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지로 보낸 답장
새 봄이 찾아왔다.
학생회 간부들만 참석하는 법회를 마치고도 아직 1시간을 더 기다려야 하는 토요일 지옥버스.
친구들과 강당 모퉁이를 돌아 나오는데 교법사 선생님 나무 아래 A선배가 서 있었다.
저기 00 오빠 아냐?
여기 웬일이지?
고등학생이 된 A선배,
지금 이 시각 읍내에 있거나 본가에 있거나 할 선배가 내 눈앞에 있다니,
순간 눈이 놀라 중력에서 벗어날 뻔하였다.
옆에 친구들은 선배의 등장을 두고 조잘조잘 궁금증을 캐고,
남자동기들은 선배와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지만 나는 아무 말 없이 본체만체 지나갔다.
그러니 한 친구가 느닷없이
"미경이의 높은 콧대 아무도 못 꺾지, 못 꺾어" 불쑥 혼잣말을 하였다.
"뭔 소리 하는 거야" (화들짝 놀라며)
"너는 네 콧대가 얼마나 높은 지 모르지?"
"알아, 내가 콧대 하나는 잘 섰지"
알면서도 모르는 척 콧대 자랑을 하였다.
'풍문을 들었나?'
'그럴 리 없어'
친구의 말이 괜스레 신경 쓰였다.
막차를 타고 귀가한 어느 날,
편지가 한통 와 있었다.
우리 집에 오는 편지 다 검열 대상인데 편지봉투가 온전하다. 그렇다는 것은........
보낸 사람이 여자 이름이라서 그냥 두었다 하셨다.
'누구지?'
편지를 열었다.
수려한 필체, 화려한 문장에 눈이 몽글몽글 일렁였다.
대답 없는 나를 두고 애 태우며 속절없이 보낸 지난 시간을 후회한다고,
눈에서 멀어지면 멈출 거라 생각했는데 여전히 내 생각에 방황하고 있다고,
나의 마음이 어떠하든 백지라도 보내주면 좋겠다고 하였다.
답장을 하기까지 고민이 많았다.
'그냥 모르는 척할까, 어떡하지?' 이불을 뒤집어쓰고 며칠밤을 뒤척였었다.
그 시절 나는 자와 가위를 들고 품행이 단정한 학생을 재단하고 있었다.
결국 모범생 틀에 갇혀 밀어내기를 하였다.
그럼에도 더 이상 선배가 힘들지 않았음 했었다.
'다시는 편지하지 마세요'라는 쪽지와 함께 백지를 부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