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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시율 Sep 05. 2023

나의 엄마가 있다면..

소소함을 나누던 그리움.

 나의 10대는 엄마와의 전쟁으로 하루하루를 보내야 했고, 나의 20대는 엄마와의 대립으로 보내야 했다. 이제는 나의 30대가 와서 엄마와의 타협으로 즐거움만이 남을 줄 알았으나 나는 이제 엄마가 없다. 

 

 나의 엄마는 너무 빠르게 나를 떠나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아니 돌아올 수 없는 여행의 길 위에 발을 내디뎠다. 언젠가 나도 갈 길이겠지만 너무 이른 나이에 가버린 엄마가 조금은 원망스러운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있은 거 같다. 


 혼자 살던 기간이 길었던 나는 해가 저물고 모두 퇴근을 해 집에 삼삼오오 모일 시간쯤이면 괜스레 마음이 먹먹해진다. 어차피 자취생이라 퇴근을 해도 나는 혼자였는데.. 그럼에도 나는 이제 전화할 곳조차 없어져 하루의 일상을 시시콜콜한 상사욕을 혹은 엄마의 잔소리를 듣는 것으로 하루를 마무리하는 일을 할 수 없게 되었다. 

 매일 아침 일어나 엄마에게 전화를 하고 점심은 드셨는지 전화를 하고 퇴근을 하며 오늘도 야근인 거 같다며 하루의 투정을 하며 통화를 하던 엄마였다. 아침에 전화를 하지 않는 날이면 점심쯤 전화기가 불이 나게 울린다. 그렇게 받으면 뾰로통한 엄마의 목소리는 [넌 네 엄마가 뒤졌는지 살았는지 궁금하지도 않지?]라며 타박하곤 했는데 그때마다 나는 [아침이라 오늘은 좀 바빴어~ 에이~]라며 너스레를 떨며 허허 웃어넘겼다. 어릴 땐 저런 말이 상처였지만 나도 굳은살이 생긴 건지 이제는 아프지 않은 예민해지지 않는 말이었는데.. 괜찮아지니 이제는 듣지 못하는 말이 되었다.

 

 이제와 돌아보니 엄마의 건강 상태가 확진된 것이 언제인지 기억도 못하는 불속성의 효녀인 나는 왜 미루기만 했을까 왜 안일하기만 했을까 하는 생각들이 자책감과 죄책감으로 몰아치는 밤들이 자주 오곤 한다. 심각해진 작년 엄마의 몸이 점점 나빠지고 있다는 것을 무의식 적으로 알고 있었기에 그 모습이 두려워 엄마를 보러 오는 횟수를 줄였던 걸까? 아니면 엄마를 보면 볼수록 엄마의 여행길에 마음이 저밀까 그랬던 걸까? 지금도 그 답은 모르겠지만 나는 나도 모르게 본능적으로 엄마와의 이별을 직감하고 있던 걸 지도 모른다.

 상사의 욕을 하고 흉보고 싶은 친구의 흉을 다른 사람과 하지 않고 엄마와 했었다. 엄마도 어디다 말하기 민망스러운 이야기들을 나에게 하곤 했다. 가끔은 친구처럼 가끔은 언니처럼 그렇게 엄마와 나는 친해질 수 있었다. 하지만 친해진지 이제 만 4년일까? 아니 3년일까? 엄마와 할 이야기 엄마에게 해줄 이야기 엄마와 보고 싶은 것들 엄마와 나누고 싶은 감정들이 산떠미처럼 밀려있었는데 이제는 밀린 숙제가 아닌 할 수 없는 과제가 되어버렸다.

 

 그렇게 엄마와 하고 싶었던 소소한 매일을 나는 이제 글로 적어가며 달래 보려고 한다. 아마 어렵겠지 달래 지지 않을지도 모른다. 아니 어쩌면 더욱 나의 슬픔만을 더 끄집어내는 일일 수도 있다. 그래도 만일 누군가가 엄마와 딸은 원래 이런 건가? 하며 고민하고 있다면 나의 글에서 조금은 답을 찾거나 위로를 받을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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