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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더 알렌, 경남 지역에서 교육과 복음 사역에 헌신

평생 독신으로 오직 복음 사역에 헌신하고 이 땅에 안장

by 신재천

아더 윌리엄 알렌 선교사(안란애, 1876~1932)는 진주 교회 담임 목사로서 그리고 진주 광림학교와 마산 창신학교 교장으로서 평생을 헌신하고, 이 땅에 묻힌 독신 남자 선교사이다.

그는 1876년 호주 빅토리아 주에서 출생하여 1913년 멜버른 대학교에서 피아노를 전공하였다. 그리고 오르몬드 신학교에서 3년간 공부한 후 목사 안수를 받고 선교사로 지원하였다.


1913년 4월 호주 장로교 선교사로 임명되어 한국에 왔다. 그는 첫 사역지인 진주에 부임하여 한국어를 배우고 한국 문화에 적응하기 시작했다.


1915년 9월 진주 교회 담임 목사로 취임하여 1927년 11월까지 12년을 시무하였다. 1916년에 진주 교회를 현대식으로 건물을 건축하였고, 1918년에는 한국인 목사(박성애)를 세워 한국인 스스로 교회가 운영되도록 하였다. 또한 당회를 부활시키고, 1924년에는 진주 남성 교회 설립을 지원하였다.


* 진주 교회는 1905년 커를에 의해 시작되어, 1909년 라이얼 목사, 1915년 알렌 목사, 그리고 1920년 커닝햄 목사가 부임하여 시무하였다.


또한 그는 진주 교회 시무하는 동안 광림 학교(후에 여자는 시원 여학교로 분리) 교장으로서도 활동하였다. 음악을 전공하였기에 음악 보급에도 앞장섰다. 1925년 학교 건물을 신축하였다.


그러나 그가 재임 중인 1923년 교사 해임에 따른 학생 소요가 발생하기도 했다. 그가 여학교 교사를 해임했는데 학생들이 이에 반발하여 수업을 받지 않자 주동 학생을 퇴학 조치한 것이 발단이 되어, 이웃 남자 학교 학생들도 동맹 휴교한 사태였는데, 아쉽게도 알렌은 끝까지 학생의 의견을 수용하지 않고 40여 명의 남녀 학생을 퇴학시킨 사건이다. (동아일보 1923년 1월 28일 자 신문)


그는 1925년 마산 선교부로 이동하여 호신 학교 (창신 학교의 중등과정을 분리)의 초대 교장으로 활동하였다. 그 후 마산에서 생활하다가 1932년 7월 병으로 58세의 나이로 소천하였다.


그의 유해는 최초로 사역한 진주에 안장되었으며, 1990년 택지 개발 사업에 따라 묘지가 철거되면서 경남 산청군 덕산교회 묘지에 안장되어 있다. 당시 함께 생활한 진주 교회 김정수 장로는 <고상한 지조로 독신 생활을 하며 전 일생을 순결하게 주님 사업에 희생하니 그 위대한 사역을 칭송하지 않을 수 없다.> 고 평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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