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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재천 May 12. 2024

마가렛 벵겔, 최초 음악 선교사로 찬미가 제작에 협력

인천 영화 여학교 설립하고 김활란 등 여성인재 육성

마가렛 벵겔 선교사(1869~1962)는 최초 음악 선교사이다. 인천에서 영화 여학교를 설립하여 여성 인재를 양성했으며, 남편인 존스 목사를 도와 인천 및 인접 섬에 복음을 전하였다.

그녀는 1890년 10월 21살의 나이로 미국 북 감리회 선교사로 인천에 도착하였다. 이때 존스 선교사가 마중을 나와 서울로 안내하였다. 그녀는 서울 정동 선교 기지에서 거주하면서 한국 문화에 적응한 후 1892년 1월부터 이화학당에서 성악과 오르간을 가르치며 선교 활동을 시작했다.


1892년 북 감리회는 인천의 여성 선교에 중점을 두었기에 그녀를 인천으로 파송했다. 이때 존스 선교사도 함께 인천으로 파송되어 인천 지역을 맡도록 했다. 존스는 그녀가 처음 한국 방문 시 안내하고 또 함께 사역하면서 가까워졌고  결국 1893년 5월 정동에서 결혼하였다.


존스 부부가 인천에 정착하면서 내리 교회를 중심으로 복음전도와 교육이 활발해졌다. 벵겔은 전도부인 백헬렌 (황해도 출신)과 함께 본격적인 여성 선교 활동을 전개하였다. 백헬렌은 박물 장수(가정에서 필요한 여성용 물품을 판매하는 사람)가 되어 물건을 싸게 팔면서 단골을 만들고 복음을 전하였는데 이때 많은 부인들이 복음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전도한 여성들은 벵겔 집으로 초대하여 한글을 가르치고 이어서 찬송가를 가르쳤다. 한글 교육은 강 세실리아가 담당하였다. 강 세실리아는 존스 목사가 인천으로 내려올 때 함께 온 강재형 전도사의 아내이다.


여성 성도가 증가하면서 큰 규모의 예배당이 필요되어 모금 운동이 벌어졌다. 많은 부인들이 일을 하며 기금을 모아서 1894년 7월 초가지붕의 여성 전용 예배당을 건축했다.


그리고 부인을 따라온 아이들 대상으로 아동 교육을 시작했다. 이것이 제물포 여자 매일 학교의 시작이다. 1898년에는 남자아이를 대상으로 내리 교회에서 존스 목사에 의해 시작되었다. 여자 매일 학교와 남자 매일 학교는 1898년부터 영화 학교 및 영화 여학교로 불리며 인천 근대화 교육에 기여하였다.


1900년 웨슬리 예배당 건축을 시작하면서 인근 에즈베리 배당으로 옮겨 학생을 가르쳤는데, 1902년 화재로 소실되었다. 이때 독일 칼스루헤 교회(밀러 목사의 고향)의 후원으로 건물을 신축하였고, 미국 선교회로부터 직영 학교로 지정받아 이화학당의 부속학교가 되어 본격적인 근대 교육이 시작되었다.


영화 여학교를 통해 김활란(최초 여성 박사), 김애식(최초 서양음악 전공) 등 훌륭한 여성 인사가 배출되었다. 그 후 1909년 미국 사업가 콜린스의 후원을 받아 인천 우각리에 3층의 학교 사옥을 완공하여 더욱 많은 학생들이 교육을 받게 되었다.


그녀는 최초 감리교 찬송가인 <찬미가> 제작에 기여하였다. 찬미가는 그녀의 남편 존스와 로드 와일러 선교사에 의해 편찬되었지만, 미국 찬송가 27곡을 선정하고 번역하는 일에 벵겔과 이경숙 선생이 협력하여 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녀는 1909년 남편 존스 선교사가 <한국 감리회 25주년 대회> 준비요원으로 발탁되면서 미국으로 돌아갔다. 이때 그녀도 19년의 한국 생활을 마감하고 함께 귀국했다.


남편은 뉴욕에 본부를 두고 기념행사를 주관하였는데, 그녀는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1913년 <The Lure of Korea(한국의 매력)>을 발간했다. 이 책은 총 18장으로 구성되어 한국 역사, 문화, 종교, 지형과 기후 등이 소개되어 있다. 또한 한국인의 불굴의 신앙과 실천에 대해 존경을 표현하고 있다.


존스 선교사는 1919년 52세의 일기로 소천하여 뉴저지 묘원에 안장된 기록이 있으나, 그녀의 마지막 삶에 대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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