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험생 시절 내게 미래는 가슴 설레는 환상 같았다. 디데이를 세어가며 수능을 치르고 나면 하고 싶은 것들을 상상했다. 그중 하나는 성당 제대 옆에 서있는 저 중년의 아저씨처럼 통쾌하게 통기타를 치며 스스럼없이 노래를 부르는 것이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잠을 아껴가며 공부를 하고 일요일에는 자전거를 타고 친구와 성당에 갔다. 차들이 달리는 터널을 지나치며 20분 넘게 페달을 밟아야 갈 수 있는 성당이었는데도, 나는 굳이 그 성당에 갔다. 초등학교 때부터 아빠, 오빠, 동생까지 온 가족이 많은 시간을 보낸 성당이었기 때문에 그곳에 가면 마음이 편안했다. 정말 하느님이라는 게 있을까 의구심을 품고 있었지만 이 질문은 수능이 끝나고 답을 하기로 했다. 당장은 점수에 대한 불안함을 달래주고 내가 통제할 수 없는 부분에 대한 행운을 빌 누군가가 필요했다.
성체를 모실 때 흐르는 피아노 반주에서는 평온함을, 마지막에 힘차게 부르는 통기타 연주에서는 희열을 느꼈다. 한 번은 곡이 너무 인상 깊어 용기를 내서 무슨 곡인지 묻고 악보까지 받기도 했다. 언젠가는 나도 저렇게 기타를 치며 노래를 하겠다고 다짐했다. 그렇게 매주 밴드 연주를 보고 들은 덕분에, 밴드의 일원으로 음악을 즐기고 누군가에게 감동을 주는 것은 내 버킷리스트에 올랐다.
대학에 가서도 혼자서 기타 연습을 하고 유치원 때부터 배웠던 피아노를 연습했지만, 밴드에 가입하는 것은 어쩐지 우선순위에서 밀려났다. 언젠가는 하고 싶은 일이지만, 미래에 대한 준비가 앞섰다. 진로탐색과 독서토론동아리, 스피치동아리, 해외인턴십, 영어공부를 하느라 취미인 음악은 시간이 빌 때만 연주했다. 그렇게 어느덧 삼십 대에 접어들었고 지금이 아니면 평생 밴드에서 연주를 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언가에 빠지려면 푹 빠질만한 시간이 있어야 하는데, 다시 풀타임으로 취직을 하고 잠재적으로 아이를 갖는다면 음악은 다시 우선순위에서 밀려날 게 뻔했다.
내 기억 속의 엄마는 이 추측이 맞다고 말한다. 엄마 역시 음악을 무척이나 사랑하셨던 것 같다. 겨울에도 엄마는 베란다 창문을 열고 클래식 CD를 틀며 하루를 시작하셨다. 클래식 음악과 함께 흐르던 차가운 공기가 내 잠을 깨우곤 했다. 엄마는 오빠와 나를 데리고 동경하던 기타리스트 공연에 가셨고, 그 당시에 100만 원이 넘는 클래식기타를 사셨다. 지금도 그 기타는 기타보다 무거운 하드케이스에 고이 담겨있다. 하지만 그 기타를 곡 로망스 이상으로 탁월하게 치신 못하셨던 것 같다. 엄마가 기타를 연습하려 하면 오빠와 나는 엄마의 관심을 받고 싶어 기타를 뺏으려 했다. 사진 속의 오빠와 나는 기타를 잡고 있는 엄마의 등과 무릎에 앉아있다.
아이를 낳은 친구 몇 명은 아이를 낳으려면 빨리 낳으라고, 늦게 낳으면 몸이 힘들다고 말한다. 좋은 의도에서 한 말이겠지만, 이는 나를 설득하지 못한다. 나이가 들수록 내 머리와 몸이 전보다 확실히 굳어간다고 느낀다. 무언가를 배웠을 때 그걸 내 것으로 만들어가는 데 더 오랜 시간이 걸린다. 바로 그렇기에 간절히 원하는 게 있다면 아이를 낳기 전에 그것부터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중에는 시작을 해도 목표한 만큼 탁월해지고 즐길 시간과 에너지가 줄어들기 때문이다. 가령, 이모부는 퇴직 후에 피아노를 배우셨다. 매일 두세 시간씩 연습을 하신다. 그 열정을 응원하고 존경하지만, 밴드와 함께 공연을 하고 작사, 작곡을 하기는 힘들 것이다. 언젠가는 재즈바에서 즉흥연주를 하고, 작사 작곡을 하고, 내 밴드와 함께 연주하는 기쁨을 느끼고 싶다면 평생 하고 싶은 것을 먼저 시작하는 게 맞다고 생각한다. 아이를 갖는 것은 늦출 수 있을 대로 늦추면서 말이다.
그렇게 프리랜서로 살아가는 참에, 일이 별로 없는 시즌인 틈을 타서 지금이야말로 음악에 빠져도 된다고 다독였다. 용기를 내서 밴드에 들어갔고, 악보를 봐야만 치던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해 피아노 반주를 배우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