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아홍 Mar 16. 2024

소요유하다

「루트」 위에서 산책을 즐기다

"소요유 합시다."

인생 나눔 교실을 듣고 있던 어느 날, 선생님이 던진 화두다.


'소요유'라는 것을 알지 못했던 나의 뇌는 '소여유'라고 잘못 번역했다. 작은 여유를 갖자는 이야기인 줄 알았다. 를 나누는 과정에서 문맥이 맞지 않음을 깨닫고 나의 무지를 인정하고 검색의 힘을 빌렸다. 록창 장자의 소요유는 글자 함께 '소풍 간다, 멀리 간다, 노닌다' 뜻이라고 알려준다. 아~ 무식쟁이. 무식함에 잠시 부끄러웠지만 멋진 단어를 알게 된 것에 기뻤다.


- 逍(소): 노닐다, 거닐다, 편안하고 한가롭다

- 遙(요): 멀다, 거닐다

- 遊(유): 놀다, 즐기다

 

장자의 사상은 모르겠고, '편안하고 한가롭게 거닐며 즐긴다'는 한자 뜻 그대로에서  순간 바로 단번에 떠오르는 것이 있었으니, 바로 포켓몬고의 루트 기능이다. 갓 출시된 기능이라 열심히 해보던 때였다. 그것과 어울리는 단어를 알게 된 기쁨에 환한 미소를 띠었다가, 깊이 있는 주제에 이런 가벼운 생각을 하는 것이 웃겨서 피식하기도 했다.


나이언틱이란 회사는 '사람들이 바깥 세계를 탐험하게 만들자'라는 분명한 철학을 가지고 포켓몬고를 내놓다. 방구석 게임 그만하고 밖으로 나가라. 밖에 나가서 야생에 나온 포켓몬을 잡게 하고, 체육관을 점령한 전설의 포켓몬을 여러 사람들과 함께 쓰러뜨리게 하고, 다양한 미션으로 집순이인 나를 밖으로 나가게 했다. 신나게 돌아다녔다. 뛰어다녔다. 이사 온 낯선 동네를 포켓몬고 덕분에 탐험하며 알아갔다. 게임의 순기능을 몸소 실천했다. 몇 년을..


코로나로 180도 달라졌다.

밖으로 나가지 못하는 상황이 오다 보니 나이언틱도 그들의 철학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나가지 않아도, 걷지 않아도, 편하게 집에 앉아서 플레이를 할 수 있게 되었다. 3년의 시간은 길고도 길었다. 엔데믹 선언으로 바깥세상에의 자유를 얻었으나, 편함에 익숙해진 나는 굳이 힘들게 나가려 하지 않고 힘들 걸으려 하지 않게 되었다. 다시 집순이가 된 것이다. 밖으로 나가 걷게 하는 게임이 집안에 앉아 하게임이 되었다.


나이언틱은 유저들이 집에만 있는 것이 못마땅했나 보다. 어떻게든 유저들을 다시 밖으로 나가게 하고 싶었나 보다. 우리나라에 엔데믹이 선언되고 얼마 있지 않아 루트라는 새로운 기능이 런칭됐다. 


"이런 길이 있었어?"

다른 트레이너들이 만든 길을 따라 걸으며 새로운 곳을 탐색하고, 나만의 루트를 만들어 트레이너들도 걸어보라고 공유하고. 사람들이 바깥 세계를 탐험하게 만드는 철학을 가진 나이언틱. 게임 전반에 해당 철학이 은근히 담겨있지만, 루트 기능에 이 철학을 대놓고 집약적으로 구현한 것 같다.


오늘은 어떤 새로운 길이 생겨있나? 오늘은 어떤 루트를 걸어볼까? 평상시 내가 걷지 않던 길을 걸으며, 가지 않던 곳에 도착하며 이런 경로로 걷는 것도 좋구나라며 새로운 길을 발견한다.


내가 자주 다니는 산책길도 루트로 만들고, 이런 산책길을 만들어보 어떨까? 우리 동네에 이런 곳도 있다며 소개하고픈 장소를 루트로 만들면 어떨까? 여기도 걸어보고 저기도 걸어보며 새로운 길을 만든다.


「루트」야말로 편안하고 한가롭게 거닐며 즐기는 것이 아닌가. 밖으로 나가자. 「루트」 위에서 산책을 즐기자. 소요유하자.

이전 08화 엽서로 떠나는 방구석 세계여행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