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과 친구 그 사이
캘리포니아에 사는 미국인 친구와 한 시간 동안 통화를 하다가 친구관계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친구는 사교성도 좋고 주변에 친구도 많은데 왠지 모르게 적적해하고 있었다. 왜 그런지 물어보니, 한 달에 한 번 정도 만나는 친구관계는 자신이 바라는 관계가 아니라고 말했다. 그보다는 평일에 저녁도 같이 먹고 빨래도 같이 하는 그런 커뮤니티를 갖고 싶다는 것이다. 실제로 자신의 친구들이 미네소타에서 그렇게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며 살고 있고 조만간 그곳으로 이사를 갈 예정이라고 했다.
친구의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아하' 하고 깨달았다. 내가 바라는 것도 가족과 친구의 그 중간 어디 즈음이었다. 취재를 하다 보면 자신이 사랑하는 커뮤니티를 만들기 위해 애쓰는 사람들을 종종 만난다. 그때는 커뮤니티라는 게 어떤 느낌인지 의아했다. 지금에서야 내 삶에서 그 커뮤니티가 얼마나 큰 의미를 갖는지 느꼈다. 가족도, 친구도 여전히 중요하다. 하지만 그 중간을 간과하기가 쉽다.
내가 가족을 선택하지는 않았지만 우리는 주기적으로 만나 유대를 쌓고 조건 없이 서로를 응원해 준다. 하지만 몇 명을 제외하면 지금 고민하고 좋아하는 것을 털어놓는 사이는 아니다. 털어놓아도 윗 세대와는 친구처럼 그 생각과 감정을 나누기가 힘들다. 배고프다고 말하면 친구는 자신도 배고프다고 무엇을 먹으러 갈까 묻는다면, 가족의 어르신은 몸이 아픈 것은 아닌지 걱정하는 식이다. 사랑에서 나오는 생각과 말이겠지만 그 걱정을 덜고 싶어 꼭 필요한 이야기만 나눈다. 고민을 함께 나누기보다는 최종 결정만 얘기한다. 적어도 나의 가족관계는 그렇다.
그렇다면 친구와 커뮤니티의 차이는 뭘까. 친구와는 한 두 달에 한 번씩 만나 인생의 중요한 부분을 공유한다면, 커뮤니티와는 일상을 함께 소화한다. 3개월 반 동안 여섯 개 국가를 여행하고 돌아오니 일주일에 한두 번씩 친구들을 만나 회포를 풀고 있다. 친구들은 다녀온 여행에 관해 묻고 나는 친구들의 이직, 임신, 출산 이야기를 듣는다. 여러 모임을 다니다 보면 그 이야기가 반복된다. 내가 외향인이 맞나 의구심이 들 정도로 가끔은 모임 후에 더 피곤하기도 하다.
그 의구심은 커뮤니티라는 개념을 구체화하고 풀렸다. 정현종 시인이 말한 ‘사람들 사이의 섬’에 어떻게 갈지 이제 그림은 그릴 수 있겠다. 일주일에 세 번 우리 집에 찾아와 같이 운동을 하는 케빈에게서 확신이 섰다. 케빈은 약사라 출퇴근 시간이 불규칙하다. 한국 약사 와는 다르게 어쩔 때는 밤 10시 즈음에서야 일이 끝나기도 한다. 아무리 늦더라도, 몸을 키우겠다는 공동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 문을 두드린다. 몇 시인지에 관계없이 남편과 케빈은 단백질 가루와 섬유질이 가득한 시리얼, 과일, 요거트를 섞어 먹는다. 우리 집 냉장고를 축내는 것 같아 미안했는지 케빈은 종종 중독성 있게 맛있는 음식을 가져다준다. 얼마 전에는 직접 요리한 닭갈비를 가져다주었다.
케빈 부부와의 관계는 내가 꿈꾸는 커뮤니티의 단서를 준다. 주중에 보다 보니 평소에 하는 생각과 행동을 공유한다. 케빈네가 어제 밤늦게까지 한 게임, 주말에 본 드라마에 대해 얘기하고 떠나면 어느새 우리도 침대에 누워 그들의 콘텐츠를 구경하고 있다. 커리어 전환에 대해 얘기를 나누고 나면 어느새 내 결정에 그들의 관점도 고려해 본다. 이전보다 나의 세계가 넓어지는 느낌이다.
노력한다면 오랜만에 만나는 친구들과도 이를 이야기할 수 있다. 하지만, 보통은 굵직한 이야기만 해도 헤어질 시간일 때가 많다. 일상 속의 생각은 시간이 지나면 잊힐 때가 많고 가끔은 내가 그런 생각과 느낌을 갖고 있는지도 모르고 지나간다. 하지만 가까이 살고, 일이 끝나고 나서도 만날만큼 소중한 그 무언가를 - 지금은 운동이라는 공동의 목표 - 나누고 있기에 자주 만나다 보면 그 소소한 이야기도 나누게 된다.
이 커뮤니티를 확장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1) 먹고사는 문제 외에도 그만큼 중요한 공동의 목표나 관심사를 갖는 것 2) 이를 위해 주중에도 시간을 내는 것 3) 주중에 만날 수 있을 만큼 가까이 사는 것 — 이 모두가 갖춰져야 하기 때문이다. 어려운 관계이지만 확실히 더 자주 행복을 느끼게 해준다.
돌아 보낼 락앤락 용기에 김치찌개를 담아 보내려 한다. 어제 점심을 함께 먹다가 케빈은 탄수화물을, 그녀는 국을 사랑한다는 걸 알게 되어서다. 그들의 닭갈비 덕분에 내가 감탄사를 연발했듯이 나도 그들의 일상에 감탄사를 더해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