다. 노인이 말했다. 이제 시작됐다고.



                                                                    3장. 열화 (熱火)


차를 몰고 내려가는 석중에게 또다시 어린 시절의 단상이 떠오르고 있었다. 과거의 악몽과 같았던 순간들의 현현. 노인이 말한 섬망이었다. 


방과후 초등학교 운동장 놀이터에서 머리를 곱게 묶은 한 여자 아이가 무릎에 책을 올려놓고 보고 있었다. 좌우로 또래 여자 아이 두 명이 함께 앉아 있었다. 이들이 보는 책은 ’월리를 찾아서’ 일러스트북이었다. 펼쳐진 페이지에는 스키장을 빼곡이 메운 인파가 그려져 있었다. 세 여자 아이는 머리를 맞대고 그림 속에 숨겨진 월리를 찾느라 고심하고 있었다. 이때, 머리를 곱게 묶은 여자 아이가 어딘가를 손가락으로 짚으며 외쳤다. 찾았다! 아이의 손가락으로 머리를 모은 두 여자애는 신이났다. 스키장 인파 속에 숨은 월리가 보이자 박수를 치며 기뻐했다. 이때, 머리 위에서 남자애 목소리가 들렸다. 올려다보면, 초등학생이 된 어린 석중이 미끄럼틀을 타고 내려와 다가왔다. 어린 석중은 왼쪽 눈에 안대를 차고 있었다. 석중은 여자 아이에게 책을 같이 보자고 하지만 거절 당했다. 여자 아이의 태도는 단호했다. 양 옆의 여자 아이들은 석중이 보육원에서 산다는 사실을 부모님에게 들어 알고 있다며, 석중을 자극했다. 심술이 난 석중은 안대를 풀어 자신의 왼쪽 눈을 드러냈다. 회색 동공은 움직이지 않았다. 여자애들은 기겁하며 물러섰고 결국 울음을 터트렸다. 어린 석중은 독한 표정을 지으며 여자애의 손에서 책을 낚아채 도망쳤다. 등 뒤에서 들려오는 울음소리는 더 커졌지만 돌아보지 않고 뛰었다. 뒷산으로 올라간 석중은 일러스트북의 모든 페이지에서 윌리를 찾아내 칼로 도려내고 있었다. 어린 석중의 표정에는 벌써부터 세상을 향한 원망과 증오가 차오르고 있었다. 


석중의 차는 어느덧 지하 41층을 지나고 있었다. 에어컨은 풀가동됐고, 외부 온도는 64도에 육박했다. 벽과 천정의 시멘트 균열 틈새로 시뻘겋게 달궈진 열선이 드러났다. 촘촘히 얽힌 난방 배관을 보는 듯 했다. 석중은 두리번 거리며 혼잣말했다. 대체 여기를 누가 만들었는지... 노인은 아마도 신이겠지, 라고 냉소적으로 답했다. 


전방에 먼지 쌓인 차량 한 대가 보였다. 지나치면서 본 운전석은 도어가 활짝 열려 있었고 역시나 사람은 없었다. 노인은 차주에 대해 말했다. 일년 전에 이곳에 들어온 박정화라는 술집 마담이었다고. 자신이 그렇게 말렸음에도 술에 취해 차를 몰고 내려갔고 결국 섬망에 홀려 걸어 내려간 것 같다고 혀를 찼다. 차 내부는 건조된 수건처럼 바싹 말라 있었다. 노인은 땀을 닦다가 열기를 참지 못하고 패딩지퍼를 내렸다. 뼈와 거죽만 남은 쇄골과 갈비뼈가 드러났다. 가슴과 배에는 오래 전 입은 상처로 짐작되는 기다란 흉터가 가로 질렀고, 허리춤에는 어디서 구했는지 묵직하고 기다란 드라이버가 호신용 무기처럼 꽂혀 있었다. 그 모습을 힐끔 본 석중이 물었다. 대체 무슨 죄를 지었느냐고. 노인은 자신이 지은 죄목을 하나씩 나열했다. 가난하게 태어난 죄. 있는 놈한테 머리 쳐든 죄. 착한 마누라 데려다가 억척떼기 만든 죄. 자식들 입에 흙수저 물려준 죄. 석중은 듣기 싫다며 그만하라고 소리 질렀다. 독한 표정을 지으며 거칠게 코너링 했다. 석중은 혼잣말하듯 내뱉었다. 시발, 우리가 뭘 그렇게 잘못했어. 노인은 그런 석중을 힐끔 쳐다봤다. 


차는 이제 지하 51층을 지나고 있었다. 차안 모니터에 표시된 외부 온도는 77도. 붉게 달궈진 벽에서 바스라진 시멘트 조각들이 떨어졌다. 버려진 차들이 하나 둘 보이기 시작했다. 엄청난 속도로 벽과 충돌해 걸레 조각이 된 차도 있었다. 사람은 여전히 단 한 명도 없었다. 석중은 충격에 휩싸여 계속 차를 몰았다. 천정에서는 연속적인 폭음과 함께 돌조각들이 떨어졌다. 와이퍼가 이것들을 바쁘게 밀어냈다. 배터리는 이제 3퍼센트 남아 있었다. 석중이 악셀을 밟자 차가 빠르게 튀어 나갔다. 스키드마크를 그리며 나선통로를 내려갔다.   


지하 61층에 이르렀다. 석중과 노인은 팬티만 걸친 채 옷을 다 벗은 상태였다. 에어컨은 이미 최대치지만 땀이 비오듯 흘러 내렸다. 와이퍼가 밀어내고 또 밀어내도 흙먼지와 돌조각들이 계속 시야를 방해했다. 배관 뿐 아니라 벽과 천정 전체가 용광로처럼 시벌겋게 달궈지고, 틈에서 불길이 뿜어져 나왔다. 이곳이 지옥으로 가는 통로라던 노인의 말이 실감되기 시작했다. 옆으로 빈 승합차 한 대가 스쳐 지났다. 사이드 도어에는 <각종 명품 최고가 매입>이라는 문구가 박혀 있었다. 석중이 노인에게 물었다. 좀 아까 자신에게 보여준 금부치들이 저기서 꺼내온 것이냐고. 노인은 대답 대신에 머리를 차창에 쿵- 박았다. 석중이 놀라서 돌아보면, 노인은 고개를 푹 숙인 채로 머리를 계속 박아댔다. 쿵! 쿵! 섬망에 빠진 상태였다. 노인은 길잡이다. 이래선 안 됐다. 머리 박는 강도는 점점 더 거세졌다. 석중은 노인의 어깨를 잡고 흔들지만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연이은 박치기에 노인의 이마가 깨지고 피가 흘렀다. 노인의 입은 쉼없이 뭔가를 중얼댔다.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아내와 자식들의 이름을 차례로 불렀다. 갑자기 조수석 문을 벌컥 열고 뛰어내리려 들었다. 기겁한 석중이 손을 뻗어 문을 다시 닫았다. 열린 문틈 사이로 살을 녹일 듯한 열기가 파고 들었다. 폐가 다 타들어가는 느낌이었다. 노인은 핸들에 매달렸다. 차는 중심을 잃고 비틀대다가 벽과 부딪히며 불꽃을 일으켰다. 날카로운 쇳소리가 고막을 파고 들었다. 석중은 어찌할 수 없이 노인을 있는 힘껏 걷어찼다. 노인은 조수석으로 처박히더니 허리춤에 꽂아둔 드라이버를 꺼내 양손으로 움켜쥐었다. 그리고 시트를 찍어댔다. 노인은 시트가 마치 자신을 불행으로 몰아넣은 빌런이라도 되는 양 쑤셔댔다. 자신이 지옥에 떨어진다해도 너를 절대 가만두지 않겠다는 저주섞인 말과 함께. 시트 커버가 갈라지고 단열재가 튀어 올랐다. 석중은 노인의 광기에 말을 잃었다. 이때 차량 전방으로 검은 돌조각들이 엄청난 속도로 다가와 부딪혔다. 까마귀떼였다. 석중의 표정은 경악과 충격 그리고 공포로 뒤덮였다. 차를 향해 육탄돌격하는 까마귀떼는 수백 마리에 달했다. 끝도 없이 날아들며 차량 전체를 에워쌌다. 시뻘건 눈에 불길한 울음소리를 내며 차체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차 안에서는 노인의 광기가, 밖에서는 까마귀떼의 습격으로 석중의 정신은 혼미해져 갔다. 부디 섬망이 어서 지나가길 바랐다. 정신을 차려보고자, 볼을 사정없이 후려치고 생수통을 집어 머리 위로 쏟아 부었다. 그럼에도 상황은 나아지지 않고, 연이은 까마귀떼의 충돌로 차창 전면은 금이 가기 시작했다. 날개에 불이 붙으면서 까마귀떼는 불덩이처럼 차 내부로 날아들었다. 시트 바닥을 쑤셔대던 노인의 손바닥이 찢어져 피가 흘러 내렸다. 그럼에도 멈추지 않았다. 석중은 제발... 제발 좀 정신 차리라 며 외쳐댔고, 죽기 살기로 풀악셀을 밟았다. 속도계는 시속 백 킬로미터를 단숨에 넘어섰다. 쩍!! 소리와 함께 차창이 박살 나며 틈새로 불까마귀들이 파고들었다. 석중의 얼굴을 발톱으로 거머쥔 까마귀들이 온전한 오른쪽 눈 마저도 파냈다. 으아악!! 석중은 절규를 토하며 몸부림 쳤다. 노인은 이미 까마귀떼에게 뒤덮여 두 눈을 다 파먹힌 상태였다. 석중은 피로 범벅 된 얼굴을 부여잡고 울부짖었다. 처참하기 이를 데 없었다. 석중의 입에서 난생 처음으로 잘못했다 살려 달라는 말이 터져 나왔다. 차는 용광로처럼 들끓는 통로를 밑도 끝도 없이 내려가고 있었다.   


의식을 잃은 석중은 꿈속을 헤매고 있었다. 4년 전, 목숨보다 소중한 딸을 잃어버린 그날이었다. 대형마트에 온 석중은 카트에 어린 딸 채린이를 태우고 장을 보고 있었다. 마트는 특별할인 행사가 있는 날로 엄청난 인파로 가득했다. 카트에 앉은 채린은 뽀로로 인형을 품에 안고 태블릿으로 애니메이션을 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석중은 카트를 밀며 누군가와 통화 중이었다. 석중보다 한참 어린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내가 아니었다. 두 사람의 통화 무드는 영락없는 내연관계였는데 사실 석중은 여자를 꼬드겨 자신이 추천한 부동산 매물을 팔아넘기려는 계획이 서 있었다. 석중은 망설이는 여자를 설득하느라 진땀을 빼다가 문득 유제품 코너에서 뭔가를 포착했다. 석중이 집어든 플라스틱 우유 용기에는 유통기한이 찍혀 있었는데, 연도를 제외한 월일이 딸 채린이의 생일과 같았다. 석중이 호들갑을 떨며 놀라자 내연녀는 딸바보라며 놀려댔다. 상관 없었다. 석중에게 딸 채린이는 밖으로 꺼내놓은 자신의 심장과 같은 존재였다. 내연녀는 석중에게 사오라고 시킨 물건들 하나도 빠트리면 안 된다고 말하며 전화를 끊었다. 석중은 이 인파를 통과해 물건을 구매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결국 채린이에게 잠시만 여기 있으라 말한 뒤 카트를 뒤로 하고 크리넥스와 세탁 세제가 진열된 코너로 걸음을 옮겼다. 어렵사리 골라낸 물건들을 품에 안고 카트로 돌아온 석중은 순간 충격에 휩싸인다. 카트가 보이지 않았다. 채린이도 함께 사라져 버렸다. 주변을 둘러보지만 어디에도 안 보였다. 석중은 실성한 사람처럼 마트를 뛰어 다녔다. 온 몸은 땀으로 젖어들었다. 사람은 너무도 많은데 채린이만 안 보였다. 목청이 터지도록 절규하듯 딸의 이름을 불렀다. 주변 사람들이 얼굴을 찡그리고 귀를 막으며 석중을 쳐다봤다. 멀리 떨어져 있던 사람들의 시선까지 주목될 정도로 석중의 절규는 컸다. 넋 나간 얼굴로 빼곡한 인파 속에 선 석중은 마치 숨겨진 월리처럼 보였다. 


(현재) 석중의 눈이 번쩍 뜨였다. 차는 지하 78층을 달리고 있었다. 석중의 눈은 온전했다. 까마귀떼들도 보이지 않았다. 박살이 난 차장도 멀쩡했다. 하지만 용광로 같이 들끓는 외부온도는 그대로였다. 노인이 조수석에서 석중을 향해 정신 차리라며 소리를 내지르고 있었다. 섬망에 빠진 것은 노인이 아니라 석중 자신이었다. 노인은 석중이 놓친 핸들을 대신 움켜쥐고 고함을 질러댔다. 정신이 돌아온 석중이 재빨리 핸들을 움켜쥐고 방향을 틀었다. 동시에 엄청난 폭음이 들리고 흙먼지가 차창으로 쏟아져 내렸다. 천정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뿌연 먼지로 시야가 가로막혀 한치 앞도 볼 수 없는 상황이 도래한다. 노인은 와이퍼! 와이퍼! 와이퍼! 라고 외쳤지만 차량은 전방의 무엇과 세찬 충돌을 일으키고야 말았다. 에어백이 부풀어 올랐다. 석중과 노인은 에어백에 얼굴을 처박았다. 외부온도는 백 이십도를 넘어선 상황. 차량 배터리는 0 퍼센트에서 깜박이다가 완전히 꺼져버렸다. 적막... 흙먼지로 온통 뒤덮인 차창 전면에 붉은 동그라미 두개가 보였다. 섬망에 나타난 까마귀의 시뻘건 눈보다 족히 백배는 큰 크기였다. 석중과 노인은 둘 다 의식을 잃었다. 거대한 빨간 눈만이 두 사람을 노려보고 있었다.  


(과거) 어둠이 내려온 사찰. 대웅전에 모셔진 거대한 불상 앞에 머리와 수염이 덥수룩히 자라난 석중이 배를 올리고 있었다. 등과 허리는 축축히 젖었고 다리는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떨렸다. 허리를 구부리고 양 무릎과 이마를 바닥에 댔다. 합장한 손과 어깨가 흔들렸다. 석중은 더 이상 일어나지 못했다. 서러운 눈물이 방석을 적셨다. 등 뒤에서 낮고 차분한 음성이 들렸다. 시간이 늦었으니 하룻밤 묵고 떠나라는 스님의 음성이었다.  


선방에서 스님과 마주앉은 석중은 격앙된 목소리로 하소연 했다. 자신의 딸을 찾을 수만 있다면 만배가 아니라 십만배 아니 백만배도 올릴 수 있다고 말했다. 아니면 금강경을 만번 읽으면 되는지 그것도 아니라면 전 재산을 팔아서 부처님 앞에 공양을 올리면 되는지 물었다. 스님은 석중이 가장 듣기 싫어하는 그 말을 또 반복했다. 모든 것은 전생에 지은 죄업 때문에 생겨난 일들이라는 그 얘기. 지극정성으로 참선하고 배를 올리라는 그 얘기. 수행이 석중을 극락세계로 이끌 것이고 그때 이생에서 헤어진 인연들과 해후하게 될 테니 그때 만나라는 그 얘기. 석중은 이를 악물고 사찰문을 나섰다. 한쪽으로 기운 어깨에는 딸을 찾는 전단지가 담긴 큼지막한 가방이 메어져 있었다. 독기 서린 얼굴로 석중은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반드시 딸을 찾아내겠다고. 그리고 딸을 데려간 그 놈에게 자신이 받은 고통의 백배를 되갚아 줄 거라고. 자신이 지옥불에 떨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반드시 그리하겠노라고. 석중의 움직이지 않는 왼쪽 동공이 무섭게 번뜩이고 있었다.  


(현재) 지하 78층. 석중은 전원이 완전히 꺼져버린 차에서 눈을 떴다. 전방을 보면 와이퍼가 좌우로 삐걱대며 시야를 트고 있었다. 거대한 크기의 까마귀 눈으로 추정됐던 빨간색 원은 또다른 차량의 후미등이었다. 석중의 차가 앞차의 꽁무니를 들이받은 상황이었다. 앞차는 내려오면서 본 많은 차들과 달리 시동이 걸려 있었다. 하지만 사람은 없었다. 2열 시트에서 노인의 음성이 들려왔다. 노인은 어느새 뒷좌석으로 자리를 옮긴 상태로, 앞차를 바라보면서 방금 전까지 누군가 타고 있던게 분명하다고 말했다. 석중이 고개를 돌려 노인을 봤다. 노인은 이 열기 속에서도 두터운 패딩을 꿋꿋이 걸치고 생수를 벌컥벌컥 들이키고 있었다. 바닥에는 노인이 다 마셔버린 생수병들이 널부러져 있었다. 석중은 노인의 분위기가 전과 달라진 것을 감지했다. 노인의 손이 운전석과 조수석 사이로 뻗어나가 앞차 번호판을 가리켰다. 파란색이었다. 전기차를 뜻하는 낙뢰 기호도 박혀 있었다. 노인은 달뜬 목소리로 중이 해준 예언이 맞아떨어진 게 분명하다며 호들갑이었다. 더 내려가려면 차를 갈아타야 한다고 말했다. 석중은 차에서 내리려는 노인을 붙잡았다. 돈 있는 곳이 어딘지 이제 말하라고 물었다. 더 기달리 수 없다고. 노인은 다 된 밥에 초지지 말라며 뿌리쳤다. 석중이 단호히 막자 노인은 더 내려가야 하는 이유를 말하기 시작했다. 자신이 말한 수백 억의 돈은 현금 수송 트럭에 실려 있었고, 위치는 지하 63층이었다. 하지만 조금 전 내려올 때 확인한 바로는 트럭이 보이지 않았다. 지난 3년 여기 머무는 동안 현금 수송 트럭이 위로 올라온 것을 본 적은 없다. 그럼 어디로 갔겠나. 당연히 더 밑으로 갔을 것이다. 생각해 봐라. 돈이 실린 트럭을 몰고 지옥문을 나가려는 놈이 있을까? 아니다. 트럭을 몰고 내려간 놈은 그냥 타고갈 차가 필요했던 걸 거다. 다시 말해, 밑으로 내려가다보면 어딘가 그 트럭이 세워져 있을 거라는 얘기. 석중은 집어치우라며 윽박질렀다. 이제 안 속는다며 감추고 있는 걸 말하라며 몰아세웠다. 노인은 석중의 성난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 내밀었다. 표정은 안타까움으로 가득했다. 꺼낸 것은 반으로 접힌 종이였다. 죽은 중이 기도 끝에 응답을 받아내 적었다는 그 종이. 귀인이 낙뢰를 타고 내려와 죄인을 인도한다는 문장이 적힌 그 종이. 하지만 접힌 부분을 펼치자 문장은 더 이어졌다.  


                                        "귀인은 죄인에게 쓰이고 죄인은 귀인을 타고 넘는다. 

                                                        이는 전생의 인과율에 따름이다."  


석중이 노인을 봤다. 속았다... 노인은 진심어린 눈빛으로 사과했다. ”미안하네. 정말 미안해. 헌데 방법이 이것 밖에는 없는 것 같네.“ 순간, 노인의 이마가 석중의 콧잔등을 가격했다. 으악! 얼굴을 부여잡고 석중이 비명을 내질렀다. 틈을 탄 노인이 뒷좌석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열린 문틈 사이로 뜨거운 열기가 파고 들었다. 석중은 피가 터진 코를 부여잡고 밖을 내다봤다. 노인은 자신의 두 다리로 앞차 운전석까지 뛰어 들었다. 모든 게 노인의 속임수였다는 사실을 깨닫지만 이미 늦은 상황. 노인은 운전석 문을 닫고 몇 미터 전진하는가 싶더니 빠르게 후진해 석중의 차를 들이받았다. 쿵! 한번 더 쿵! 쿵! 거센 충격으로 석중의 몸이 앞뒤로 휘청였다. 충돌로 차체가 찌그러지며 석중의 차는 문이 열리지 않았다. 노인의 차가 급격히 커브를 틀어 내리막 통로로 사라졌다. 석중은 피 흐르는 얼굴을 부여잡고 핸들을 주먹으로 내리쳤다. 빠앙-! 하는 소리가 텅 빈 주차장에 메아리쳤다. 


(시간경과) 석중은 점점 탈진상태에 이르고 갔다. 마른 입술이 바싹 타들어가고 숨을 몰아쉴 때마다 쇳소리가 났다. 석중은 빈 생수병을 기울여 입가에 갖다댔다. 또르르- 한 방울이 흘러내리다가 증발해 버렸다. 석중은 생수병을 떨구고 바닥을 더듬어 다른 페트병들을 찾았다. 혹시 남아있을지 모를 작은 물방울이라도 찾기 위해서였다. 이 과정에서 노인이 떨어뜨리고 간 드라이버가 만져졌다. 석중은 목받이에 고개를 젖혔다. 그리고 드라이버를 움켜쥐고 자신의 턱 밑을 겨눴다. 도무지 찌를 엄두가 나지 않았다. 한참을 그러고 있다가 헛웃음을 터트리며 드라이버를 바닥에 떨궜다. 죽을 용기도 없다는 사실에 자괴감이 들었다. 눈을 감자, 악몽같던 과거가 또다시 스쳐갔다.  


신원불명의 여자 아이 시체가 발견된 날이었다. 하지만 부패가 너무도 심해 도저히 얼굴을 알아볼 수 없는 상태였다. 그런 시신을 석중은 굳이 자신의 눈으로 직접 확인하겠다며 우긴 상태였다. 물에 퉁퉁 붓고 두 눈이 썩어들어간 시체가 안치실 평대에 눕혀져 있었다. 살아있을 때는 누구보다 귀엽고 사랑스러웠을 얼굴이었겠지만 지금은 끔찍하기 이를 데 없는 몰골로 썩어 있었다. 석중은 딸애가 맞는지 내려다봤다. 표정은 고목처럼 단단했지만 손끝은 사시나무 떨리듯 떨리고 있었다. 동석한 형사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봤다. 석중은 딸이 아니라고 침착하게 말했다. 형사는 직원에게 눈짓했고 시신의 얼굴은 천으로 덮혔다. 석중은 밖으로 나가려다 비틀댔다. 주저앉더니 마른 구역질을 했다. 형사가 다가가 부축하려들자, 손을 뻗으며 괜찮다고 말하며 혼자서 일어섰다. 안치실 문을 열고 나간 석중 앞에는 아내 명선이 멀찍이 서 있었다. 명선은 입을 다문 석중의 표정을 읽으려 애썼다. 석중이 고개를 좌우로 내젓자 명선은 그 자리에서 의식을 잃고 실신했다. 직원과 형사들이 달려왔다.  


(현재) 지하 78층은 뜨거운 사막처럼 아지랑이를 피어올리고 있었다. 차 안에 고립된 석중은 휴대폰 전원을 켰다. 밝고 희망찬 사운드가 들리며 액정에 불이 들어왔다. 카메라를 켰다. 자신의 얼굴을 비췄다. 곧 죽는다해도 조금도 이상할 것 없는 얼굴이 화면에 가득 찼다. 떨리는 손으로 녹화 버튼을 눌렀다. 석중이 아내 명선에게 유언을 남기기 시작했다.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그동안 자신이 저지른 과오들을 고백했다. 채린이를 잃어버린 그날 내연녀와 통화하느라 정신이 팔려 있었다는 말까지 전부. 자신은 지옥에 떨어질 것이니 절대 용서하지 말라는 말도 같이 남겼다. 석중은 꺼이꺼이 울기 시작했다. 


같은 시각, 지하 주차장 19층에 지게차 한 대가 육중한 소음을 내며 내려오고 있었다. 차체에는 ‘핀셋 대리운전‘로고가 박혀 있었고, 운전석에는 포니테일 스타일로 긴 생머리를 묶은 여자가 파란색 유니폼 차림으로 앉아 있었다. 양 무릎 사이에는 샷건이 세워져 있고, 조수석에는 두툼한 탄알집이 세워져 있었다. 지게차는 이제 막 지하 20층으로 진입했다. 여자의 시선은 내리막 어둠을 응시하고 있었다. 


석중은 휴대폰 화면을 바라보다가 결국 오열하며 휴대폰을 바닥에 떨궜다. 그리고 양손에 얼굴을 파뭍고 세상 서럽게 흐느꼈다. 정말로 죽을 때가 됐는지 지난 세월이 주마등처럼 빠르게 영화 필름처럼 스쳐 지났다. 


늦은 밤, 보육원을 뒤로 하고 필사적으로 도망치던 날. 천신만고 끝에 서울역에 도착해 엄청난 인파와 화려한 빌딩숲을 마주한 날. 아파트 단지 분리수거함을 뒤지며 먹을 것을 찾던 날. 잘 차려입은 부모님의 손을 붙잡고 아파트 현관으로 들어서는 또래 아이와 눈 마주친 날. 도륙된 돼지의 발골 작업으로 어른들 틈에 끼어 밤을 지새우던 날. 건설현장에서 공사자재를 짊어지고 건물 옥상까지 올라간 날. 발 아래로 펼쳐진 아파트와 오피스 빌딩들을 내려다보던 날. 편의점 심야 알바를 하며 공인중개사 문제집을 풀던 날. 맨발에 슬리퍼를 끌고 담배를 사러온 지금의 아내 명선을 처음 본 날. 명선의 손목에서 수많은 자해 흔적들을 발견한 날. 좁아터진 고시원 방에서 공인중개사 합격 통보를 받은 날. 허름한 방바닥에서 명선과 껴안고 진한 키스를 나누던 날. 양가 부모란은 모두 비어있고 신랑 방석중, 신부 조명선이란 이름만 적힌 배너가 예식장 앞에 세워지던 날. 딸 채린이가 태어나던 날. 채린이의 방 책장에 ’월리를 찾아서’ 일러스트북 전집이 꽂히던 날. 석중와 명선 사이에서 손그네를 타며 채린이와 새아파트로 들어가던 날. 이때, 갑자기 어디선가 똑똑똑- 소리가 들리더니 주마등처럼 스치던 기억들이 멈췄다. 


(현재) 석중이 실눈을 뜨고 소리가 난 곳을 보면, 편대표가 땀이 맺힌 얼굴로 뿌얘진 차창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머리와 어깨 그리고 옷 곳곳에 허연 먼지가 내려앉아 있었다. 용광로처럼 뜨겁던 지하 78층의 열기는 거짓말처럼 식어 있었다. 편대표는 석중과 시선을 마주하자 왼쪽 눈을 찡긋 감았다 떴다. 과거 호텔방에서 처음 본 날 그랬던 것처럼. 편대표 등 뒤에는 일곱 명의 수하들이 묵직하고 날이 선 연장을 손에 들고 서 있었다. 석중에게 공포가 엄습했지만 움직일 여력이 없었다. 편대표는 손나팔을 만들어 석중을 향해 외쳤다. 뭐 이렇게 네비에도 안 나오는 데까지 숨었느냐고. 뚫고 들어오느라 한참을 애먹었다고. 이어 수하들에게 어서 꺼내드리지 않고 뭐하고 섰느냐고 외쳤다. 석중은 차라리 눈을 감았다. 차체가 흔들리고 박살나는 소리가 들려왔다. 차라리 섬망이 찾아와 줬으면하고 바랐다. 하지만 이 또한 원하는 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얼굴에 유리파편이 튀자 석중이 눈을 떴다. 차 천정에 올라탄 놈이 오함마로 선루프를 내려치고 있었다. 쩍- 유리가 박살 났다. 석중의 얼굴은 절망으로 일그러졌다. 조수석 문이 떨어져 나갔다. 편대표가 들어와 앉았다. 석중은 도살처분을 기다리는 소처럼 음울한 눈으로 편대표를 쳐다봤다. 편대표는 담배를 권했다. 석중은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아내는 건드리지 말아달라고 애원했다. 편대표는 비열한 미소를 걸더니 나긋하게 속삭였다. 석중이 여기에 있다는 사실을 누가 알려줬는지 궁금하지 않느냐고. 석중은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여기가 어딥니까, 라고 물었다. 그러자 편대표는 대답 대신에 미소를 지어 보이고, 여기서 나가는 대로 석중의 장기를 털어 빚진 돈을 받아낼 거라고 말했다. 편대표는 궁지에 몰린 쥐를 놀리는 고양이처럼 이 상황을 즐겼다. 탕! 어디선가 총성이 울렸다. 편대표가 놀라 고개를 돌렸다. 오함마를 내리치던 수하가 피를 뿜으며 본네트 위로 고꾸라졌다. 머리통에 커다란 총구멍이 나 있었다. 모두의 시선이 총탄이 날아든 곳으로 쏠렸다. 멀리 내리막 통로 초입에 지게차가 세워져 있고, 그 앞에 선 이십대 여자가 샷건을 겨누고 있었다. 석중이 휴대폰에 유언을 남기던 그 시각, 지게차를 몰고 내려오던 그 여자였다. 여자의 얼굴은 밝고 강건해 보였다. 누가봐도 우리편이고 착한편의 얼굴이었다.  


편대표는 차에서 내리더니 눈을 찡그리고 여자를 봤다. 여자의 총구가 편대표를 향하자 수하들이 스크럼을 짰다. 편대표는 여자를 잡아서 발 앞에 꿇어 앉히라고 지시했다. 수하들은 연장을 세우고 전투 태세에 돌입했다. 여자의 총구가 좌우로 이동하며 수하들을 겨눴다. 긴장한 수하들은 사정권에서 벗어나고자 좌우로 이동했다. 한심하게 지켜보던 편대표가 빨리 잡아오라고 소리 질렀다. 수하들은 일제히 여자를 향해 달렸다. 샷건이 불을 뿜기 시작했다. 탕! 타앙! 탕! 총탄에 떠밀리 수하들이 하나 둘 나가떨어졌다. 석중은 어안이 벙벙해진 얼굴로 이 광경을 바라봤다. 여자는 능숙한 손놀림으로 장탄과 격발을 반복하며 건장한 남자들을 작살냈다.  잘려진 팔과 다리가 허공을 날고 피는 분수처럼 솟구쳤다. 여자는 이미 죽은 자의 얼굴에도 거침없이 총탄을 박아넣었다. 여자가 보여준 잔혹함 때문에 선과 악이 순식간에 뒤바뀌고 있는 것 같았다. 석중은 힘겹게 눈을 감았다가 떴다. 여러 번 반복해봐도 지금 눈 앞의 상황은 리얼이었다. 여자의 총구는 이제 홀로 남은 편대표를 겨눴다. 겁에 질린 편대표는 석중의 차 조수석으로 황급히 올랐다. 동시에 총탄이 날아들어 관자놀이에 박혔다. 피를 뿜으며 석중의 양 허벅지 위로 엎어져 절명하는 편대표. 석중은 식겁했다. 하지만 움직일 힘도 남아있지 않았다. 여자는 연기가 피어오르는 총구를 내리고 손등으로 얼굴의 피를 문질렀다. 그리고 다가왔다. 석중은 드라이버를 움켜쥐었다. 여자는 조수석 창문 안을 들여다봤다. 가까이에서 본 여자의 피부는 창백하리만치 하얳다. 그 위에 튄 시뻘건 핏방울이 액션 페인팅 예술 작품처럼 보였다. 여자는 상냥한 표정으로 물었다. 방석중 선생님 맞으시냐고. 석중이 경계를 늦추지 앉자 여자는 품 속에서 태블릿을 꺼내더니 사진과 얼굴을 대조했다. 동일인이라는 사실이 확인되자, 목에 걸린 명찰을 꺼내 내밀며 힘찬 목소리로 외쳤다. 자신은 핀셋에서 나왔고 이름은 김선이라고. 명찰에는 ‘핀셋‘ 로고와 함께 긴급 현장출동 7팀 ’김선’이라고 적혀 있었다. 석중이 물었다. 여기가 지옥이냐고. 김선이 웃으며 말했다. ”아니요, 지옥이 아니고 연옥입니다. 선생님.“ 



                                                                 4장. 멸화 (滅火) 


석중의 전기차를 들어올린 김선의 지게차가 구동 중이었다. 김선이 운행했다. 폐차 직전의 차 안에 기대누운 석중은 시트를 완전히 뒤로 젖히고 링겔을 맞고 있었다. 링겔병에는 핀셋 고로가 박혀 있었고, 몸을 덮은 담요에도 같은 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링겔에 대체 무슨 성분이 섞여 있는 것인지 석중의 혈색은 금새 되돌아왔다. 하지만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지 석중은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시선을 창밖으로 돌려 바깥을 바라보는 것 뿐이었다. 


지게차는 육중한 엔진음을 내며 지하 83층을 지나고 있었다. 더 많은 차들이 주차구역에 세워져 있었다. 열기 때문에 타이어 바퀴가 터지고 녹아 흘러내려 굳어 있었다. 으스러진 시멘트 조각들이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전소되고 재만 남은 거대한 화로 속을 통과하는 것 같았다. 연옥이라니... 들어본 것도 같고... 헌데 갑자기 왜 용광로 같던 열기가 식은 것일까. 모든 게 궁금했지만 이 또한 알 길이 없었다.  


지게차는 어느새 지하 87층에 진입했다. 차들의 숫자는 점점 더 많아지고 있었다. 경차, 고급차, 수입차 경계없이 뒤섞여 있었다. 심지어 경찰차와 구급차까지 보였다. 하지만 사람은 여전히 단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순간, 석중의 시선이 차들 너머 어딘가에 꽂혔다. 트럭이 한 대 세워져 있었는데... 현금수송 차량이었다. 석중은 직감적으로 느꼈다. 노인이 말한 바로 그 트럭이라는 사실을. 석중의 눈은 멀어지는 트럭을 계속 쫒았다. 트럭과 체결된 컨테이너는 도어가 반쯤 열려 있었는데, 내부에 뭐가 들었는지는 확인이 안됐다. 거리는 점점 더 벌어지고 결국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석중은 벽에 적힌 층수를 봤다. 지하 87층이었다. 시트에 뭍은 편대표의 피로 운전석 팔걸이에 온 힘을 다해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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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중은 긴 숨을 토하며 떨리는 심장을 진정시켰다. 김선은 석중의 이런 상태를 인지하지 못한 채 운전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지게차는 지하 95층까지 내려와 멈췄다. 대각선 멀리 철문이 보였다. ‘방제실’이라고 써붙어 있었다. 문은 반쯤 열려있고 내부 조명은 꺼진 상태였다. 바닥에는 방제실 내부에서 시작된 핏자국이 밖으로 빠져나와 내리막 통로까지 기다랗게 이어지고 있었다. 내리막 통로의 초입은 다른 층들과 다르게 자동 차고문처럼 생긴 오버헤드 도어로 가로막혀 있었다. 문 옆에는 비번과 지문을 인식하는 센서가 부착돼 있고, 바닥에는 누군가의 잘려진 손목이 버려져 있었다. 석중은 겁에 질렸다. 멈춰있던 지게차가 다시 움직여 방제실 앞까지 움직였다. 김선은 샷것을 쥐고 차에서 내렸다. 석중에게 잠깐만 기다려 달라고 말하며 철문으로 다가갔다. 긴장한 얼굴이지만 잘 훈련된 경호원처럼 빠르고 신속했다. 이어 철문을 발로 힘껏 차더니 샷건을 겨누며 안으로 들어갔다. 석중은 긴장된 얼굴로 김선이 사라진 어둠을 바라봤다. 손을 움직여 봤다. 어느새 기력이 돌아와 있었다. 


방제실 안으로 들어온 김선은 벽을 더듬어 조명 스위치를 올렸다. 어둡던 내부가 훤히 드러났다. 인테리어는 70년대 사무실 컨셉으로 꾸며져 있었는데... 온 사방이 피였다. 한쪽 벽면에는 지하주차장 각층을 조망하는 백 한 개의 브라운관 모니터가 설치돼 있었다. 하지만 화면에도 총탄이 수도 없이 박혀 대부분 꺼져 있었다. 김선은 피가 흥건한 통로를 따라 걸으며 죽은 남자 둘과 여자 둘을 발견했다. 김선의 유니폼과 디자인은 같고 색만 달랐다. 가슴께에 ‘핀셋‘로고가 박혀 있었다. 이들 중 한 남자는 손목이 잘려나간 상태였다. 오버헤드 도어 밑에 떨어져 있던 그 손목의 주인일 것이라 짐작됐다. 김선은 방제실에 생존자가 없음을 확인했다. 이어 천정에 매달린 CCTV를 올려다봤다. 렌즈가 박살이 나 있었다. 


김선은 CCTV 녹화영상을 확인했다. 방제실이 초토화되기 직전의 상황이 녹화돼 있었다. 비상벨이 울렸고 총기로 무장한 직원 다섯이 다급하게 밖으로 뛰어 나가려 했다. 이때, 방제실 문이 열리고 양손에 권총을 쥔 노인이 들어섰다. 석중을 속이고 도망친 그 노인이었다. 노인은 방제실 직원들을 향해 가차없이 총탄을 날렸다. 단숨에 직원 다섯이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한 명이 살아서 꿈틀대자 머리에 총탄을 박아넣으며 상황을 끝냈다. 석중과 있을 때와 확연히 다른 대범하고 동시에 절제된 움직임이었다. 노인은 직원들의 무기들을 수거하더니 제어 시스템을 향해 장전된 총탄 전부를 쏟아 부었다. 총탄이 박힐 때마다 방제실 모니터가 하나씩 꺼지고 조명도 어두워 졌다. 보일러 소음처럼 들려오던 현장음이 멈췄다. 지하 주차장의 온도 조절 시스템은 이때 파손된 것 같았다. 노인은 죽은 직원의 손바닥을 발로 밟더니 손목에 총탄을 연사했다. 잘려나간 손목을 나무토막 잡듯 움켜쥐더니 방제실을 나갔다. 녹화 영상은 여기까지였다. 


영상을 본 김선의 얼굴에 모니터 빛이 일렁였다. 분노로 가득했다. 이때, 누군가 김선의 목덜미에 드라이버를 갖다댔다. 석중이었다. 석중은 총을 버리라 말했고, 김선은 자신이 도우러 온 사람이라고 밝혔다. 석중이 몰아세우자 김선은 샷건을 바닥에 내려놨다. 석중은 경찰이 범죄자를 다루듯 양 다리를 벌리고 손을 올린 채 벽보고 서라고 말했다. 


잠시 후, 석중은 샷건의 총구를 김선에게 겨누고 있엇다. 김선은 손이 뒤로 묶인 채 의자에 앉아 있었다. 석중이 마주한 김선의 눈은 맑았다. 선한 인상이었다. 조금 전 편대표와 수하들을 잔혹하게 살해하던 그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였다. 석중은 여기가 어디냐고 물었다. 김선은 같은 답을 반복했다. 여긴 연옥이라고. 석중이 화를 내자 김선은 벽을 향해 턱짓하며 찾아서 한번 보시라 했다. 벽에는 서가가 있었고, 족히 출판된지 반세기는 넘어 보이는 오래된 백과사전들이 꽂혀 있었다. 김선이 찾아보라고 한 것은 ’연옥’의 사전적 의미였다. 석중은 자신이 직접 찾는 대신 김선의 손을 풀어주고 그녀가 하도록 시켰다. 잠시 후, 백과사전 한권이 석중 앞에 펼쳐졌다. 깨알같은 설명글 아래로 삽화가 보였다. 삽화에는 르네상스 시대에 그려진 그림 밑에 ‘연옥‘이란 제목이 붙어 있었다. 그림의 상단부가 천국이고 하단부는 지옥으로 묘사돼 있었다. 그 중간이 연옥인데, 여기 머문 사람들의 몸이 하나 둘 떠오르며 천국으로 향하고 있었다. 모두 행복해 보였다. 석중은 김선에게 연옥에 대한 설명을 읽으라고 시켰다.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연옥은 죽은 영혼이 천국에 들어가기 전에 

                                               남은 죄를 씻기 위하여 불로써 정화하는 장소로 

                                               대죄를 짓고 곧바로 지옥에 떨어진 자들과 달리 

                                          여기 들어온 자들은 죄사함의 기회를 한번 더 얻게 된다."


석중은 ’죽은 영혼‘이라는 워딩에 주목했다. 그렇다면 자신이 지금 죽었다는 얘긴가...? 김선의 말에 따르면 죽은 건 아직 아니고 다만 대기소에 와 있을 뿐이라 말했다. 석중은 두 번째 질문을 던졌다. 너희들 대체 뭐하는 놈들이냐고. 김선은 자신이 소속된 ’핀셋’이라는 기업이 한 세기 전부터 이 일을 해오고 있다고 말했다. 이 일이란... 설명을 막 늘어놓으려는 찰나, 김선이 갑자기 침묵했다. 석중이 신청한 해당 절차가 아직 끝나지 않았고, 모든 과정이 마무리 될 때까지 발설해서는 안 된다며 침묵의 이유를 밝혔다. 김선의 태도가 단호했기에 석중은 세 번째 질문으로 넘어갔다. 김선이 어디를 통해서 이곳까지 내려왔는지. 질문의 답은 곧 석중이 여길 탈출할 수 있는 루트였다. 김선은 백 한 개의 모니터들 중 첫 번째 화면을 가리켰다. 지하 1층이 조망된 화면이었다. 폭파된 콘크리트 더미들이 보였다. 뚫린 구멍 사이로 마치 신의 계시라도 내려오는듯 한 줄기 빛이 비추고 있었다. 김선은 편대표와 그의 수하들이 벌인 짓이라고 말했다. 석중은 사람을 여덟이나 쏴 죽이고도 일말의 죄책감을 느끼지 못하는 김선이 무섭게 느껴졌다. 하지만 김선은 독립투사라도 된 것처럼 확고한 신념을 내비쳤다. 이곳, 연옥은 아무나 들어올 수 있는 곳이 아닌데 놈들이 선을 넘은 거라고. 그래서 매뉴얼에 따라 정리 된 것일 뿐이라고. 


김선이 찾고 있는 건 노인이었다. 노인이 방제실을 부수는 바람에 지하실 전체를 컨트롤하는 온도 조절 센서가 파괴됐고, 지금 이 밑으로 얼마나 더 큰 피해가 났을지 짐작도 안 되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안타깝게도 지하 90층에서 지하 101층까지의 폐쇄회로 모니터는 전부 파손돼 확인 불가였다. 김선은 노인의 실체를 들려준다. 놈의 본명은 김양배로 지옥에서 탈출한 놈이었다. 하늘의 응답을 받고 그것을 메모했다던 죽은 스님은 사실 무당이었고, 김양배와 함께 지옥에서 넘어온 자였다. 사실, 지하 101층에는 지옥이 아니라 천국으로 통하는 문이 존재했던 것으로 밝혀진다.  


석중은 화면 속 일시정지된 노인의 얼굴을 봤다. 빛을 등진 노인의 검은 얼굴은 흡사 악마 같았다. 김선은 한쪽 변면을 빼곡이 채운 이름들을 가리켰다. 증권가 상황판처럼 작은 글씨의 이름들이 오와 열을 맞춰 적혀 있었다. 족히 천명은 넘는 숫자였다. 김선은 이 이름들이 지하 101층에 있는 천국문을 통과하려고 모인 대기자 이름이자 순번이라고 말했다. 대기자들이 지금 어디로 갔느냐는 석중의 물음에 김선은 바닥을 가리켰다. 지하 96층부터 지하 100층 사이가 대기자 장소라 말했다. 그리고 노인이 지금 그들 속으로 숨어든 상황이라고 말했다. 석중은 가장 묻고 싶었던 질문을 했다. 자신이 왜 이곳에 던져진 것인지. 김선은 석중이 어젯밤 계약서에 날인 했다는 사실을 주지시켰다. 만취한 석중이 핀셋 대리기사를 불러낸 시각이었다. 김선은 확인을 위해 업무용 태블릿을 꺼내 보여줬다. 그곳에는 수천명에 달하는 핀셋 회원 신상정보가 저장돼 있었다. 석중의 이름이 나왔. 김선이 파일을 재생했다. 


누군가의 시점이 바디캠 영상으로 보여졌다. 유흥가 바닥에 주저앉아 고개를 떨군 한 남자가 포착됐다. 석중이었다. 바디캠은 점점 다가간다. 인상불성이 된 석중 앞에 쪼그려 앉아 물었다. “선생님, 대리 부르셨죠?” 석중은 고개를 푹 숙인 채 손은 차키를 내밀었다. 


석중을 태운 차가 야심한 밤 거리를 달리고 있었다. 네비게이션 안내 음성만이 적막 속에서 울려댔다. 석중의 취한 음성이 화면 밖에서 들려왔다. 2열 시트에 드러누운 석중은 사는 게 왜 이렇게 좆같은지, 나만 그런건 지, 대리기사에게 넋두리를 늘어놓았다. 석중의 신세한탄은, 어릴 때 보육원에 버려진 얘기부터 몇년 전 딸이 실종된 기막힌 사연을 지나 곧 있으면 마누라도 도망갈 것 같다는 불길한 예언으로 이어졌다. 대리기사는 묵묵히 듣고 석중은 끊임없이 떠들었다. 하느님이 있다면 한번 만나서 묻고 싶다고. 대체 나한테 왜 이러는지. 침묵하던 대리기사가 석중을 내려다보더니 물었다. 정말 알고 싶으냐고. 영상은 여기까지였다. 


(현재) 김선은 태블릿에 저장된 전자 계약서를 내밀었다. 정말로 석중의 서명이 날인돼 있었다. 석중은 이런 데 처박아 달라고 동의한 적은 없다고 따져 물었다. 김선은 뭔가 더 할 말이 있는 눈치였지만, 약관상 아직 말씀드릴 수 없다고 말했다. 석중은 정신병자 보듯 김선을 바라봤다. 김선은 차분함을 잃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원래 방제실까지 무사히 도착하면, 명단에 이름을 올린 뒤 밑으로 내려가서 대기하면 됐다. 하지만 지금은 비상상황이기 때문에 일단 여기서 기달려 달라 말했다. 석중은 거절했다. 지하 1층 모니터 화면 속 콘크리트 틈으로 내려온 햇살을 가리키며, 자신의 천국은 바로 저기에 있다고 말했다. 김선은 못내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석중은 도리어 김선에게 나이도 젊은데 여기서 나가면 병원부터 가보라고 충고했다. 


방제실을 나온 김선은 내리막 통로를 가로막은 오버헤드 도어 앞에 섰다. 센서에 손바닥을 대자 기이잉- 도어가 천천히 올랐다. 도어 너머에서 믿기 힘들 정도의 차가운 공기가 유입됐다. 김선의 입에서 허연 입김이 나오고 있었다. 몇 걸음 뒤에서 바라보던 석중은 어처구니 없는 표정을 지었다. 이젠 냉장고인가... 김선이 내려갈 방향은 차가 통과할 수 없는 돌계단으로 이뤄져 있었다. 게다가 낮은 온도 때문에 벽과 천정에 결로 현상이 일고 있었다. 



                                                                            5장. 정화 (淨化) 


샷건을 움켜쥔 김선은 각오가 선 얼굴로 계단을 내려갔다. 그러다 잠시 멈추더니 자신을 내려다보는 석중을 향해 말했다. 석중의 해당 절차는 아직 진행중이니 기억하라고. 지하 101층에 발을 딛어야 비로소 절차가 끝난다고. 하지만 석중의 결심은 단단했다. 노인을 잡거들랑 전해달라고 말했다. 한번만 더 눈에 띄면 진짜 지옥이 뭔지 보여주겠다고. 돌아선 석중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김선은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발길을 돌렸다. 


석중은 고철덩이가 된 자신의 차문을 열었다. 내려오면서 적었던 피로 쓴 글자를 확인했다. 지하 87층. 현금 수송 트럭을 본 곳이었다. 석중은 오르막 통로를 오르기 시작했다. 표정에는 그 어느 때보다 강한 생의 의지가 차올라 있었다. 한번도 쉬지 않고 계속 달렸다. 난잡하게 세워진 차들 사이를 미로처럼 통과하며 뛰었다. 달리면서도 혼잣말을 읊조렸다. 천국이고 지옥이고 다 필요없다. 난 본 것만 믿는다. 본 것만... 석중의 몰골은 지하 1층에서 처음 눈 눈떳을 때보다 몰라볼 정도로 거지꼴이었다. 하지만 안광만은 그 어느 때보다 반짝였다. 


어느덧 석중은 지하 95층, 지하 94층... 지하 90층... 지하 88층을 뛰고 있었다. 숨이 턱까지 차오르고 온 몸이 땀으로 젖어도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지하 87층에 당도했다. 차량 사이를 걸으며 두리번 댔다. 현금수송 트럭이 포착됐다! 석중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심장이 쿵쾅대는 소리마저 들려왔다.  


석중이 트럭 컨테이너 도어를 열어 젖혔다. 순간, 입이 쩍- 벌어졌다. 오만원권 현금 다발이 가득 들어 차 있었다. 백 억은 족히 넘는 금액이었다. 석중은 지폐 뭉치 를 집어 확인했다. 진짜다... 벅찬 감동과 탄성이 터져 나왔다. 살았다... 살았어... 시발... 너무도 기쁜 나머지 돈 냄새를 맘껏 맡으며 눈물까지 흘렸다. 이제 올라가기만 하면 된다. 지하 1층 출구는 뚫려 있다. 


희망에 찬 얼굴로 석중이 트럭 운전석에 앉았다. 하지만 차키가 없었다. 주변을 다 뒤져도 보이지 않았다. 석중은 난처한 표정으로 창 밖을 내다봤다. 중고차 시장처럼 각종 차들이 빼곡하게 세워져 있었다. 석중은 차에서 내렸다. 


큼직한 골프가방이 바닥에 놓였다. 넣을 수 있을 만큼 최대한 현금을 쑤셔 넣었다. 다 가져가지 못해 아쉽지만 이 만큼만 해도 수십 억은 족히 넘을 터였다. 힘겹게 지퍼를 잠그고 어깨에 짊어졌다. 눈 앞에 펼쳐진 차들 속으로 걸어갔다. 운행이 가능한 차를 찾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눈에 띈 벤틀리에 앉았다. 시동이 걸리지 않았다. 방전된 상태였다. 내려서 다른 국산 SUV에 올랐다. 이번에는 키가 없었다. 핸들을 주먹으로 내치자 빵! 하고 경적이 울려 퍼졌다. 석중은 미로처럼 구획된 차와 차 틈을 오가며 승하차를 반복했다. 타고 내린 모든 차 안에 ‘핀셋 대리운전‘ 광고지가 꽂혀 있었다. 하지만 운행되는 차는 없었다. 


석중은 지하 86층으로 뛰어 올랐고 계속해서 차를 찾았다. 결과는 마찬가지. 지하 85층, 지하 84층에 세워진 차들도 전부 뒤졌지만 허사였다. 석중은 돈가방의 어깨끈을 힘껏 움켜쥐고, 절대 포기하지 않겠다는 결의를 다지며 차를 찾았다. 이때, 석중의 시선이 바로 옆 구형 소나타에 꽂혔다. 차 안에는 과거 채린이를 잃어버렸을 때, 딸 아이가 손에 쥐고 있던 뽀로로 인형이 놓여 있었다. 설마... 석중의 심장이 쿵쾅대고 있었다. 긴장한 얼굴로 도어를 열었다. 차 안에 들어가 뽀로로 인형을 끄집어 냈다. 겉감이 찢겨져 안감이 빠져나와 있었다. 채린이와 관련된 다른 단서는 없었다. 석중은 트렁크 오픈 버튼을 눌렀다. 딸각- 트렁크가 열렸다. 


트렁크 문 사이로 악취가 피어올랐다. 마트장을 본 듯한 물건들이 포장된 채 썩어 있었다. 석중은 코와 입을 막고 손을 집어넣어 뒤지기 시작했다. 순간, 석중의 시선이 개봉되지 않은 플라스틱 우유병에 꽂혔다. 순간, 불길한 기운이 엄습했다. 우유병을 집어 천천히 돌려보자 깨알같은 글씨로 유통기한이 보였다. 채린이를 잃어버린 그날, 유제품 코너에서 집어든 바로 그 우유라는 사실을 확신했다. 유통기한이 연도만 다를 뿐 채린이의 생일과 월일이 같았던 바로 그 우유였다. 석중의 어깨를 짓누르던 돈가방이 바닥에 떨궈졌다. 석중은 멍한 얼굴로 자신의 뺨을 후려쳤다. 한 대, 두 대, 세 대, 네 대. 벌겋게 볼이 불어오르고 눈가에 눈물이 차올랐다. 꿈이 아니었다. 섬망도 아니었다. 석중은 고개를 돌렸다. 두 다리는 다시 내리막 통로로 향했다. 돈가방은 바닥에 그대로 버려둔 채로. 


석중은 방제실 안으로 허겁지겁 뛰어 들어왔다. 주변을 둘러보다가 대기자 명단이 적힌 벽으로 다가갔다. 천 명에 달하는 대기자 이름이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석중은 의자를 가져와 올라섰다. 작은 이름들을 일일이 확인했다. 마치 팔십 년대 대학교 합격자 명단을 훑는 수험생처럼. 석중은 미친 사람처럼 딸 이름을 계속 읊조렸다. 방채린... 방채린... 방채린... 합격자를 찾는 부모처럼 읊조렸다. 그러다가 492번에서 딸 이름을 발견했다. 석중은 중심을 잃고 하마터면 의자에서 넘어질 뻔 했다. 다리가 풀려 바닥에 주저앉아 가슴을 주먹을 때리며 숨을 쉬느라 애썼다. 이때, 밖에서 희미한 총성이 들려왔다. 김선이 들고 내려간 샷건 격발음이었다. 총성은 연이어 들렸다. 석중의 표정에 두려움이 찾아들었다. 바닥에 떨어져 있던 죽은 직원의 총기를 집고 밖으로 뛰어 나갔다. 김선이 내려간, 오버헤드 도어를 지나 차가운 냉기가 올라오는 돌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입김이 하얗게 흩어졌다. 


지하 96층을 내려가는 석중의 모습은 실성한 사람, 그 자체였다. 살얼음이 낀 바닥을 뛰어 내려가다가 미끄러져 자빠지기를 수차례. 하지만 곧장 일어나 뛰었다. 파렇게 질린 입술에서 애처로운 읊조림이 흘러 나왔다. “채린아 기다려. 아빠가 지금 가...“ 


지하 99층에 이르자, 성당 의자처럼 생긴 가로로 긴 나무 의자 백 여개가 배치돼 있었다. 천명은 거뜬히 수용할 수 있는 규모였다. 하지만 모든 게 얼어붙어 있고 사람은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석중은 몸을 잔뜩 움츠리고 추위에 떨면서 걸었다. 이때, 의자 밑에서 푸드득- 소리와 함께 까마귀들이 날아올랐다. 석중은 총구를 세워 방아쇠를 당겼다. 탕! 타앙! 까마귀들은 깃털을 날리며 허공으로 흩어졌고, 석중은 까마귀가 안 보일 때까지 계속 총질을 했다. 탄이 소진되자 샷건을 내던지고 다시 뛰었다. 눈썹에 허연 서리가 내려앉고 있었다. 


지하 100층이 눈앞에 펼쳐졌다. 석중은 충격에 휩싸여 입을 틀어 막았다. 눈 앞에는 엄청난 숫자의 시체들이 서로 뒤엉켜 얼어붙어 있었다. 죽기 직전의 모습 그대로. 마치 폼페이 화산폭발이 만들어낸 대규모 인간 화석을 보는 듯 했다. 공포에 질린 석중의 표정이 이 기막힌 광경을 훑었다. 딸을 찾는 건 불가능해 보였다. 그럼에도 석중은 시체들의 면면을 일일이 확인했다. 여자 아이의 시체가 발견되자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다행히도 채린이가 아니었다. 탕! 총성이 한번 더 울렸다. 가까이에서 들리는 크고 명징한 소리였다. 석중은 고개를 흔들며 ”안 돼... 안 돼... 제발...“ 이라고 끝없이 읊조렸다. 석중은 이제 최하층으로 통하는 지하 101층 계단에 발을 내딛었다. 계단은 얼어붙은 시체로 뒤덮혀 있었다. 석중은 이들을 밟고 내려가야 했다. 시체의 관절이 바스라지고 두개골이 빠각 소리를 내며 함몰됐다.  


지하 101층이 석중의 눈앞에 펼쳐졌다. 천정에 기다란 고드름이 종유석처럼 내려와 있고 온 사방이 꽁꽁 얼어붙어 있었다. 마치 시체를 보관하는 거대 냉동창고에 들어선 기분이었다. 시체들의 죽기 전 모습은 서로 가고자 하는 방향이 반대였다. 누군가는 내려온 길을 되돌아 올라가려다 죽었고, 누군가는 더 내려가려다 깔려 죽었다. 표정도 상반됐다. 되돌아가려는 부류는 공포와 두려움에 잠식돼 있고, 나아가려는 부류는 기쁨과 환희가 얼굴에 배어 있었다. 그리고 얼어붙은 시체 곳곳에는 수없이 많은 까마귀떼들이 시뻘건 눈을 한 채 앉아 있었다. 석중은 공포를 이기내려 이를 악물고 시체의 산을 넘었다. 그리고 저 멀리 마치 로댕의 작품 ‘지옥의 문’ 처럼 서 있는 그로테스크한 철문을 목격하게 된다. 더 이상의 내리막은 없었다. 여기가 지하주차장의 끝이었다. 철문 앞에는 온 몸에 피칠갑을 한 누군가가 고개를 숙인 채 앉아 있었다. 노인이었다. 어디서 구해 입었는지 알몸에 모피 코트를 걸치고 있었다. 손목 하나는 이미 잘려나간 상태였다. 남은 손이 가까스로 권총을 쥐고 있었다. 발 아래에는 김선이 피를 흘리며 죽어가고 있었다. 석중을 본 노인은 권총 쥔 손을 들어올리더니 이리 오라고 힘겹게 손짓했다. 석중이 천천히 다가갔다. 노인과 불과 십여 미터 떨어진 곳에서 걸음을 멈췄다. 석중의 얼굴은 충격과 혼돈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가까이에서 본 노인의 상태는 끔찍했다. 피를 얼마나 흘렸는지 얼굴은 창백했다. 눈썹에 허연 서리가 내려앉아 있었다. 새파래진 입술 사이로 허연 입김이 뿜어져 나왔다. 노인이 말했다. 등 뒤를 가리키며 이 문 좀 열어달라고. 잘린 이 손목으로는 도저히 열 수가 없다고. 부탁한다고. 노인에게 머리를 밟힌 김선은 석중에게 외쳤다. 문을 열면 절대 안 된다고. 이 자를 못 막으면 천국에도 큰 혼란이 일어날 거라고. 노인이 분노하며 반박했다. 이 여자는 뱀이다.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이 전부 거짓이다. 악에 받친 김선은 노인의 본명을 부르며 말했다. 김양배, 너에게 천벌이 내려질 것이라고. 노인은 이를 부득부득 갈며 김선의 입 속에 총구를 쑤셔 박았다. 석중은 마치 혼이 빠져나간 얼굴로 서 있었다. 노인이 석중에게 말했다. 석중을 버리고 차에서 내리던 당시의 진심어린 얼굴로. 속여서 미안하다고. 겁이 나서 그랬다고. 죽은 스님이 써준 대로 하지 않으면 이곳까지 못 내려올 것 같아서 그랬다고. 노인은 울먹이며 지하주차장의 실체에 대해 털어놓았다. 여기 들어온 사람들은 모두 누군가 사주를 해서 끌려온 것이라고. 이들의 가족이나 지인들이 큰 돈을 치루고 여기에 처넣은 거라고. 이 말을 들은 석중의 뇌리에 기억들이 스쳤다. 편대표가 차 안에서 했던 말이 떠올랐다. 석중의 위치를 누가 말해줬는지 알고 있느냐는 의미심장한 질문. 그리고 지하 1층에서 아내와 통화할 때 자신을 향해 퍼붓던 저주 섞인 말들. 제발 어디가서 좀 죽어 버리라는 그 말. 자신을 속이고 비행기에 오른 병태의 심드렁한 목소리도 생각났다. 그리고 전세 사기 피해자들이 보낸 살기어린 협박 문자들도 세세하게 떠올랐다. 떠오른 사람들 중 누군가가 자신을 이곳에 처 넣었다... 노인이 얘기가 석중에게 확신을 안겼다. 문제를 일으킨 인간을 이곳에 쳐 넣으면, 썩은 이빨이 뽑히 듯 산자들은 불행에서 해방 된다고. 핀셋은 그런 일을 하는 곳이라고. 혼돈에 휩싸인 석중이 절규했다. 그럼 내 딸은 어떻게 된 거냐고! 내 딸은 무슨 죄가 있냐고!! 석중의 피맺힌 성토에 노인이 물끄러미 올려다봤다. 김선이 죽을 힘을 다해 총구를 뱉어내고 외쳤다. 노인을 죽여주면 딸을 찾아주겠다고. 딸은 아직 살아있다고. 석중의 시선이 김선에게로 이동했다. 떨리는 목소리로 대기번호를 전했다. 사백 구십 이번. 이름 방채린. 딸이 지금 어디에 있느냐고 물었다. 순간, 탕! 소리와 함께 노인이 쏜 권총이 김선의 관자놀이를 뚫었다. 수백 마리의 까마귀떼가 일제히 날아올랐고, 석중은 무너져 내렸다. 김선이 죽었음을 확인한 노인이 고개를 쳐들었다. 피가 튄 얼굴을 쓸어내리며 입가에 미소를 걸었다. 그리고 다시 물었다. 딸을 찾고 있었냐고. 말을 하지 그랬냐고. 석중은 몸이 산산조각나는 기분이었다. 노인의 낮고 느린 음성이 이어졌다. 본 것 같다고. 실종 전단지에서 본 그 애를 이곳에서 본 것 같다고. 석중이 물었다. 어디서... 어디서... 어디서!! 라고 외치자, 노인의 총구 끝이 석중 너머를 가리켰다. 석중의 시선이 총구의 방향을  쫓았다. 노인이 가리킨 곳에는 시체의 산이 보였다. 노인이 말했다. 


                                                      찾아보라고... 월리를...


노인의 입가에 비열한 웃음이 걸리더니 마른 웃음이 터졌다. 섬뜩하고 광적인 웃음이었다. 순간, 석중의 시선으로 본 노인의 두 눈이 시뻘겋게 빛났다. 악몽 속에서 지워지지 않는 그 옛날 폐닭장의 까마귀처럼... 갑자기 석중에게 이명이 찾아들었다. 심장이 터질 듯이 뛰었다. 석중은 바닥에 떨어진 얼어붙은 두개골을 집어들었다. 그리고 노인에게 한 발자국씩 다가갔다. 이를 본 노인의 총구가 석중을 겨눴다. 방아쇠를 당기지만 철컥- 소리와 함께 격발되지 않았다. 탄이 모두 소진된 상태였다. 노인의 얼굴에 죽음의 공포가 찾아드는 순간, 석중이 쥔 두개골이 이마를 힘껏 내리 찍었다. 퍼억!! 노인은 피를 뿜으며 얼어붙은 바닥에 그대로 고꾸라졌다. 노인의 몸 위에 올라탄 석중은 멈추지 않고 내리찍었다. 시뻘건 피가 얼굴까지 튀어 올랐다. 노인의 손이 축 늘어져 더 이상 움직이지 않게 됐음에도 석중은 멈추지 않았다. 살벌하고 거친 욕설이 입에서 쏟아져 나왔다. ”개새끼!! 악마같은 새끼!! 죽어!! 죽어어!!!” 노인의 안면부가 함몰되고 안구가 터져나왔다. 그제야 타격을 멈췄다. 석중은 얼굴에 피칠갑을 한 채로 일어섰다. 떼구르- 피와 살거죽이 들러붙은 두개골이 바닥을 굴렀다. 석중은 구부정하게 일어선 자세로 미동없이 서 있었다. 마치 얼어붙은 시체처럼. 지하 101층 전체에 숨막힐 듯한 적막감이 찾아들었다. 그렇게 5분 같은 5초가 흘렀다. 


석중이 천천히 고개를 쳐들었다. 시선은 정면을 가로막은 철문을 향하고 있었다. 피로 물든 손바닥 자국들이 곳곳에 찍혀 있었다. 열고자 했으나 실패한 흔적들. 석중의 손이 얼어붙은 문고리를 힘껏 움켜쥐었다. 마지막 힘을 짜내 돌렸다. 날카롭고 육중한 쇳소리와 함께 철컥- 문이 열렸다. 틈새로 눈부신 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따뜻했다. 석중은 어깨를 밀착시키고 문을 완전히 열어 제쳤다. 너무도 강렬한 빛이 비추며 석중의 하나 남은 눈마저 일시적으로 멀게 된다. 시야가 온통 새하얘졌다. 


문 밖으로 나온 석중은 이제 청력에 모든 걸 의지해야 했다. 청명한 공기가 느껴졌다. 석중의 깊은 들숨 소리가 들렸다. 귓가에 흐르는 물소리와 풀잎에 바람 스치는 소리가 들렸다. 새들의 지저귐도 들렸다. 따스한 햇살이 온 몸을 감샀다. 석중은 직감적으로 느꼈다. 이곳이 천국이라는 것을. 노인의 말이 거짓이고, 김선의 말이 진실이었다는 것을. 한번 더 깊게 공기를 들이마셨다. 이때, 어디선가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아빠를 부르는 여자 아이의 음성이었다. 석중은 순간 귀를 의심했다. 한번 더 들렸다. 작고 부드러운 손이 석중의 피뭍은 손을 잡았다. 아이는 울면서 말하고 있었다. 왜 이제 왔냐고. 무서웠다고. 딸 채린이었다. 석중은 목이 메어 채린이의 이름을 불렀다. 미안하다고. 늦게와서 정말 미안하다고. 이제 다 끝났으니 괜찮다고. 집에 가자고. 채린은 울음을 터트렸다. 석중은 신에게 감사했다. 한 번도 입 밖에 냈던 적 없는 신을 향한 감사와 찬양의 말이 쏟아져 나왔다. 어디선가 진동음이 들려왔다. 석중의 주머니 속에서 휴대폰이 진동하고 있었다. 그 동안 밀려있던 부재중 통화와 문자 메시지 그리고 카톡과 광고 알림음이 동시에 쏟아졌다. 문 밖으로 나오면서 통화권에 다시 들어온 것이었다. 그리고 멀리서 경찰차 사이렌 소리가 들려왔다. 휴대폰은 미친 듯이 요동치고 있었다. 문 밖은 현실 세계였다. 새하얗던 석중의 시야가 서서히 어두워지고 있었다. 석중의 숨소리는 다시금 거칠어졌다. 등 뒤에서 발소리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여러 명이었다. 석중이 걸어나온 철문 안에서 들려오는 소리였다. 하지만 누군지 확인할 길이 없었다. 시야는 점점 더 어두워졌다. 날카롭고 육중한 쇳소리가 들리더니 쿵- 철문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암흑 속에서 석중의 숨소리만이 들렸다. 암전된다. 


서서히 밝아지면, 잿빛 먹구름에서 비가 쏟아지고 있다. 쾌속정은 뱃머리를 돌려 저 멀리 보이는 항구로 향하고 있다. 선상은 비를 피하려는 관광객들로 소란스럽다. 좁은 차양막에 다닥다닥 붙어선 관광객들. 이미 흠뻑 젖은 가이드는 넉살좋게 설명을 이어간다. 아마존강에서 십년 째 가이드를 하고 있는데, 예보도 없이 이렇게 비가 쏟아지는 건 처음이라고. 관광객들이 웅성댄다. 이런 게 다 추억이라고. 또 누군가는 속옷까지 다 젖었다고 투덜댄다. 다른 누군가는 감기도 보험이 되느냐고 헛소리를 해댄다. 가이드는 친절함을 잃지 않고 말한다. 잠시만 참고 기다려 주신다면 따뜻한 숙소로 신속히 모셔다 드리겠다고. 항구에 셔틀버스가 대기 중이라고. 이때, 아줌마 관광객 하나가 배의 후미에서 뭔가를 보더니 같이 온 사람에게 속삭이며 호들갑니다.  “어머머, 저기 좀 봐...” “(눈이 휘둥그레져) 에그머니나.” “아이고야...” 


관광객들의 시선이 일제히 후미로 향한다. 두 젊은 남녀가 비를 흠뻑 맞으며 열정적인 키스를 나누고 있다. 멜로 영화 포스터에서 봤음직한 격정적인 장면이다. 남녀는 젊은 시절 석중과 그의 아내 명선이다. 루즈핏 원피스를 입은 명선의 배는 불러있다. 아기를 임신한 상태다. 관광객들은 분위기를 깰까 목소리 낮추며 두 사람을 힐끔댄다. 아이를 동반한 엄마 관광객은 아이의 눈을 가리고, 노인 커플은 아름다운 풍경을 감상하듯 따스한 눈길로 바라본다. 누군가가 외친다. “브라보-!!“ 사람들 일제히 키스 커플에게 박수와 환호를 보낸다. 빗줄기는 더 거세지고 키스는 더 격정적이 된다.  카메라 서서히 하늘로 떠오른다. 아마존강을 한 눈에 조망하는 앵글에 이른다. 양분됐던 지류는 비로 인해 하나로 섞이고 쾌속정은 항구를 향해 떠간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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