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간의 유럽여행의 마지막 날, 파리 공항에서 이 글을 쓴다. 이번 여행은 그 어느 여행과도 다른 여행이었다. 전형적인 한국인 같지 않은 여행이었다. 한 번은 에어비엔비 호스트가 여행지를 줄줄이 추천하고서는 너는 한국인이니까 짧은 기간 내에 다 소화가능하다고 한 적이 있었다. 나도 그렇게 빡빡하게 여행을 할 때가 있었는데, 이번에는 극 J인 내가 일부러 여유롭게 여행을 했다. 얼마나 여유로웠냐 하면, 28일간 영화 10편을 보았고 책을 다섯 권을 읽었으며 '나는 솔로' 16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정주행 했다. 평소보다 수면 시간도 한 시간 늘었다. 남편에게 진지하게 팁을 얻어 난생처음으로 휘파람 불기에도 성공했다.
올해 일곱 개의 나라를 여행했고 이번 여행은 어느 때보다 길었기에 살고 간다는 느낌으로 편안하게 여행을 하고 싶었다. 내가 진짜 하고 싶은 것을 하면서 하루하루를 보내자는 이 마음가짐을 유지하기가 쉽지는 않았다. 네이버에서 여행 블로그 후기를 읽다 보면 나도 그 맛집과 명소에 가서 셀피를 찍어야 할 것 같았다. 돈과 시간을 투자해서 온 건데 낭비하는 게 아닐까 의구심이 들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우리 여행의 목적은 남들이 뭐라 하든 우리가 진짜 하고 싶은걸 마음껏 하고 충전하고 오는 거라고 되새겼다.
그렇게 여행한 후 가장 사랑했던 순간들을 추려보았다.
1. 바르셀로나의 Ciutadella 공원에서 나무 사이에 해먹을 설치하고 낮잠을 자고 책을 읽을 때. 그때 희미하게 들리던 음악소리와 새의 지저귐, 고개를 내밀면 보이던 게임하고 있는 남편의 뒤통수, 호수 위에서 노를 젓던 사람들이 생각난다.
2. 공원 변두리에 사는 앵무새(정확히는 monk parakeets)들이 내 팔에 날아와 앉아 해바라기씨를 야무지게 먹던 순간. 낮잠을 자고 기분 좋게 걸어 나오는데 한 아저씨가 앵무새들에게 해바라기씨를 먹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신기해서 구경하니 너그럽게 해바라기씨 한 줌을 건네주셨다. 처음 앵무새들이 내 팔에 앉을 때를 남편이 영상으로 찍었는데, 내 얼굴에서 경이로움, 두려움, 두려움을 보이지 않으려는 자존심, 혼돈, 기쁨이 드러났다. 내가 카메라 앞에서 그렇게 다양한 표정을 보일 수 있는지 몰랐다.
3. 수채화 그리기 모임에서 독일, 잉글랜드에서 이사 온 로컬들과 얘기하며 공감대를 형성했을 때. 그들도 바르셀로나에서 외국인(expat)으로 거주하며 여러 친구 그룹을 거쳐갔고, 이를 인생의 자연스러운 과정으로 받아들였다. 그들도 성인이 된 후 이게 인생의 전부이지 않길 바라며 고향을 떠났고, 지금도 자기 커리어를 탐색하고 있었다. 로컬들과 얘기할 때 더 생생하게 그 도시의 현재를 알 수 있었다.
4. San Sebastián의 La Perla Centro Talaso Sport라는 스파의 따뜻한 물속에서 창문너머로 바다를 바라볼 때.
5. 바르셀로나 해변가에서 물고기와 같이 수영할 때.
6. 마드리드 호텔바에서 Alex Cuba가 재즈 공연 중에 관객과 농담을 주고받으며 떼창을 할 때. 돌아오며 그 노래들을 남편과 흥얼거릴 때.
7. San Sebastián 영화제에서 영화가 시작할 때마다 2000명에 가까운 관객들과 노래박자에 맞춰 손뼉 칠 때.
막상 추리니 공통 주제가 보였다. 물과 동물을 포함한 자연, 음악과 영화, 이에 함께 몰입하는 사람들. 시간적 여유를 갖고 이것들에 온전히 빠져들기. 여행자들이 흔히 가는 관광지도 그 나름대로 재밌었지만, 내가 가장 사랑했던 순간은 결국 내가 평소에도 좋아하던 걸 할 때 찾아왔다.
사실 유럽이 아니더라도 내가 이사할 뉴저지에서도 이런 순간들을 충분히 찾을 수 있다. 여행할 때처럼 그 지역을 제대로 느끼고 오겠다는 마음으로 사는 곳을 탐방해 보면 말이다. 해먹을 설치할 공원과 캠핑장도, 관객과 소통하는 소규모 라이브 공연도, 영화제와 인디 영화관도 찾아보면 많을 것이다. 일상을 살다 보면 현재 사는 곳을 알아보는 데 초점이 가지 않았을 뿐이다.
행복한 순간을 되새겨보니 이번에 이사하는 주에서 위와 같은 순간을 만들고 싶어 진다. 일주일에 한 번이라도 내가 사는 곳을 여행한다는 생각으로 탐방하는 건 어떨까. 평소에 계속 즐기는 게 있으면 새로 여행하는 장소에서 그걸 할 때 더 즐거우니 말이다.
이번 여행에서 추천지를 다 가기보단, 쳐낼 건 쳐내고 우리만의 스타일로, 우리가 하고 싶은 것에 집중하기를 잘했다는 확신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