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t 6 : 성향자(性向者)의 초상

by 진시율

Part 6 : 인간의 또 다른 얼굴

11화. 이상성애자라는 이름의 사람들

사회가 규정한 ‘비정상’의 경계

나는 사람들이 서로를 분류하는 방식을 오래 관찰해왔다. 그 분류는 언제나 단순해 보이지만, 그 안에는 수많은 배제와 침묵이 숨어 있다. 그중 하나가 바로 '이상성애자'라는 이름이다. 이 이름은 언제나 누군가에 의해 붙여진다. 스스로 선택한 호칭이 아니라, 사회가 이해하지 못한 것들을 한데 묶기 위해 만들어낸 단어. 나는 이 단어가 사용되는 순간, 어떤 사람들이 자동으로 경계 밖으로 밀려나는지를 지켜본다.


'정상'은 언제나 다수의 언어로 만들어진다. 사회는 늘 기준을 필요로 한다. 그래야 질서를 유지할 수 있고, 그래야 설명하기 쉬워지기 때문이다. 그 기준은 대부분 다수의 모습에서 출발한다. 다수가 사랑하는 방식, 다수가 욕망을 표현하는 방식, 다수가 관계를 맺는 방식. 그 기준에 자연스럽게 들어맞는 것들은 '정상'이라는 이름으로 보호 받는다. 그리고 그 바깥에 위치한 것들은 굳이 폭력을 쓰지 않아도 이해 불가능한 것, 이상한 것, 비정상적인 것으로 밀려난다.


이상성애자라는 이름은 바로 그 경게선 위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 붙는다. 그 이름은 설명이 아니라, 거리두기의 도구다. 이해하지 못한 것을 분류하는 사회의 방식. 나는 관찰하면서 깨닫는다. 사람들은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사라지게 하거나, 고치려 하거나, 아니면 이름을 붙여 멀리 두려 한다. '이상성애자'라는 단어는 그중 세 번째 방식에 가깝다. 이 단어가 붙는 순간, 그 사람의 개별적인 서사는 지워진다. 그가 어떤 관계를 맺어왔는지, 어떤 감정의 역사위에 서 있는지, 그 욕망이 어디서 비롯되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는 단지 '정상'의 반대편에 서 있는 존재가 된다.


경계는 보호선이 아니라 배제선이다. 사회는 말한다.


"이건 정상이고, 저건 비정상이다."


이 말은 중립적으로 들리지만, 실제로는 명확한 위계를 만든다. 정상은 설명할 필요가 없고, 비정상은 언제나 설명을 요구받는다. 이상성애자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사람들은 끊임없이 자신의 존재를 해명해야 한다. 왜 그런지, 언제부터인지, 혹시 고칠 수는 없는지. 나는 그 질문들이 호기심이 아니라 통제의 언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질문은 이해를 가장한 규범의 확인이다.


'위험하다'는 낙인의 작동 방식 이상성애자라는 범주는 종종 '위험'이라는 말과 함께 사용된다. 그러나 그 위험은 싱제 행위에서 비롯되기보다, 다름 자체에 대한 불안에서 나온다. 사회는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것을 두려워한다. 그래서 이해할 수 없는 욕망을 위험한 것으로 치환한다. 그 결과,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내면을 숨기고, 어떤 사람들은 자기검열 속에서 살아가며, 어떤 사람들은 아예 자신의 감정을 말하지 않는 쪽을 선택한다.


나는 이 침묵이 개인의 선택이 아니라 사회가 만든 구조적 결과라는 것을 기록한다. 경계 밖의 사람들도 같은 질문을 한다. 중요한 사실은 이것이다. 경계 밖으로 밀려난 사람들 역시 같은 질문을 한다는 점이다.


"나는 왜 이런 감정을 느끼는가."

"이 감정은 어디까지 허용되는가."

"나는 나로 살아도 되는가."


그 질문은 정상이라 불리는 사람들의 질문과 다르지 않다. 다만 그들은 그 질문을 조금 더 혼자서, 조금 더 조심스럽게, 조금 더 오래 품고 있을 뿐이다. 나는 관찰자로서 이렇게 기록한다. 이상성애자라는 이름은 사람을 설명하지 않는다. 그저 사회가 정한 선 밖에 누군가를 세워두는 방식일 뿐이다. '비정상'이라는 말은 실재하는 상태가 아니라, 권력이 만든 구분이다. 그리고 그 구분은 누군가를 보호하기보다 누군가를 고립시키는 쪽으로 작동해왔다.


사회는 늘 선을 긋는다. 그 선은 질서를 위해 존재한다고 말해지지만, 실제로는 불안을 관리하기 위한 장치에 가깝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을 그대로 두는 대신, 사회는 그것을 구분하고 이름 붙여 안쪽과 바깥쪽으로 나눈다. 그 과정에서 사람은 하나의 삶이 아니라 하나의 범주가 된다. 그러나 내가 관찰해온 수많은 삶은, 그 어떤 선도 단번에 설명해내지 못했다. 사람의 마음은 언제나 경계 위에 머물렀고, 때로는 그 경계를 넘나들며 흔들렸다. 욕망은 단순하지 않았고, 감정은 규칙적으로 작동하지 않았다. 누군가는 사회가 허락한 방식으로 사랑하지 못했고, 누군가는 사회가 이해할 준비가 되지 않은 방식으로 관계를 맺었다. 그 모든 경우에서 삶은 언제나 분류보다 먼저 존재했다.


‘정상’이라는 단어는 설명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생략이다. 그 단어는 다수의 형태를 기준으로 삼아, 그 외의 가능성을 묵음 처리한다. 그 결과 경계 밖에 선 사람들은 끊임없이 자신의 존재를 증명해야 하고, 자신의 감정을 해석해야 하며, 때로는 스스로를 부정해야 한다. 하지만 그들이 느끼는 혼란과 고통은, 경계 안에 있는 사람들의 그것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단지 더 오래, 더 조용히 견뎌왔을 뿐이다.

사회가 그어 놓은 경계는 사람의 마음보다 훨씬 단순하다. 그러나 사람의 삶은 그 어떤 분류보다 복잡하고, 그 어떤 규정보다 깊다. 이 단순함과 복잡함의 간극에서 수많은 삶이 오해되고, 지워지고, 침묵해왔다.

그래서 나는 이 장의 끝에 이 문장을 남긴다. 경계 밖에 서 있는 사람들은 비정상이 아니다.



그들은 단지 아직 사회가 이해하지 못한 존재들일 뿐이다.





성향자, 그들은 누구인가

나는'성향자'라는 단어가 언제부터 하나의 악인이 되었는지를 알아보았다. 이 단어는 원래 설명을 위해 존재했으나, 어느 순간 부터는 거리두기와 배제의 언어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성향자는 특정한 성적 취향을 가진 사람들을 통칭하는 말이지만, 그 안에는 수많은 개인과 전혀 다른 삶의 서사가 포함되어 있다. 그럼에도 사회는 이 복잡한 집합을 하나의 단어로 묶어 단순화한다.


성향자란 무엇인가. 가장 단순하게 말하자면, 사회가 통상적으로 기대하는 성적 관계의 틀을 벗어난 방식으로 욕망을 인식하거나 관계를 맺는 사람들이다. 여기에는 권력과 교환, 역할의 분화, 신뢰와 합의에 기반하는 상호작용 등 다양한 요소가 호팜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성향이란 행위 이전에 인식과 감각의 구조하는 점이다. 그것은 누군가에게서 학습되거나 강요되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랜 ㅅ히간에 걸쳐 자기 안에서 형성되고 자각되는 하나의 내적 언어에 가깝다.


사회는 종종 성향자를 ‘위험한 존재’로 상상한다. 그러나 내가 관찰한 다수의 성향자들은 오히려 위험을 최소화하려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관계 이전에 합의와 경계를 중요하게 다루며, 서로의 심리적·신체적 안전을 반복적으로 확인한다. 이 지점에서 아이러니가 발생한다. 무규칙하다고 여겨지는 집단이 실제로는 규칙에 가장 민감하고, 자유롭다고 오해받는 욕망이 가장 많은 책임을 요구받는다.

성향자에 대한 오해는 대부분 ‘비가시성’에서 비롯된다. 그들은 일상에서는 평범한 이웃이고, 동료이며, 가족이다. 직업도, 생활 방식도, 가치관도 각기 다르다. 다만 그들의 욕망이 사회가 익숙해한 언어로 설명되지 않을 뿐이다. 이 설명 불가능성은 곧바로 불안으로 전환되고, 사회는 그 불안을 ‘이상’이라는 이름으로 봉합한다.


역사적으로 보아도 성적 규범은 고정된 적이 없었다. 시대와 문화에 따라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는 계속 이동해왔다. 과거에는 금기였던 관계들이 오늘날에는 제도적으로 보호받기도 하고, 반대로 한때 허용되던 관습이 지금은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그럼에도 사회는 현재의 규범을 마치 영원한 기준인 것처럼 착각한다. 성향자에 대한 배제 역시 이 착각 위에서 작동한다.

중요한 것은 성향이 도덕의 문제가 아니라 차이의 문제라는 점이다. 성향자는 누군가를 해치기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의 감각과 욕망을 이해하려는 과정 속에서 자신만의 언어를 찾았을 뿐이다. 그 언어가 다수의 언어와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그들을 비정상으로 규정하는 것은 인간 경험의 폭을 스스로 축소하는 일이다.


나는 성향자들이 반복해서 던지는 질문을 기록해왔다. “나는 나로 살아도 되는가.” 이 질문은 특별하지 않다. 누구나 한 번쯤은 자신에게 던지는 질문이다. 다만 성향자들은 그 질문을 더 오래, 더 고립된 상태에서 붙들고 있을 뿐이다. 그 고립은 개인의 선택이 아니라, 사회적 시선의 결과다.

성향자에 대한 담론이 자주 실패하는 이유는, 그들을 하나의 유형으로 고정하려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향자는 정체성이 아니라 사람이다. 각자의 삶이 있고, 각자의 상처와 관계의 기억이 있으며, 각자의 방식으로 책임을 지고 살아간다. 성향은 그 삶의 한 부분일 뿐, 전부가 아니다.


나는 이 글의 끝에서 다시 한 번 정리한다. 성향자란 특별한 존재가 아니다. 그들은 단지 인간 경험의 스펙트럼 안에 존재하는 다양한 형태 중 하나다. 사회가 아직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을 뿐, 그들의 삶은 이미 오래전부터 이 사회 안에서 조용히 이어져 왔다.


경계를 긋는 것은 쉽다. 그러나 이해하는 일은 시간이 걸린다. 성향자에 대한 진정한 논의는 그들을 설명하려는 시도에서 시작되지 않는다. 그들이 말할 수 있는 자리를 만드는 것, 그리고 그 말이 안전하게 머물 수 있도록 사회가 침묵을 거두는 데서 시작된다.


그들이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가장 정확한 대답은 이것일지도 모른다.


그들은 우리와 같은 시대를 살고, 같은 불안을 느끼며, 같은 질문을 품고 있는 사람들이다.
다만 사회가 아직 그 질문에 답할 언어를 갖추지 못했을 뿐이다.





성(性)과 정신의 교차지점

나는 성과 정신이 분리된 채로 존재한다는 믿음이 얼마나 허약한 전제 위에 서 있는지를 오래 관찰해왔다. 사회는 종종 성을 본능의 영역으로, 정신을 이성의 영역으로 나눈다. 그렇게 나뉜 구획 속에서 성은 통제되어야 할 충동이 되고, 정신은 이를 관리하는 장치가 된다. 그러나 실제 삶에서 성과 정신은 늘 서로를 통과하며 영향을 주고받는다. 그 교차지점에서 인간의 정체성은 만들어지고, 갈등은 증폭되며, 때로는 회복의 실마리도 발견된다.


성은 단순한 신체의 반응이 아니다. 그것은 감각의 기억이며, 관계의 언어이고, 자기 인식의 방식이다. 어떤 이는 성을 통해 자신이 안전한지 확인하고, 어떤 이는 성을 통해 통제감을 느끼며, 또 다른 이는 성을 통해 타인과의 거리를 조절한다. 이때 정신은 성을 해석하고 의미를 부여한다. 같은 경험이라도 어떤 정신적 맥락에 놓이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감정으로 저장된다. 그래서 성은 늘 정신의 풍경을 닮는다.

정신의 상처는 종종 성의 언어로 번역된다. 애착의 결핍은 관계의 형식에 영향을 미치고, 불안은 통제의 욕구로, 죄책감은 자기검열로 나타난다. 이 교차는 원인과 결과의 일방향이 아니다. 성적 경험이 정신을 형성하기도 하고, 정신적 상태가 성적 인식을 바꾸기도 한다. 중요한 것은 이 순환을 병리로 단정하기보다, 맥락으로 이해하는 태도다.


사회는 이 교차를 불편해한다. 성이 정신의 문제와 연결될 때, 설명은 복잡해지고 규범은 흔들린다. 그래서 사회는 단순한 분류를 선호한다. 정상과 비정상, 건강과 문제, 허용과 금지. 그러나 이분법은 교차지점의 섬세함을 지워버린다. 개인의 내면에서 벌어지는 다층적인 감정과 인식의 흐름은, 단 하나의 이름으로 요약될 수 없다.


나는 성을 도덕의 잣대로 재단하는 순간, 정신은 침묵하게 된다는 사실을 본다. 말할 수 없는 감정은 왜곡되고, 설명되지 못한 욕망은 오해로 굳어진다. 반대로 정신을 병리의 언어로만 다룰 때, 성은 위험의 표식으로 환원된다. 이때 개인은 자신의 경험을 말할 언어를 잃는다. 말할 수 없음은 곧 고립을 낳고, 고립은 다시 정신의 부담을 키운다.


교차지점에서 중요한 것은 합의와 의미화다. 성은 관계 속에서 발생하고, 정신은 그 관계를 해석한다. 안전한 합의는 성을 신뢰의 언어로 만들고, 의미화는 경험을 파편이 아닌 이야기로 묶는다. 이 과정이 가능할 때, 성은 정신을 해치지 않고 오히려 지탱하는 자원이 된다. 반대로 합의가 무시되고 의미화가 차단될 때, 교차지점은 상처의 축적지가 된다.


치유는 성을 제거하거나 억압하는 데서 오지 않는다. 치유는 교차지점을 다시 말할 수 있게 만드는 일에서 시작된다. 무엇을 느꼈는지, 왜 그 방식이 필요했는지, 어떤 감정이 동반되었는지. 이 질문들이 안전하게 오갈 때, 개인은 자신의 경험을 통합할 수 있다. 통합은 동일화가 아니라 이해다. 이해는 판단을 늦추고, 판단을 늦출수록 정신은 숨을 고른다.


나는 관찰자로서 이 결론을 남긴다. 성과 정신은 서로를 오염시키는 관계가 아니라, 서로를 해석하는 관계다. 교차지점은 위험이 아니라 설명될 필요가 있는 자리다. 그 자리를 봉인할수록 오해는 커지고, 열어둘수록 삶은 구체화된다. 사회가 해야 할 일은 선을 더 굵게 긋는 것이 아니라, 그 교차를 말할 언어를 더 많이 준비하는 것이다.


성(性)과 정신의 교차지점은 인간이 인간으로 남는 자리다. 본능과 의미, 감각과 해석이 만나는 그 자리에서 우리는 스스로를 이해하려 애쓴다. 이해는 완결되지 않아도 된다. 다만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말해질 수 있는 교차지점만이, 개인을 고립이 아니라 관계로 이끈다.







12화. 성향과 정신의 거울

욕망은 병인가, 본성인가

나는 나에게 묻는다. 아니, 묻는다는 표현은 정확하지 않다. 이 질문은 이미 오래전부터 내 안에 있었고, 나는 다만 그 질문을 외면하지 않기로 했을 뿐이다.


욕망은 병인가, 본성인가.


이 질문을 입 밖으로 꺼내는 순간, 나는 내가 이미 어느 쪽에도 쉽게 설 수 없다는 사실을 안다. 왜냐하면 나는 이 질문을 타인을 향해 던지는 사람이 아니라, 나 자신을 향해 던지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나:

“이 욕망은 도대체 뭐지?”
“왜 이렇게까지 나를 설명하기 어렵게 만들까.”

나의 또 다른 목소리는 쉽게 대답하지 않는다.
그는 늘 그렇듯,
확답 대신 질문을 되돌려준다.


나(다른 나):

“그럼 묻자.
이게 병이라면,
무엇을 기준으로 병이라고 부를 수 있지?”


나는 잠시 말을 잃는다. 병이라는 단어는 너무 쉽게 쓰이지만, 정작 그 기준은 늘 모호하다. 사회에 불편하면 병이 되고, 설명되지 않으면 문제로 분류된다. 그렇다면 묻지 않을 수 없다.


불편함은 병의 기준이 될 수 있는가?


나는 내 욕망을 떠올린다. 그것은 언제나 동일한 형태로 존재하지 않았다. 어떤 시기에는 조용했고, 어떤 시기에는 강렬했고, 어떤 시기에는 스스로를 위협하는 존재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래서 나는 한때 믿었다. 이 욕망은 어딘가 잘못되었을지도 모른다고. 치유되어야 할 대상이고, 억제되어야 할 충동이며, 설명되기 전에 먼저 교정되어야 할 무엇이라고.


그러나 동시에 아는 또 다른 사실도 알고 있었다. 이 욕망은 내가 선택해서 가진 것이 아니라는 점을.


나:

“선택하지 않았는데,
왜 책임은 전부 내가 져야 하지?”


나(다른 나):

“그건 사회가 그렇게 설계되어 있기 때문이야.
선택하지 않은 감정일수록
더 철저히 설명하라고 요구하거든.”


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성향에 대해 말할 때, 사람들은 늘 묻는다.


"왜?"

"언제부터?"

"무슨 계기로?"


마치 원인이 명확히 설명되지 않으면 존재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 것처럼. 그러나 나는 안다. 사람의 마음에는 원인보다 먼저 존재하는 것들이 있다는 걸.욕망은 정신과 분리되어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단순한 신체 반응도, 충동의 폭주도 아니다. 욕망은 언제나 정신의 풍경을 닮아 있다. 불안한 정신은 안정된 형태의 욕망을 찾고, 통제되지 않은 삶은 통제 가능한 관계를 욕망한다. 상처받은 사람은 상처를 이해해 줄 수 있는 언어를 욕망한다. 이 모든 것은 병의 증상이 아니라


적응의 방식이다.


나:

“그럼 이 욕망은
나를 망치기 위해 있는 게 아니라,
버티기 위해 생겨난 건가?”


나(다른 나):

“그 가능성을 왜 배제하지?”


나는 그 질문 앞에서 오랫동안 침묵한다. 왜냐하면 그 가능성을 받아들이는 순간, 나는 나 자신을 '고쳐야 할 존재'가 아니라 '이해해야 할 존재'로 바라봐야 하기 때문이다. 그건 생각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다.병이라는 개념은 치료의 언어를 전제로 한다. 정상으로 되돌려야 한다는 목표, 이전 상태로 복구해야 한다는 가정.


그러나 나는 묻는다. 어디로 되돌아가야 하지? 욕망이 없던 상태로? 그런 상태가 정말 존재한 적이 있나? 욕망이 제거되는 것이 아니라 해석되고 조율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저에는 도덕이 아니라, 맥락과 합의, 그리고 스스로에 대한 정직함이 필요하다.


나:

“그럼 이 욕망은
나를 망치기 위해 있는 게 아니라,
버티기 위해 생겨난 건가?”


나(다른 나):

“그 가능성을 왜 배제하지?”


나는 그 말을 곱씹는다. 본성은 정당화가 아니라, 출발점일 뿐이다. 그 위에서 어떤 선택을 하느냐는 정혀 다른 문제다. 그래서 나는 욕망을 선과 악으로 나누지 않는다. 대신 이렇게 정의해본다.


욕망은 나의 정신이 살아남기 위해 만들어낸 하나의 언어다.


이제 나는 이 질문을 다시 써 내려간다. 욕망은 병인가, 본성인가. 나의 대답은 둘 중 하나가 아니다. 욕망은 병으로 오해받아온 본성이며, 본성으로 덮어버리기에는 너무 복잡한 정신의 흔적이다. 나는 나의 욕망을 치료 대상으로만 보지 않기로 했다. 그것이 나를 아프게 할 때 조차, 그 이유를 먼저 묻기로 했다.


"이 욕망은 지금의 나를 어떻게든 살아 있게 하려는 시도는 아니었을까."


이 질문을 허락하는 순간, 욕망은 더 이상 나를 위협하지 않는다. 대신 나를 설명하는 하나의 거울이 된다.나는 그 거울을 깨지 않기로 했다. 비추어진 모습이 불편하더라도, 그 안에 내가 있기 때문이다.





고통을 통해 쾌감을 느끼는 인간의 심리

인간은 모순적인 존재다. 피해야 할 것으로 배운 고통 앞에서, 어떤 순간에는 오히려 안도와 쾌감을 느낀다. 이 현상은 단순한 변칙이 아니다. 인간의 신경계와 마음, 그리고 관계의 역사 속에서 반복적으로 발견되는 패턴이다. 나는 이 모순을 병리로 단정하기보다, 왜 그런 감각이 가능해졌는지를 묻고 싶다.


고통과 쾌감은 이웃이다. 고통과 쾌감은 뇌에서 완전히 분리된 길을 걷지 않는다. 강한 자극이 주어질 때, 뇌는 이를 '위험'으로 인식하는 동시에 완충 장치를 가동한다. 엔도르핀과 같은 내인성 진통ㆍ보상 물질이 분비되어 감각의 날을 무디게 하고, 이 과정에서 완화감ㆍ안도감이 동반된다. 고통 이후 찾차오는 이 반동은, 때로 쾌감으로 인식된다. 쾌감은 여기서 '즐거움'이라기보다는 긴장 해제의 감각에 가깝다.


예측 가능한 고통이 주는 안정감. 무작위적 고통은 공포를 낳지만, 예측가능하고 합의된 고통은 통제감을 준다. 인간의 불안은 통제 불가능성에서 증폭된다. 반대로 경계가 명확한 자극은


"이건 내가 감당할 수 있다."는 신호를 제공한다.


이때 고통은 위협이 아니라 질서가 된다. 질서 속에서 마음은 안정을 회복하고, 그 안정이 쾌감으로 번역된다. 무감각에서 '느낌'으로. 심리적 마비 상태에서는 감정이 흐르지 않는다. 이때 강한 감각은 감정의 스위치가 된다. 고통은 둔감해진 마음을 다시 현재오 끌어오고, '나는 지금 여기 있다'는 실감을 만든다.


쾌감은 고통 그 자체가 아니라, 느낄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에서 발생한다. 이것은 자극 추구가 아니라 각성의 회복이다. 고통에 서사가 붙을 때는 같은 자극도 맥락에 따라 전혀 다른 감정으로 저장된다. 의미가 부여된 고통은 상처가 아니라 의례가 된다. 의례는 개인을 혼자가 아닌 관계 속에 놓는다. 이해받고 합의된 맥락에서 경험되는 자극은, 고통을 관계의 언어로 바꾼다. 쾌감은 여기서 '신뢰가 유지되었다'는 확인에서 생겨난다.




내가 바라본 그들의 공통된 외로움

나는 여러 사람을 보았다. 이름도, 나이도, 성별도, 살아온 퀘적도 달랐다. 겉으로 보이는 성향과 태도, 선택과 언어는 서로 어울리지 않는 것처럼 보였고, 그들을 하나로 묶는 것은 무리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러나 오랜시간 봐온 결과 , 나는 점점 하나의 감각을 공유하게 되었다. 그 감각은 다름이 아니라 외로움이었다. 이 외로움은 고독과는 달랐다. 혼자 있는 시간의 문제도, 사람의 수로 환산될 수 있는 감정도 아니었다. 그 외로움은 늘 관계의 한복판 에서 발생했고, 대화가 오간 직후에 더 짙어졌으며. 이해받고 싶은 마음이 커질수록 더 선명해졌다.


설명해야만 존재할 수 있다는 외로움이다. 그들이 가장 자주 느끼는 외로움은 설명되지 않으면 존재할 수 없다는 감각에서 비롯되었다. 자신의 감정, 욕망, 반응, 선택을 항상 언어로 풀어내야만 '괜찮은 사람'으로 남을 수 있다는 압박. 그러나 설명은 언제나 불완전했다. 말로 옮기는 순간, 맥락은 잘리고 질문은 단순화되며 의미는 오해의 여지를 남겼다. 그들은 종종 말한다.


"설명하면 더 이상해지는 것 같아요."


그 말속에는 좌절이 아니라 관계의 문턱에서 반복적으로 밀려난 경험이 담겨 있다. 설명해야만 받아들여지는 관계는 이미 안전하지 않다. 그 사실을 알면서도 그들은 설명을 멈투지 못한다. 그것이 유일한 연결의 방식이었기 때문이다. 이해받고 싶은 마음과 들키고 싶지 않은 마음의 공존. 그즐의 외로움에는 늘 모순이 있었다. 이해받고 싶지만, 완전히 들키고 싶지는 않았다. 자신의 내면을 보여주고 싶으면서도 그 내면이 오해될까 두려워 항상 일부만을 내민다.


그 일부마저 상처로 돌아올 때, 그들은 다시 한 겹 더 숨는다. 이 반복 속에서 외로움은 사람 사이가 아니라 자기 자신 안에 자리 잡는다.


"아무도 나를 모르겠지."


이 문장은 타인에 대한 원망이 아니라 자기 검열의 경과다. '같은 언어'를 쓰는 사람을 만나지 못한 외로움이다. 그들이 가장 자주 토로하는 것은 사람이 없다는 말이 아니라 같은 언어를 쓰는 사람이 없다는 말이었다.


언어란 단지 단어의 문제가 아니다. 감정을 해석하는 방식, 침묵ㄷ을 받아들이는 태도, 불안을 다루는 속도와 방향. 그들은 많은 사람을 만났지만, 대화는 종종 엇갈렸다. 한쪽은 해결을 말하고, 다른 한쪽은 이해를 원했다. 한쪽은 원인을 찾고, 다른 한쪽은 공존을 바랐다. 사람이 곁에 있을수록 마음이 혼자 남는 경험이 반복되지 때문이다.


'이상하다'는 시선이 남긴 외로움. 그들은 직접적인 폭력보다 간접적인 시선에 더 오래 노출되어 있었다. 질문 속에 굼어 있는 판단, 농담처럼 던지는 거리두기, 이해하는 척하지만 받아들이지 않는 태도.


"너무 예민한 거 아니야?"

"그건 좀 이상하지 않아?"


이 말들은 큰 소리를 내지 않는다. 그러나 조용히, 정확하게 사람을 바깥으로 밀어낸다. 그 경과, 그들은 자신의 감각을 스스로 의심하게 된다. 의심은 곧 침묵으로 이어지고, 침묵은 외로움의 가장 비옥한 토양이 된다. 선택이 아니라 반응으로 살아온 사라들의 외로움이다. 그들 중 많은 이들은 스스로를 '선택한 사람'이라 부르지 않는다.


그 보다는 반응해온 사람에 가깝다. 주어진 환경에, 주어진 관계에, 주어진 감정에 반응하며 그때그때 버텨온 삶. 그러나 사회는 묻는다.


"왜 그렇게 살았어?"

"다른 선택은 없었어?"


이 질문은 현실을 지우고 이상적인 가정을 강요한다. 그 강요핲에서 그들은 다시 혼자가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아 있는 외로움의 핵심. 내가 바라본 그들의 공통된 외로움은 사람이 없어서가 아니라, 존재가 환영받지 못한다는 감각에서 비롯되었다.


"네가 여기 있어도 괜찮다."

"지금의 너도 받아들일 수 있다."


이 말을 제대로 들어본 적이 없는 사람들. 그들은 그래서 늘 자신을 조정하고, 맥락을 설명하고, 톤을 낮추고, 질문에 대비한다. 그 준비된 삶은 겉으로는 적응처럼 보이지만, 안쪽에서는 외로움이 조용히 쌓인다. 내가 바라본 그들의 외로움은 특별하지 않았다. 오히려 너무 흔해서 쉽게 지나쳐지는 종류의 외로움이었다. 그러나 그 외로움은 누군가에게 한 번이라도


"그대로 있어도 된다"는


말을들었다면 조금은 덜 무거워졌을 것이다. 나는 이 글의 끝에 이 문장을 남긴다.


그들의 외로움은 선택이 아니라 결과였다. 이해받지 못한 시간이 남긴, 조용하고 오래된 흔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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