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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걷는 나무 Mar 25. 2024

나의 장례식은 없을 예정.

 






  오랜 지인에게서 카톡이 왔다. 카톡 청첩장은 많이 받아 봤지만, 부고장은 처음이었다. 예전에는 우체국에서 전보를 보냈다. 휴대폰이 없는 시절, 집에 전화기가 있는 경우도 드물었기에 제일 빠른 연락수단이었다. 하지만 이제 초등학생들까지 휴대폰을 소유하고 있으니, 전보를 보낼 일도 없어졌다. 실제 작년을 끝으로 138년 만에 우체국 전보 서비스가 중단되었다. 카톡친구 중 알리고 싶은 이들에게 단체로 전송하며 되니, 이 보다 빠른 소통수단이 있을까? 정말 빠르게 세상이 변하고 있다.



  부고장을 확인하러 들어가니 상주부터 빈소, 임종, 입실, 입관, 발인시간 그리고 장지까지 상세히 알려주고 있었다. 또 부의금을 페이로 바로 보낼 수 있고, 조문 메시지를 남기거나 근조화환까지 보낼 수 있게 세팅이 되어 있었다. 보면서도 '조문을 이렇게도 할 수 있구나' 하고 새삼 놀라면서도 뭔가 불편한 마음이 들었다.


 

  예전엔 바쁜 현대생활에서 간편하고 편리하게 마음을 전할 수 있는 잘 만들어진 시스템이라고 생각했었다. 청첩장을 받거나 돌잔치에 초대받았을 때 상황이 여의치 않아서 갈 수 없을 땐 축의금만 보내거나 선물을 보내도 전혀 미안하거나 불편하지 않았다. 나의 마음이 충분히 전해졌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그냥 부조금만 보낸다고 해서 나의 마음이 전해지지 않을 것 같았다. 그래서 낼 가겠다는 메시지만 남겼다.


  처음 직접 운전을 해서 가보는 도시이기도 하고, 장거리 운전이 익숙하지 않기에 마음을 단단히 먹고 새벽녘에 출발을 했다. 그렇게 한참을 달려 3시간 반 만에 낯선 도시의 장례식장에 도착했다. 긴장을 많이 했는지 오른쪽 다리와 목이 뻐근하다. 그래도 늦지 않게 무사히 도착했으니 다행이다. 타 지역에서 오는 지인이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주차장에 도착했다는 문자를 남긴다. 운전 중이라  방해될까 봐 전화는 피했다. 혼자 들어가 왠지 서먹하기도 하고 새벽녘에 출발해서 피곤하니 차라리 잘 됐다고 생각이 들었다. 집에서 담아 온 커피나 마시며 잠시 긴장감을 내려놓는다. 문자를 보낸 후 한 시간이 지나고 나서 도착한 지인과 함께 장례식장으로 향했다.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살짝 긴장이 됐다. 102호실, 상주인 지인의 이름을 발견하고 들어선다.


   상주인 지인은 밝게 우리를 맞이했다.
눈에는 눈물을 가득 담고서.


  나와 지인은 그저 서로를 꼭 끌어안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아니 아무 말도 필요하지 않았다. 그저 이 순간 함께 할 수 있음에 감사하는 마음뿐. 그냥 그렇게 한참을 가만히 안고 있었다.





  장례식장을 많이 가보진 못했지만, 그동안 가본 장례식장의 분위기와는 사뭇 달랐다. 기독교식 장례식장은 떠나는 이를 애도하는 곡소리가 나지 않았다.

떠난 이로 인해 슬프고 괴롭다는 뜻으로 '애고' <哀告>라고 하고, 그 심정을 울음으로 표현하는 것이 길게 늘여 '아이고아이고'라고 '곡소리'를 내는 것이다.

  상주들은 조문객을 맞을 때마다 깊은 슬픔을 곡소리로 토해낸다. 조선시대에는 대신 울어주는 '곡비'라는 직업이 있었을 정도로, 장례식장 하면 '곡소리'가 당연히 흘러나오기 마련이다. 그런데 곡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천국에서 만나자는 약속이 있기에, 고통도 없고 아픔도 없는 사랑과 평화만 있는 하나님의 품으로 가는 것을 축복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인 것 같았다. 그런데 난 종교가 없다. 불교를 믿지 않으니 윤회를 하지 않을 테고, 다시 태어날 일도 만무하다. 기독교도 믿지 않으니, 천국이든 지옥이든 어디서든 다음을 약속할 수 없다.


 그럼 난 어디서 당신들을 만날 수 있을까?


  20, 30대 그렇게도 많이 결혼식과 돌잔치를 다니며  축의금을 내고 축하를 했는데, 그들은 모두 어디에 있지? 각자 먹고살기 바빠서 연락할 여유가 없다고 한다면 나도 할 말은 없다. 그렇지만, 이제는 여유가 생겼다며 연락을 했을 때 나를 만나지 못할 수도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어야 한다. 그렇다고 내가 당장 죽을병에 걸린 것은 아니니 오해는 하지 않기를 바란다.


  하지만 태어나는 날은 정할 수 있어도( 요즘엔 원하는 날짜를 정해서 제왕절개를  통한 출산을 선호한다고 한다.)죽는 날은 정할 수 없다고 했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죽을지 선택할 수 없는 게 인생이다.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죽음으로 항해 살아간다. 죽기 위해 열심히 살아가는 것이다. 죽음 위에 삶이 있고, 삶 위에 죽음이 있다. 모든 것이 빠르게 변하는 세상 속에서 유일하게 변하지 않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때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니 제발  살아있을  때 보자.

 

  소중한 인연이라고 생각한다면, 나의 일상을, 나의 시간을 기꺼이 나누며 살자. 여유가 있을 때 만나는 것이 아니라, 먹고살기 바쁘고 힘들더라도, 그럴수록 시간을 내서 보자. 함께 맛있는 것도 먹으면서 '살기 힘들다' 푸념도 하고, '그래도 잘 살고 있다'라고 서로 격려도 해주며 함께 울고 웃으며 일상을 쌓아가자. 그래도 부조금이 주고 싶다면 미리 받을 테니, 그 돈으로 지금 맛있는 거나 사 먹으며 이야기나 나누자.


 





    나는 장례식을 치르지 않을 것이고, 그러니 당신들도 힘들게 올 필요도 없다. 단지 이 세상을  떠나는 날 '그대들 덕분에 즐거웠노라'라고 소식만 전해질테니, 마음으로 '잘 가라'라고 인사해 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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