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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재천 Apr 16. 2024

메리 힐만, 독신으로 인천, 원주에서 28년 활동

그녀가 남긴 유산으로 수원 여성회관(힐만 기념관) 건립

메리 힐만 선교사(1870~1928)는 독신으로 살면서 여성 교육과 전도 등 여성의 복음화를 위해 헌신하였다. 그녀는 한국에서 28년 헌신하고 양화진에 안장되었.

그녀는 1870년 4월 미국 오하이오 주 뉴아크에서 태어나서 오하이오 웨슬리안 대학을 졸업했다. 그 후 프로테스탄트 병원에서 1년간 간호사 교육을 받았고 뉴욕 폴츠 선교사 학교에서 훈련을 받았다. 그녀는 어릴 때부터 부모님의 선교사 헌신 기도를 들었기에 가난한 나라에서 사역하는 선교사의 길을 택하였다.


그녀는 1899년 12월 독신으로 북 감리회 선교사로 입국하였다. 인천에  배속되어 6년간 여성을 위한 교육 선교에 힘을 쏟았다. 1905년에는 이화학당 페리 학장과 프라이 선교사가 가족의 병고로 미국으로 돌아가는 일이 발생하여 그녀가 대신하여 1년간 학장 서리로 봉직하였다.


1907년부터 룰라 밀러 선교사와 함께 인천 근교 지역을 순회 전도하며 복음을 전했다. 강화 지역의 심산 및 교동 섬 일대와 해주까지 가서 여성 사경회를 인도하고 매일 성경학교에서 학생을 지도하였다.


1910년 우리나라가 일제에 의해 강제 합병되었을 때 그녀는 여성 사경회를 열고 모세와 여호수아 이야기를 설교하며 하나님은 조선을 버리지 않을 것을 강조하고 우리 민족에 희망의 불씨를 지폈다.


1912년 2월부터 인천과 수원 지역 교육 담당 선교사로 임명받아 거주지를 서울로 옮겼다. 그리고 잠시 보구여관 커틀러 관장 후임으로 의료사업에도 봉직하였다.


1916년부터 원주 선교부로 전임되어 원주에 거주하면서 원주읍 교회 내 의정 학교를 설립하여 학생들을 가르쳤다.  의정 학교는 남녀공학으로 운영되었으며, 1917년 원주 공립 보통학교에 합병되었다. 또한 원주 외에도 강릉에까지 성경 강습회를 열고 여성 신도들에게 성경을 가르치고, 전도하여 강원도 교회 부흥에 기여하였다.


1922년부터 조선 예수교서회에서 신앙서적 번역 업무 수행하다가 과로로 건강이 나빠졌다. 그 후 1928년 2월 58세 나이로 세브란스 병원에서 소천하였다. 그녀의 시신은 외국인 선교사 묘역인 양화진에 안장되었고, 묘비에는 <Nevertheless I live>(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살아있노라)로 기록되어 있다.


그녀는 개인 자산을 친구 룰러 밀라에게 전달하여 한국 복음화를 위해 사용토록 하였는데, 기부금을 받은 룰라 밀러는 여성 선교사들이 거주할 건물을 수원에 건축하여 <힐만 기념관(여성 회관)>으로 명명하고 여선교사들이 거주하는 기숙사로 사용되게 하였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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