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 타고 섬지방에 의술로서 복음을 전한 선교사
윌리엄 테일러 선교사(위대연, 1877~1938)는 호주 장로교에서 파송되어, 경남 통영 및 진주 배돈병원에서 25년간 활동한 의료 선교사이다.
그는 호주에서 의과 대학을 졸업하고 호주 인근 뉴 헤브리디스의 산토섬에서 사역하였다. 그곳에서 간호사 메인 양을 만나 한국 사역 마음을 나누며 결혼을 약속했다. 1913년 9월 호주 장로교로부터 한국 선교사로 파송받아 캐서린 레잉 양과 함께 부산에 도착했다. 그리고 그해 12월 상해에서 메인과 결혼식을 올렸다.
그는 통영에서 첫 사역을 시작했다. 당시 통영 선교부가 설립되는 시기로서, 의료 담당 선교사가 필요했기에, 그가 통영으로 파송된 것이다.
1915년 9월 통영에 최초로 진료소가 세워지고, 한국인 간호사를 채용하고 환자를 돌보았다. 한센병 환자에게도 관심을 가져서 한센병 전문 진료소를 제안했으나 정부의 반대로 이루지 못했다. 또한 왓슨 목사(통영 선교부 개척자)와 함께 인근 지역을 방문하며 복음을 전하였고, 그때 복음의 열매가 많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는 통영 근처에 많은 섬이 있기에 호주 선교본부를 통해 보트를 후원받아서, 보트를 타고 남해의 섬을 순회하며 환자를 돌보고, 섬사람들에게 요리문답반을 지도하였다.
1920년부터 진주 베돈 병원에 의사가 부재하여(베돈 병원을 개척한 커를 선교사 귀국 및 2대 원장 맥라렌 선교사의 프랑스 참전으로 공백) 진주를 오가며 협력하였다.
그러다가 1923년 진주 배돈병원 3대 원장으로 부임하였다. 통영의 진료소는 아쉽게도 폐원되고 건물은 교육 시설로 사용되었다. 그의 부임 이후 진주 베돈 병원에 환자는 나날이 증가하였다. 그는 안식년 기간 중 호주에서 모금 운동을 전개하여 수술대, 엑스레이 장비, 자동차를 가져왔다.
그는 진주에 거주하면서 인근 지역도 방문하였는데 거창 선교부에도 정기적으로 방문하여 어린이와 부인을 진단하고 돌보았다. 교육 선교에도 적극 협력하여 메인 부인은 유치원을 맡아 운영하였고, 주말에는 인근 마을 어린이를 가르치고 전도하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1938년 10월 그는 61세의 나이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병으로 인해 일본 요코하마 병원에서 차료를 받았으나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베돈 병원 수간호사였던 클라크는 그를 회고하면서 《겸손함과 행복한 성격의 소유자였고 유머가 많았다. 특히 병원 재정을 효과적으로 관리했다》고 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