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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걷는 나무 Mar 09. 2024

나의 아버지

40년 만의 생일상







    어릴 적 시골에서는 보통 가정집에 농협이나 수협에서 나누어주는 벽걸이용 달력을 받으면 식구들 생일이나 제사, 기념일에 동그라미를 그리고 '000 생일', '000 제사', '000 결혼식'등을 써두었다. 잊어버리면 큰일이라도 날까 봐 몇 번이고 들여다보고 확인하곤 했었다. 하지만 내가 기억하는 우리 집에는 생일 동그라미는 없었다. 일찍이 10살 때부터 육지로 유학을 나와 친적집에서 눈칫밥을 먹고, 12살부터 자취를 시작하면서 철이 일찍 들다 보니, 왜 우리 집은 생일 동그라미가 없는지 알게 되었다. 그래서 나도 동그라미를 그리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몸 새겨진 동그라미는 지워지지 않아서 그날이 되면 전화를 건다.



    생신인데 미역국에 찰밥은 드셨는지 여쭈어보면 언제나 돌아오는 답변이 있다. "생일이 별거 있냐? 매일이 생일이라고 생각하면, 매일이 특별한 날이 되는 거지. 그렇게 하루하루를 즐겁게 보내면 되는 거고, 그러면 특별하지 않은 날이 없제”. 생일이라도 그 흔한 생일케이크도 없고 일하기 바빠서 잊어버렸다며 그냥 지나치기 일쑤였다. 이렇다 보니 나도 생일을 그다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게 됐다. 처음부터 생일이 이렇게 무심히 지나쳐가는 일상 중 하루는 아니었다. 아버지는 어업을 나가 집에 없었고, 오빠의 사고는 일어났다. 아버지생신 던 그날, 오빠는 5살에 먼저 생을 마감했다. 생일이 사라진 건 그때부터였다.



  동이 트기도 전에 자는 아이들의 얼굴을 보고 집을 나선다. 거친 파도를 가르고, 만선을 꿈꾸며 먼바다로 향한다. 물때에 따라, 계절에 따라 어장이 바뀌기에 바다를 잘 알아야 한다. 오늘은 좀 더 멀리까지 나와 원하는 포인트에 그물을 던지고 한참을 끌고 다닌다. 운 좋게 물고기 떼를 만나 무거워진 그물을 끌어올린다. 새벽잠을 이기고 나온 고단함도 잠시, 끌려 올려오는 큰 놈들을 보니 신이 난다. 손은 더욱 빨라진다. 멀리 나온 만큼 돌아가는 길도 멀 텐데, 갑판에 가득 쌓인 상자를 보니 왠지 돌아가는 길도 가깝게 느껴진다. 그러나 섬에 가까워질수록 밀려오는 피로는 어쩔 수 없다. 그래도 언제나 선착장 끝에서 배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던 아이가 있기에 힘을 내어본다. 방파제 끝이 보인다. 많은 배들이 오가지만 나의 배를 알기에 발견하면 폴짝폴짝 뛰며 손을 흔들곤 했다. 엔진소리에 들리지도 않는데도 목청껏 자신을 불러대는 아이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그런데 오늘따라 아이가 보이지 않는다. '놀다가 잠들었나?' 오늘 잡은 유독 큰 물고기를 보여주며 자랑하고 싶었는데 내심 아쉽다. 잡아온 것들을 분류하고 청소를 하고 저녁 찬거리와 이웃집에 나눠 줄 것만 챙겨서 집으로 향한다. 그런데 오늘따라 집 앞에 동네 사람들이 웅성이며 모여있다. 누군가 아이의 이름을 넣어 나를 부른다. "00 아버지 왜 이제 왔는가?" 어업을 끝내고 집에 돌아왔을 때는 이미 창백한 모습으로 차갑게 식어버린 아이가 기다리고 있었다.




   일찍이 자수성가해서 30대 작은 집과 작은 어선이 있었고 2살 터울의 3남매까지 있었다. 동네에서는 물론 이웃동네까지 소문난, 모두 부러워하는 30대 가장이었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아들 없는 불쌍한 사람>이 되어버렸다. 시골에선 아무리 성공해도 아들이 없으면 불쌍한 사람으로 통했다. 아들이 있어야 어딜 가서도 어깨 펴고 떵떵거리고, 그렇지 않으면 어깨도 못 펴고 남의 아들 자랑을 들어야 했다. 자신에게 들려오는 이야기를 알면서도 아버지는 그 섬을 떠나지 않으셨다. 자신이 태어나 자란 고향이었고 또 아들이 묻혀있는 그곳을 떠날 수없었다. 그저 묵묵히 사업을 키우시고 명성을 쌓아갔다. 지역사회에서 알아주는 유지가 됐지만, 여전히 돌아오는 수식어는 <아들 없는 불쌍한 사람>이다.



   하필이면 자신의 생일에 아들을 떠나보냈으니 40년간 잊고 싶어도 잊어버릴 수 없었을 것이다. 축하받아 마땅한 날이었지만, 자신이 지켜주지 못해서 놓쳐 버렸다는 죄책감에 축하받는 것을 거부하셨다. 그런 아버지께서 이제는 그 짐을 내려놓기를 바랐다. 그래서 40년 만에 아버지 몰래 큰맘 먹고 생일상을 차렸다. 큰상을 두 개나 붙여야 할 만큼 가득 음식을 차렸다. 이웃도 부르고 커다란 생일케이크도 미리 주문해서 여객선에 실어달라고 해서 만반의 준비했다.



   모든 준비는 끝났다. 앞으로 일어날 일은 아무것도 모른 채 일을 끝내고 식사를 하기 위해 아버지께서 집으로 돌아오셨다. 현관문을 여는 순간 아버지께서는 집안 가득히 둘러앉아 자신을 위해 폭죽을 쏘며 "생신을 축하합니다!"라고 외치는 소리에 놀라 눈이 커지고 현관 앞에서 주춤하셨다. "이게 다 뭐데?" 하며 멋쩍은 듯 말씀하셨지만, 이미 입꼬리는 광대뼈까지 올라가 있었다. 아버지께서 주인공 자리에 앉으셨고 40년 만에 촛불이 켜진 커다란 케이크를 마주했다. 다 함께 생일축하노래를 불렀고, 마음깊이 쌓아둔 응어리를 뱉어내듯 붉게 부풀린 얼굴로 촛불을 향해 깊은숨을 뱉어냈다. 그 많은 촛불이 한꺼번에 모두 꺼져버렸다. (초를 불면서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식사하시는 내내 입가에는 미소가 떠나질 않으셨다. 그렇게 40년 만의 생일상은 다시 축하를 받는 생일날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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