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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재천 Apr 26. 2024

케이블, 강화도에 감리회 교회를 개척한 선봉

협성신학교 발전의 기틀 마련

엘머 케이블 선교사(기이부, 1874~1945)는 감리회 서지방 감리사로 사역하면서 강화도 및 경기도 서부 지역 복음화에 크게 기여하였다. 또한 교육 사역과 문서 선교를 활발히 전개하였고, 특히 협성 신학교 발전의 기틀을 만들었다.


그는 미국 아이오와 주 블로라에서 태어나서 기독교 가정에서 성장하였다. 1899년 코넬 대학교를 졸업하고 그해 미감리회 아이오와 연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은 후 한국 선교사로 파송받았다.


그는 1899년 9월 부인과 함께 한국에 도착했다. 서울에서 한국 문화에 적응하고 배재학당 대학부 교수로서 선교 활동을 시작하였다. 배재학당에서는 1901년까지 재직했다.


1902년 5월 평양에서 개최된 연회에서 한국 서지방 감리사로 임명받아 인천으로 거주지를 이동하였다. 그리고 인천 제물포 교회를 담임하면서 인접한 강화도를 비롯하여 해주, 시흥, 부평, 남양 등지를 순회하며 복음을 전하고 자체 사역에 협력하였다. 그는 강화도 복음화에 심혈을 기울여 목선을 타고 순회전도 여행을 하였다. 현재 강화도에는 대부분 감리 교회인 것은 케이블 선교사의 영향이 크다. 또한 그는 황해도 평산까지 가서 남천 교회를 시무하였다.


* 당시 감리회는 3개 지역으로 나누어 사역하였는데 북지방은 스크랜턴, 남지방은 스웨어러, 서지방은 케이블 선교사가 맡아 사역하였다.


* 평산 남천 교회는 황해도 북쪽 지역에 있는 교회로서, 1901년 콜리어 선교사(개성 중심 사역)가 개척하였는데, 담당 목사의 부재로 감리사인 케이블 선교사가 사역하였다.


당시 여성 독신 선교사들이 증가하여 이들이 거주할 기숙사가 필요되었다. 그는 안식년을 맞아 미국에 가서 후원금을 모집하여 인천에 <갬블 홈> 건물을 건축하였다. 이 건물은 후원금을 기부한 갬블 부인의 이름을 따서 명명한 것이다. 갬블 홈은 2층 건물로 1층은 사경회 및 교육관으로 사용하고, 2층은 여성 기숙사로 활용되었다.


그는 1905년 6월부터 경기 서지방 감리사외 충청도 지방까지 영역을 넓혀서 활동하였고, 1907년에는 인천 지방 감리사, 1908년 공주 지방 감리사, 1909년에는 충청도 지방 감리사로 옮겨가며 사역하였다.


그는 교육사업에도 헌신하였다. 1910년 협성 신학교 교수로 발령되어 4년간 역사 신학을 가르쳤다. 그 후 교감이 되어 초창기 신학교 기틀을 마련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그는 선교사들의 자세에 대해 언급하였는데, 한국의 토착 교회를 존중하고, 한국인과 우호 관계 유지 및 신뢰를 강조했다. 일부 선교사들의 인종적 우월감을 경고했던 것이다.


특히 그는 민족 운동에 협력하였다. 국가가 강해지기 위해서 교육을 통한 실력 배양이 필요함을 강조했다. 1908년 3월 공주지방 감리사 시절 친일 감독인 해리스에게 항의했고, 일제의 만행을 미국에 알렸다.


그는 문서 선교에도 열심이었다. 1905년부터 〈대한 그리스도인 회보〉(The Korean Christian Advocate)의 주필로 활약했다. 또한 협성신학교 기관지 〈신학 세계〉를 통해 여러 논문을 발표했는데, 감리교 역사, 메소디스트 교회의 약사, 요한 웨슬리전, 연대적 기독교사, 감리교 선교의 초기 등의 글을 기고했다. 또한 1926년 한글 성경의 구약 개정 작업을 진행할 때 레이놀즈, 엥겔, 베어드, 하디, 피터스 등과 함께 참여했다.


그는 1915년 감리교와 장로교가 연합으로 연희전문학교를 설립할 때 감리회 대표로 참여했고, 그 이후 10년간 연희전문학교 교수로 활동하였다. 1917년에는 한국 선교사로 헌신한 공로를 인정받아 모교인 코넬 대학교에서 명예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후 협성 신학교 교장으로 추천받아 1926년 6대 교장이 되었다. 부임 후 협성 신학교를 4년제 대학교로 격상시켰고, 한국 최초로 남녀 통합 교육을 실현하였다. 1929년 4월부터 협성 여자신학교(충정로 소재)와 3년간 예비 통합 교육을 시행한 후 두 학교가 정식 통합하여 감리교 신학교가 되었다.


*협성신학교는 1907년 10월 개교하여 초대 존스 교장을 시작으로 2대 하디, 3대 왓슨, 4대 드밍, 5대 노블, 6대 케이블 순으로 교장을 역임하였다.


그는 감신대 교장도 역임했고, 1932년 4월부터 연희전문학교로 교수로 활동하며 한국 선교사역을 마감했다. 그리고 1940년 12월 일제에 의해 강제 귀국 당하여 고국으로 돌아갔다. 귀국 후 샌리안드로에 머물다가 1949년 12월 소천하였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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