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근한 바람이 너무 좋아서 걸었다. 걸으면 걸을수록 맑은 하늘을 배경 삼아 내리는 햇살이 어색해 어깨를 살짝 움츠렸다. 힐긋, 곁눈질로 주변을 쳐다봤다. 거북이걸음인 나와 달리 내 옆을 지나치는 사람들은 당연한 듯 빠르게 걷고 있었다. 나만 이상했다. 사람들의 걸음에는 갈 곳이 정해져 있는데, 내 걸음에는 목적지가 없다.
그래서 그런 걸까. 평소에 인식조차 하지 않았던 사람들이 보였다.
평일인데도, 이 시간엔 사람이 많구나.
번화가로 가면 갈수록 어디서 그렇게 나왔는지 사람들이 여기저기 널려있었다. 군데군데 자리 잡은 카페 앞에는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있었다. 누가 봐도 점심 후 커피를 사러 온 정장차림의 직장인들, 후드티에 트레이닝 바지를 입고 머리를 검은 고무줄로 질끈 묶은 학원에서 나온 수험생, 캡모자를 눌러쓰고 00 고기라고 적힌 앞치마를 두른 식당 직원 등 음료를 사러 온 사람들도 이렇게나 다양한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나는 다른 세상을 구경하는 듯했다.
이런 모습이었구나. 나는 잠시 잊고 있었다. 이 풍경을, 이 여유를. 나는 그동안 평일 대낮 이 시간엔 항상 약 10평대의 카페 안에서 사람들에게 음료를 만들어 주기만 했지, 기다리는 사람의 모습이 어떤지 잘 몰랐다. 나는 그동안 근무지인 카페에 찾아오는 사람들을 그저 커피 달라고 재촉하는 입 벌리고 있는 아기새처럼 본 것이다.
부서지는 햇살 속에 사람들은 잠시 기다렸고 금방 사라졌다. 그 사람들을 보니 목이 말랐다.
캬-. 깔끔하고 씁쓸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한 입 쭉 마시니 답답했던 마음이 한순간에 풀리는 듯하면서도 이상하게 막 울고 싶었다. 하지만 이 마음은 그냥 지나치기로 했다.
이 기분을 모른 척하는 게 날 위한 일이다. 그것이 오랜 기간 동안 날 아프게 한 감정에 대한 나만의 처방전이었다. 서글프고 비참하고 때론 억울했던 상황과 날 괴롭게 한 사람이 너무 밉고 싫었지만 어쩌겠는가. 과거를 곱씹어봐야 쓴 물맛만 나는걸. 이 시기에는 무조건 뭔갈 배우고 공부하고 여행을 해야 한다. 아니면 반드시 후회하게 된다. 스스로 방치해 버려둔 시간은 뼈가 아리다.
이런저런 생각하며 걷다 보니 도심 속에서 유일한 큰 공원에 도착했다. 익숙했던 공원은 못 본 사이 더 세련된 졌고, 시민을 위해 편리해졌고, 미관상 예뻐졌다. 다행히 어릴 적 자전거를 타고 빙글빙글 돌던 농구대가 있는 광장은 그대로였다. 아직 물이 뿜어져 나올 때가 아닌지 분수대는 메말라있었다.
아니, 벌써 벚꽃이? 이 자주색 꽃은 뭐지? 우와 홍매화라고?꽃이 피는 나무를 보려면 멀리 아주 멀리 나가야만 볼 수 있다 생각했는데, 앙증맞게 달린 꽃잎을 이렇게 쉽게 볼 수 있다니.
귀찮음을 조금만 이겨내면 볼 수 있는 꽃들을 그동안 찾지 않았던 것에 대해 약간 후회했다. 멍! 멍! 짖는 소리에 잠에서 깬 듯 돌아보았다. 돌아보니 반려견을 데리고 산책하는 사람들이 하나 둘 보였다. 주인 곁을 따라 혹은 주인보다 앞서서 발랄하게 걷는 강아지들을 보니 웃음이 났다. 나는 그제야 산책로 곳곳에 반려견 배변 비닐 사물함이 설치되어 있다는 걸 알았다. 신기했다 그리고 한숨이 나왔다. 신기하다니. 반려동물을 키우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이들을 위한 배려가 있다는 건 당연한 건데 왜 생각지 못했을까. 내가 우물 안 개구리 같다는 생각에 다시 울적해졌다.
너무 일만 해선 안돼, 주변을 돌아보며 살아. 누군가 따뜻하게 말해줬었는데, 기억나지 않는다. 한 귀로 말을 흘러 들으며 일, 집, 일, 집만 반복하며 살았던 삶은 누구를 위한 삶이었을까. 스스로 선택한 길임에도 지루하고 짜증 난다며 퇴근하면 집에 누워만 있던 나는 뭘 위해 살았을까.
아, 퇴사하지 말걸 그랬나? 아냐. 그렇지만 퇴사해야 했는걸. 안 그럼 힘들었을 거야. 솔직히 말하자면 죽을까 봐 겁이 나서 살려고 퇴사한 것뿐이다. 잘했다고 생각지 않는다. 하지만 새로 시작할 수 있어! 하루에도 열두 번씩 왔다 갔다 하는 마음을 두 달 만에 겨우 잡았다.
기어이 나는 처음으로 돌아왔다. 방구석 찌질이 백수였던 스물 다섯 그때로 말이다. 다시 시작해야 하는구나. 두렵고 막막하다가 잘했다는 생각에 후련하고 즐겁다가 불안했다.
어떻게 해야 하지? 난 어디로 가야 하지?
많은 세월이 지났는데, 나는 그대 로고 변한 건 사라진 단골집과 높이 쌓아지고 있는 아파트뿐이었다. 지금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고자 가벼운 마음으로 방 정리를 하다, 중학생 때 썼던 진분홍색 일기장을 찾았다. 반가운 마음에 자리에 철퍼덕 앉아 몇 장 넘기다, 그 안에 웃긴 문장을 발견했다.
[내 글로 마법을 적을 거야!]
제법 당차고 무모한 문장이다. 어린 나이의 패기가 이렇게 부러울 줄이야. (사실, 보자마자 뭐... 뭘 적어? 하고 당황했다.) 그때도 나는 은밀히 작가의 꿈을 꾸고 글 쓰는 삶을 꿈꿔왔구나. 보아하니 세상물정 모를 때도 나는 게으르고 짤막한 글을 썼다.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는 말 괜히 있는 게 아니네. 그로부터 한 참 어른이 된 나는 여전히 짤막한 글을 쓰고 게으르다. 그럼에도 변하지 않은 건, 국어와 언어공부를 좋아한다는 것과 '쓰기의 감각'에서 말한 아무도 읽지 않을 '조잡한 초고'를 쓰고 있다는 사실이 살아가는데 방향을 정해준달까. 비록 방구석에서 혼자 그러고 있지만...
어쩌면 나는 계속 깨고 싶지 않은 꿈을 꾸고 있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