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카폐인작가 Apr 01. 2024

여자는 반만 먹어야 예뻐

출처-pixabay



새해를 맞이해 제주도에서 집으로 놀러 온 동생은 간단히 한 잔 하자며 인사도 하기 전에 편의점 비닐봉지부터 내 얼굴에 들이밀었다. 지금 당장 하소연하지 않으면 열받아 죽을 것 같다며 씩씩대는 동생에게 진정하고 손발부터 씻고 오라며 욕실로 보낸 뒤, 나는 동생이 아까 사 온 간단한 안주거리와 캔맥주를 원형 테이블 위에 나름 보기 좋게 놓았다. 씻고 오니 한결 차분해진 동생은 원형테이블 앞에 앉으며 운을 띄웠다.   

  

“나, 지난주에 뉴스에서만 보던 일을 겪었어.” 동생은 캔맥주를 한 번에 들이켰다. 

“왜, 무슨 일 있었어?" 나는 말했다.    

  

평소 밝고 씩씩하게 지내는 동생인데, 도대체 어떤 일로 그렇게 화를 내는지 궁금했다. 나는 억울한 사연을 들어주는 라디오 진행자처럼 어서 말해보라며 재촉했다.    

 

동생이 직장인 사내카페의 손님은 당연히 회사직원들이었기에 매일 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카페직원들과 손님들은 서로 최대한 불편한 일 안 만들고 잘 지내는 게 암묵적인 룰이었다. 하지만 카페 옆 사내식당 직원분들은 달랐다. 부모님과 나이대가 비슷한 식당 아주머니 세 분은 동생의 동료 남직원 철수를 어른으로써 유난히 예뻐했다.    

 

식당 직원인 그분들에게 매번 커피를 내주는 건 동생과 또래 여직원인 영희였지만, 항상 고맙다는 인사를 받는 건 동생의 또래 남직원인 철수였다. 어떤 요구사항이든 친절하게 대해주는 건 동생과 여직원인 영희였지만, 온갖 칭찬을 듣는 건 역시나 철수였다.  

   

그런데 그날은 그러려니 넘기기엔 꽤 힘들었다. 점심식사 짝꿍이었던 영희가 그날따라 볼 일이 있어 철수와 밥 먹는 시간을 바꿨기 때문에 동생은 철수와 처음으로 같이 밥을 먹게 되었다. 자율배식인 반찬과 달리 밥은 식당 아주머니가 배식해 주었기에 동생과 철수는 늘 그랬듯이 식판을 들고 줄을 섰다.    

  

“이런 건 힘쓰는 남자가 먼저 먹어야지!” 

“?”      


밥을 한가득 뜬 밥주걱은 앞에 서 있던 동생을 지나쳐 뒤에 있던 철수의 식판 위로 향했다. 본의 아니게 새치기당한 동생이 어이없는 표정으로 아주머니를 쳐다보자 아주머니는 밥을 푸며 말했다.   

   

“여자는 반만 먹어야 예뻐.”


동생의 식판에는 철수가 배식받은 밥양의 반만 담겼다. 하얀 쌀밥을 중심으로 두드러져 보이는 회색 식판의 여백. 순간 동생은 얼굴, 목, 귀 등에서 심한 열기를 느꼈다. 캔 맥주를 두 번째로 시원하게 들이켠 동생은 그날 일을 회상하며 말했다.      


“열받아 진짜! 영희도 내 얘기 듣고 이제 알았대. 아니, 여자가 뭐. 나도 밥 많이 먹는다고. 이때까지 점심때 우리가 받는 밥양이 좀 부족한 게 당연한 줄 알았어. 근데 그게 아니었던 거야. 여기서 일 한지 일 년 반이 넘었는데 전혀 몰랐어.”


“밥 더 달라고 제대로 말하지 왜.”


“그게 좀... 뒤에 다른 직원들 줄 서는데 눈치도 보이고...”


“괜히 큰일 만들까 싶어 그랬구나.” 


“응...”     


동생은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소리를 집어삼키며 이게 뭐냐는 식으로 아주머니를 쳐다봤지만, 아주머니는 그게 뭐가 문제냐는 듯 오히려 동생을 빤히 쳐다보았다. 자기 뒤로 하나 둘 늘어나는 다른 직원들 때문에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할 수 없어 동생은 입을 꾹 닫고 불쾌한 마음을 억누르며 겨우 자릴 벗어났다.    

  

동생은 자율배식인 반찬을 더 많이 푸는 걸로 마음을 달랬다. 좋아하는 반찬이 나와 다행이야. 동생은 반찬을 식판에 빈틈없이 담았다. 물론 이 모든 상황을 지켜본 철수는 동생 맞은편에 앉으며 말했다.      


“어... 내 밥 더 가져가도 되는데, 가져갈래?”

“어우, 아냐, 아냐. 반찬을 더 많이 먹지 뭐. 하하.”      


동생은 그날 처음으로 사람을 공격할 뻔했다고 쓴웃음을 지었다. 동생의 한탄을 듣던 친한 제주도민들은 먹는 걸로 차별하는 게 제일 서럽지라며 여기서 그런 일은 생각보다 흔하니 너무 스트레스받지 말라며 다독였다.      


“나는 그래도 중심가라 그렇지, 더 멀리 살고 있는 희수는 내 얘기 듣더니 본인은 더 하다면서 두 시간 넘게 전화로 하소연하더라니까. 우리 둘 다 남의 일인 줄만 알았지. 내 일이 될 줄은 몰랐지. 하하.”     


웃음밖에 안 나온다며 한숨 쉬는 동생이 안쓰러웠다. 집에 온 김에 맛있는 거 많이 먹어. 그렇게  동생이 집에 지내는 며칠 동안 나는 배달어플을 여러 번 켜야만 했다.           



이전 03화 다만 내가 싫었던 건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