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아빠에게서 카카오톡 메시지가 왔다. 동생도, 아빠도 코로나 양성이 떴다는 것이다. 2년 전 미국에서 내 결혼식을 하고 온 가족이 코로나에 걸렸을 때는 같이 맛있는 음식이라도 해 먹고 마스크를 쓰고 공터를 산책할 수라도 있었다. 예정대로 캐나다로 가족 여행을 가지는 못 했지만 함께 시간을 보냈으니 그걸로 만족했다. 이번에는 멀리 있으니 푹 쉬라는 말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이틀 후, 남편이 출장을 간 사이 나도 온몸을 얻어맞은 듯 아프기 시작했다. 아무것도 먹고 싶지도, 하고 싶지도 않았다. 잠을 잘 수도 없었다. 혼자일 때 아프니 힘이 들어 퇴근 중인 남편에게 전화를 걸어 칭얼거렸다. 착한 남편은 어린아이 같이 구는 나를 다 받아주었다. 장시간 운전을 하고 피곤할 텐데도, 수시로 체온 확인을 하고, 꿈에 나와서 먹고 싶다고 하니 케이크를 사다 주었다. 유일하게 먹고 싶은 음식이라고 해서 참치 Poke Bowl을 사다 주었는데 막상 사 오니 먹고 싶지 않아 다 먹지를 못했다. 이래도 군소리 없이 남은 음식을 먹고 포옹을 해주었다. 땀에 젖어 냄새가 날 것 같은데도 말이다. 보잘것없게 느껴지는 나를 지극히 사랑해 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힘이 솟았다. 어둠 속에서 나를 따뜻하게 안아주는 사람이 있고 없고의 차이는 컸다.
남편의 보살핌 덕분에 몸이 나아질 때 아빠가 걱정되어 전화를 걸었다. 집에서 쉬고 있을 줄 알았는데 아빠는 마스크를 쓰고 일을 하러 가고 있었다. 무지 피곤해 보였지만, 아빠는 '일을 해야지…'라고 덤덤하게 말했다. 마음이 무지 아팠다. 일을 시작한 지 10년도 안 되어서 일은 즐거움, 자아실현보다는 수단에 가깝다는 걸 느꼈기에 더 그랬다. 아빠는 증상도 없고 괜찮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통화를 끊고 침대에 누워 있는데 영화 'Eight Grade'에서 나를 글썽이게 한 장면이 생각났다. 영화에는 오래전 사별로 아내를 잃은 아버지와 중학교 2학년의 여자 아이가 나온다. 심성은 착하지만 수줍음이 많고 말이 적고 친구가 없는 딸이다.
학교생활에서의 좌절감이 극에 달한 어느 밤, 딸은 아빠에게 묻는다.
"Do I make you sad?"
아빠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들은 듯 당황해하며 자신이 슬퍼 보이냐고, 왜 그렇게 생각하냐고 되묻는다.
"Sometimes I think that, like, when I grow up, maybe I’ll have a daughter... I would love her a lot because she’s my daughter but... I don’t know, I guess if she ended up being like me, I think being her mom would make me really sad."
아빠는 정색을 하고서 눈을 마주치며 딸에게 틀렸다고 말한다. 딸 덕분에 자신이 얼마나 행복한지 말로 표현할 수도 없다고 말이다.
그러면서 자신이 힘들었던 때를 털어놓는다. 아내가 떠났을 때, 정말 두려웠다고 말이다. 이 어린 소녀가 필요한 모든 것을 자신이 제공해 줄 수 있을지 겁이 났다고 말한다.
"But then you got older. And you took your first steps, and you said your first words, and you wrote your first letter to Nana and you made your first friend; and everything that I thought I was going to have to teach you - how to be nice, how to share, how to care about other people’s feelings - you just started doing on your own. Your teachers would say, 'You’ve got such a lovely daughter, you’ve done such a great job with her.' But I didn’t do anything. I really didn’t. I just watched. And the more I watched you, the less scared I got. I stopped being scared a long time ago, Kayla. You know why? Because of you. You made me brave, Kayla. And if you could just see yourself like I see you... the way you really are, the way you always have been... I promise you wouldn’t be scared either."
사실 나는 자라면서 '아빠는 나 같은 딸이 있어 행복할까?'라는 의문을 품어본 적이 없었다. 그만큼 성숙하지 않았거나 아빠에게 나는 좋은 딸이라고 잠재의식적으로 생각했다. 이 의문은 최근에서야 던지기 시작했다. 내가 아빠였으면 나 같은 자식을 둔 것을 후회할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내와 사별을 한 후에도 초등학생 첫째, 유치원생 둘째, 갓난아기 막내를 매일 일하며 키워놓았더니 딸도, 아들도 직항 비행기를 14시간 타야만 갈 수 있는 미국에 살고 있다. 시부모님은 우리가 6주마다 방문하는 것도 모자라다며 더 자주 오라고 늘 말씀하시는데, 일 년에 딸을 한번 볼까 말까 한 아빠의 마음은 어떨까, 자주 생각한다.
아빠가 여자친구와 헤어지고 다시 혼자 살기 시작할 때도, 아빠의 절친이 암 수술을 하고 더 이상 말을 할 수 없는 걸 아빠가 옆에서 지켜볼 때도 아빠의 안부를 물으면 아빠는 언제나처럼 '아빠는 괜찮으니 걱정하지 말라'라고 말했다. 나라면 괜찮지 않을 것 같았지만 나를 걱정시키고 싶지 않아 하는 아빠의 말을 믿으려 노력했다.
내가 미국인 남자친구와 결혼하고 싶다고 했을 때 아빠는 내가 행복하면 아빠도 좋다고 흔쾌히 허락했다. 아빠는 늘 무엇보다 내 행복을 우선시했기에 예상했던 대답이었다. 이제는 이런 아빠를 보며 '내가 그런 엄마가 될 수 있을까?' 묻는다. 자식을 낳으면 무엇이든지 털어놓는 친구처럼 지내고 싶다고 기대치가 이미 생겨버렸기에 대답은 '아니오'에 가깝다. 아빠는 어떻게 기대치 없이 사랑을 줄 수 있을까.
괜찮다는 아빠의 말버릇을 들을 때마다 아빠가 말한 적 없는 외로움, 적적함, 막막함을 느낀다. 아빠를 아빠만이 아니라 사람으로 받아들이는 자신을 보며, 친구들 부모님의 부고 소식을 접하며, 나도 아빠도 늙고 있구나 퍽 깨달았다. 여러 가지 이유로 미국시민권을 얻고자 한국국적을 포기하지 않고 있는데 그중 한 가지 이유는 아빠다. 적어도 아빠가 아플 때, 아빠에게 내가 필요할 때 아빠 옆에서 사랑과 힘을 주고 싶다. 남편이 내게 지금 그래주듯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