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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파꽈리 Jun 30. 2024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몇 달 전, 평소 들르는 어느 커뮤니티 사이트에 올라오는 글들을 보면서 요즘 상당한 인기를 누리고 있는 모양이구나 생각하며 지나쳤던 드라마가 있다. <눈물의 여왕>. 언젠가부터 흥행 보증 수표로 떠오른 김수현, 그리고 지금껏 여러 작품들에 얼굴을 내비쳤지만 딱히 홈런이라고 언급할 만큼의 히트를 친 적은 없는 김지원. 해당 드라마를 본 적이 없어서 이들이 어떤 시나리오 속에서 어느 정도의 열연을 펼쳤는지는 알 수 없지만, 드라마가 끝난 후 각종 광고를 비롯하여 여러 매스컴에 자주 오르내리는 배우 김지원의 모습을 보니, 정말 대단하긴 대단한 드라마였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하여 OTT를 통해 뒤늦게 이 드라마를 챙겨볼 마음까지는 없는데, 그럼에도 드라마 속 인상적인 대사가 하나 있어서 여기에 옮겨본다. 내가 직접 보고 들은 건 아니지만, 거기에 이런 대사가 나온 적 있다고 알려준 사람을 생각하고 공감하는 마음으로 가져와본다.


"내가 생각하는 사랑은, 행복한 걸 함께하면서 달콤한 말을 해주는 게 아니라 싫어서 죽을 것 같은 걸 함께 견뎌주는 거야. 어디에 도망가지 않고 옆에 있는 거."


울리히 벡(Ulrich Beck), 그리고 그의 부인 엘리자베트 벡 게른스하임(Elisabeth Beck-Gernsheim)이 함께 썼던 책 <사랑은 지독한, 그러나 너무나 정상적인 혼란>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사랑은 쾌락, 신뢰, 애정이며 이와 동시에 분명히 그와 정반대의 것, 즉 권태, 분노, 습관, 배신, 외로움, 위협, 절망 그리고 쓴웃음이기도 하다." 언젠가부터 누군가에게 호감이 생기고, 그러다 자꾸 보고 싶고, 자고 싶고, 너와 나 우리 주변의 모든 걸 공유하고 싶어 하는 게 전자의 경우라면, 시간이 흘러 어느덧 가슴 떨림이 사라지고 무료하며, 상대의 별것 아닌 행동에도 화가 나고, 고난의 순간에 관계를 포기하고 싶고, 함께 있음으로 외로움이 더 부각되는 것 등등이 바로 후자의 경우가 아닐까 싶다.


사랑은 서로 간에 별 걱정 없는 순탄한 관계 속에서 상대와 항상 좋은 것을 주고받는 상황을 연출함과 동시에, 또 한편으로는 그런 행복했던 날들을 한꺼번에 포기할 수 있게도 만드는 온갖 부정적 감정의 부산물들을 포괄하고 있기도 하다는 것. 그러니까 사랑이란 즐겁게 누리는 것과 동시에 아프게 견디는 것이 필요한 영역이라 할 수 있겠다. 행복하게 누렸던 기억의 힘으로 상대방의 고통을 같이 견딜 수 있다면 언젠가 또다시 뫼비우스의 띠처럼 서로 간 신뢰를 바탕으로 함께 즐겁게 누릴 수 있다는 것. 그렇듯 사랑이란 우리에게 주어지는 스펙트럼이 넓은 향유와 인내의 본거지라는 것. 그러나 누릴 수 없다면, 견딜 수 없다면 헤어지는 것, 떠나는 것, 그리하여 결국 사랑은 아닌 것.


그런데 한편으로 이런 기조의 사랑은 너무 이상적인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상식'이라는 단어가 있지만, 각자 나름대로 상대방에겐 결코 이해되지 않고 공유되지 않는 대척점에 상식의 의미를 두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듯이, 사랑 또한 사람마다 각기 다른 정의로 현실 속에서 구체화되는 게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일 수 있기 때문이다. 쉽게 만나고 쉽게 헤어지는 것을 사랑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고, 누군가는 사랑이라고 말하지만 그걸 받아들이는 사람의 입장에선 사랑이 아닐 수도 있고, 혹 누군가 '진정한'이라는 수식어를 붙여 피를 토하듯 사랑을 이야기하지만 애석하게도 그의 진정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그저 의미 없는 하찮은 욕망으로 치부될 수도 있는 것이며, 한때 사랑이라 생각했고 그것을 진정한 사랑이라 여겼던 순간도 있었으나 그 믿음이 깨지는 것 또한 한순간임을 허망하게 경험하는 때도 있으니까.


그래서 이 모든 상황을 아우르는 수고를 감수하면서 사랑에 떳떳할 수 있기 위해서 우리는 이런 말을 하는 것일까. "사랑은 해석의 여지가 참 많아요."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상태에서 과도한 도파민의 분비에 굴복해 고백을 해도 사랑이라 말할 수 있는 가능성, 그리고 드라마에 나왔던 대사처럼 내가 죽을 것 같은 고통에 직면했을 때 상대가 도망가지 않고 그 괴로움을 함께 견뎌주어야만 비로소 사랑이라 일컬을 수 있는 당위성. 상대방에 대한 사유의 너비와 깊이가 얼마만큼이어야 사랑이라 이름 붙일 수 있는지는 알 길이 없으나, 최소한 그런 가능성과 당위 사이를 오가며 이것만이 혹은 그것만이 사랑인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 자신에게 납득시킬 수 있다면 그렇게 스스로에게 조금 더 너그러워질 수 있다면, 애초에 순도 100%의 완벽한 사랑이란 것은 그 의미도 실체도 존재하지 않을 수 있다는 회의에서 오는 허무함을 감당해 낼 수 있을지 모른다.


"내가 왜 좋아요?"


사랑이 뭘까? 사랑한다면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문득 떠올랐던 질문. 왜 사랑하게 된 거야? 무슨 이유로 좋아하게 된 거야? 십 년도 더 된 과거 어느 날 밤. 아직도 가끔씩 그때 그 순간이 떠오르곤 한다. 그 사람이 아닌 그 물음이 생각나곤 한다. 서울에서 생활하던 중 알게 되었고,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사람을 떠나, 아니, 정확히 말하면 서울을 떠나 나는 고향으로 내려가게 되었다. 서울과 고향 사이의 거리. 그 간극만큼이나 그 사람을 만나는 일은 심적으로도 점점 더 요원한 일이 되어가는 것 같았다. 고향에서의 생활이 아직 여의치 않았던 어느 날, 그때껏 데이트다운 데이트 한번 해보지 못했던 상황에서 수화기를 통해 들려온 그 사람의 질문은 참 난감한 것이었다. 왜 나는 그 사람을 좋아하는가. 좋아하는, 혹은 사랑하는 감정을 두고 그 이유를 생각해 본 기억이 없는 내 인생에서 쉬이 해결할 수 없는 난제를 만난 것 같아 아득한 기분이 들었다.


그 짧디 짧은 질문에 선뜻 대답을 하지 못하고 한동안 머뭇거리기만 했던 건, 기본적으로 그때 당시의 감정이 아직은 호감 정도에 머무르고 있었던 탓일지도 모르겠다. 그 사람을 알게 된 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주로 어떤 생각을 하며 어떤 영화 어떤 음식 어떤 노래를 좋아하는지 등등 공유된 경험을 통해 알 수 있는 정보가 턱없이 부족한 상황에서 내 마음을 끌어당긴 것들에 대한 인상평을 근거로 해당 물음에 답을 하는 일이란 애초부터 무리였을 것이다. 예뻐서 좋아, 분위기가 좋아, 이런 상투적인 답변을 바라고 했던 질문은 아니었을 것이기에 답을 내놓아야 하는 내 입장에서 어색한 침묵의 시간이 점점 더 길어졌던 건 어떻게 보면 당연한 결과. 그러나 그 사람을 만나기 전 내 과거의 이력을 들춰보면, 혹 만남의 시간이 충분했다 한들 당시 그 질문에 대해 내가 적절한 대답을 할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도 든다. 왜 나를 좋아하는지 상대방에게 물어본 기억이 없는 내가, 입장을 바꿔 무슨 이유로 상대방을 좋아하는지 스스로에게 따져보는 건 그다지 자연스러운 일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왜 좋아하느냐는 질문에 뒤이어 연상되었던 건 며칠 전 읽었던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사실 이 책은 20년 전쯤 이미 한번 들춰본 적이 있고, 그 당시 나름대로 인상적이었던 부분을 발췌하여 내 홈페이지 게시판에다 옮겨 놓기도 했었는데, 친하게 지냈던 한 선배는 내용에는 별 관심이 없다는 듯 작가의 이름을 가지고 가벼운 농담을 풀어놓았었다.


'알랭 드 보통'에 필적하는 넘이 있지. '알랭 드 평범'이라구. 그 친구보다 똑똑한 넘은 '알랭 드 우수', 못한 넘은 '알랭 드 열등', 그 친구보다 긴 넘은 '알랭 드 롱', 짧은 넘은 '알랭 드 숏', 그 친구가 풍기는 향수는 '알랑방구'

* 알랭 들롱: 프랑스 미남 배우. 현 88세. 한때 잘생긴 남자를 언급할 때면 우선순위에서 빠지지 않고 여러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던 인물.


재미있게 읽었던 이 책의 저자, 그 이름을 두고 농담을 일삼다니. 웃어야 할지, 아니면 핀잔을 줘야 할지 판단을 내리기 힘들었던 잠깐의 시간이 지나고, 나 또한 그 밑에다가 짧은 댓글을 달았었다. 요즘 들어 회사생활이 힘드냐고, 왜 이렇게 썰렁해졌냐고. 그 당시 용어로 말하자면 허무 개그, 요즘 식 표현으로는 아재 개그를 날렸던 선배에게 이 정도면 아주 준수한 편에 속하는 대꾸가 아니었을까 싶다.


알랭 드 보통, 스위스 태생 20대 중반의 한 철학 전공자가 적재적소에 여러 학자들의 말을 인용하면서 자신이 겪었던 여러 에피소드를 가미해 사랑에 관련한 이야기를 수필 형식으로 풀어놓고 있는 책. 12월 초 어느 날, 그는 파리에서 영국으로 돌아가는 비행기 안에서 우연히 옆자리에 앉게 된 한 여자에게 첫눈에 반해 사랑에 빠진 후(혹은 그렇게 믿은 후), 그 만남에 온갖 운명론적 필연성을 쏟아붓는 것을 시작으로 자신만의 특별했던 사랑을 소개해놓고 있다. 부연하자면 그 사랑의 유통기간은 딱 1년이었다. 물론 첫 만남 이후 몇 개월 지나 그 사랑이 덜컹거리기 시작했음을 감지했던 순간부터 의미 없는 만남을 이어간 기간까지 고려하면 1년에서 몇 개월을 더 깎는 게 맞겠지만. 글을 읽어가다 보면 때론 쓸데없이 현학적이거나 다소 과장된 표현이 눈에 거슬릴 수도 있고, 뭔가 진지한 서술을 하는 과정임에도 그 안에 심어놓은 번뜩이는 재치와 위트에 색다른 즐거움을 맛볼 수도 있다.


이 책은 영국에서는 <Essays in Love>라는 제목으로, 미국에서는 <On Love>라는 제목으로 간행되었다고 한다. 사랑에 관한 수필, 사랑에 대하여. 빈곤해서 더욱더 치열한 국내 출판 시장에서 이 같은 제목으로 승부를 걸기엔 적지 않은 부담을 느꼈는지, 역자와 해당 출판사에서는 완전히 새로운 제목을 선택해 출간을 하기에 이르렀다. 네이밍 효과 때문이었는지, 책 속에 담긴 내용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이 둘의 결합으로 만들어진 시너지 효과 때문이었는지 2002년 초판이 발행된 이후 2022년에는 70만 부 판매 기념으로 표지를 바꿔 재출간이 되기까지 했으니 아무튼 성공은 이룬 셈이다. 그러나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모르긴 몰라도 이 책의 저자 알랭 드 보통은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를 제목으로 정한 걸 그다지 달가워하지는 않았을 거라는 것. 책 속에 나와있듯, 최소한 그는 연인에게 그런 질문을 하는 건 예의가 아니라 생각하는 사람이었으니까. 그래서인지도 모르겠다,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를 읽었지만 정작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지 더더욱 모르겠는 느낌을 갖게 된 것이.


5. 상대방에게 무엇 때문에 나를 사랑하게 되었느냐고 묻지 않는 것은 예의에 속한다. 개인적인 바람을 이야기하자면, 어떤 면 때문에 사랑받는 것이 아니라 나라는 사실 때문에 사랑받는 것이다. 속성이나 특질을 넘어선 존재론적 지위 때문에 사랑을 받는 것이다. 사랑 안에 들어가 있는 사람들은 부유함 속에서 사는 사람들처럼 애정 / 소유를 얻고 유지하는 수단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는 금기를 지켜야 한다. 사랑에서건 돈에서건 오직 빈곤만이 체제에 의문을 품게 한다. 그래서 아마 연인들은 위대한 혁명가가 되지 못하는 것 같다.

6. 어느 날 거리에서 불행한 여자 옆을 지나다가 클로이가 나에게 이렇게 물었다. "내가 저 여자처럼 얼굴에 커다란 점이 있었어도 나를 사랑했을 것 같아?" 그 질문에는 "그렇다"는 대답에 대한 갈망이 숨어 있다. 몸이라는 세속적인 표면,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비참하게도 어떻게 바꾸어볼 수 없는 표면보다 높은 곳에 사랑을 놓아달라는 요구이다. 내가 너를 사랑하는 것은 너의 재치나 재능이나 아름다움 때문이 아니라, 아무런 조건 없이 네가 너이기 때문이다. 내가 너를 사랑하는 것은 너의 눈 색깔이나 다리의 길이나 수표책의 두께 때문이 아니라 네 영혼의 깊은 곳의 너 자신 때문이다. 연인이 외적 자산을 벗어버린 나를 좋아하고, 무엇을 이루었느냐에 관계없이 우리 존재의 본질을 평가해 주고, 흔히 부모와 자식 사이에 존재한다고 말하는 무조건적인 사랑을 되풀이해 주기를 바라는 갈망이다. (p 190~191)


어쨌든 책의 말미에 이르러 저자가 그토록 사랑했던 클로이는, 그와 같은 업종에 종사했던 친한 친구의 품으로 떠난다. 원치 않은 이별도 엿같은데 심지어 자신의 친구에게로? 극한의 고통이었다. 진정 자신의 삶의 모든 것이었던 클로이. 그녀 없이는 삶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선택할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은 지상의 삶을 끝내는 것. 그리고 자발적으로 끊어낸 자신의 삶의 결과를 그들에게 보여주는 것. 그것이 바로 친구이자 연인이었던 자신을 배신한 그들에게 통쾌하게 복수하는 것. 많은 초고를 거쳐 완성한 유서까지 남기고 마침내 자기 파괴의 치명적인 심정이 되어 통째로 삼킨 알약들. 그래서 죽었을까, 살았을까. 이야기는 계속 이어진다. 대책 없는 사랑의 고통으로 비관적이 되었다는 저자는 다시는 사랑에 빠지지 않겠다는 금욕주의를 결심하지만, 어느 날 디너파티에서 한 여자를 만나고 난 후 그 언젠가 클로이를 만났을 때처럼 또다시 충격적인 사랑에 빠지게 된다. 그 여자의 모습이 자신에게 금욕주의적 접근방법의 한계를 일깨워주었다나 뭐래나. 교묘하게 설득력을 보이는 저자의 자기변호 기술에 실실 웃으며 마지막 책장을 덮었다.


근 20년 만에 다시 읽었던 책이라 그런지 대부분의 내용이 생소했지만, 한 가지 또렷하게 기억이 났던, 게다가 이번에 읽었을 때도 그 당시와 똑같이 가장 인상적이었던 대목이 있어 여기에 옮겨놓는다. 함께 지내면서 서로에게 익숙해질수록 두 사람이 나누는 언어는 그 어떤 특별한 의미를 갖게 되는데, 그렇듯 한번 공유된 경험이 반복되고 축적될수록 그들 사이 관계의 역사는 깊어지며 친밀성 또한 가중되게 된다. 비단 이것은 사랑하는 이들 사이에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동일한 관심사를 가지고 지속적으로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픈 사람들 사이에서도 충분히 적용될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닐까 싶다. 일전에 뉴진스의 노래 "Ditto"와 함께 언급한 적이 있었던 영화 <사랑과 영혼>. 영혼으로 나타난 샘의 존재를 믿지 않았던 몰리. 그 상황에서 뜬금없이 어서 빨리 Ditto라는 단어를 말하라고 채근하던 샘을 오다 매는 이해하지 못했다. 어떻게 해서 그 짧은 한 단어를 통해 몰리가 샘을 알아보게 된 것인지 납득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Ditto라는 단어는 샘과 몰리 사이에서 새롭게 창조된 친숙한 언어, 바로 그들만의 라이트모티프(Leitmotiv)였으므로.


12. 몇 달 뒤 우리는 브릭 레인의 베이글 가게에 있었는데, 우리 옆에 줄 서 있던 핀스트라이프 양복을 입은 우아한 남자가 클로이에게 말없이 구깃구깃한 메모지를 건넸다. 종이에는 갈겨쓴 커다란 글씨로 "사랑합니다"라고 적혀 있었다. 클로이는 종이를 펼치고는 침을 꿀꺽 삼키며 그 내용을 읽더니, 메모를 준 남자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남자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핀스트라이프 양복을 입은 사람답게 근엄한 표정으로 창밖 거리를 내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클로이도 똑같이 아무 일도 없었던 것 같은 표정으로 메모지를 접어 호주머니에 넣었다. 이 괴상한 사건은 시체 사건처럼 음침하지는 않았지만 그 사건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라이트모티프(악극에서 되풀이되어 나타나는 중심 악상 / 역주)가 되어, 우리는 우리의 이야기에서 그 사건을 끊임없이 다시 불러내곤 했다. 우리는 식당에서 가끔 그때 그 베이글 가게의 남자와 똑같이 수수께끼 같은 분위기를 풍기며 말없이 메모를 건네곤 했다. 그러나 그 안에는 '소금 좀 건네줘' 같은 말만 적혀 있을 뿐이었다. 속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은 우리가 갑자기 깔깔대는 모습을 보고 괴상하게 여겼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라이트모티프의 핵심이다. 다른 사람들은 그 기초가 되는 장면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당사자들이 계속 참조하는 사건을 이해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한 자기 참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행동이 옆줄에 선 사람들을 미치게 만드는 것도 놀랄 일은 아니다.

(중략)

14. 그러한 일화들 자체가 흥미 있는 것은 아니다. 대부분 클로이와 나만이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 일화들과 관련된 부수적인 연상들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라이트모티프들은 중요했다. 그것이 우리에게 우리가 서로에게 남이 아니라는 느낌을 주었고, 일들을 함께 겪어가며 산다는 느낌을 주었으며, 함께 끌어낸 의미를 기억하고 있다는 느낌을 주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라이트모티프들이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고 해도, 그것은 접착제 역할을 했다. 그 라이트모티프들이 만들어낸 친밀성의 언어는 클로이와 내가 둘이서 [정글을 뚫고 나가거나, 용을 죽이거나, 심지어 아파트를 함께 쓰지 않고서도] 하나의 세계 비슷한 것을 창조했다는 사실을 기억나게 해 주었던 것이다. (p139~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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