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t 7 : 관찰자의 독백

by 진시율

Part 7 : 첫 번째 대상이자 관찰자였던 나.

13화. 나, 그리고 그들

A양, B여사, C선생님, D군, 친구들… 그리고 나의 교차점

나는 이 기록을 쓰며 여러 번 멈췄다. 누군가를 쓰는 일은 언제나 나를 쓰는 일이 되었고, 나를 쓰는 일은 결국 누군가를 다시 불러오는 일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이 잘을 쉽게 시작하지 못했다. 이 잘은 인물의 목록이 아니라, 나와 그들이 서로를 통과해온 흔적의 지도이기 때문이다.


상처로 숨 쉬는 사람, A양을 관찰하며 나는 '의지'라는 단어를 다시 배우게 되었다. 그녀는 자주 흔들렸고, 때로는 감정이 넘쳤으며, 자신을 다치게 하면서까지 세상과 연결되려 했다. 사람에게 상처받고, 다시 사람에게 치유잗고 싶어 했건 그 모순은 그녀를 약하게 만들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는 누구보다 관계의 무게를 알고 있었다. A양의 세계에서 감정은 늘 과잉이었고, 그 과잉은 오해가 되었으며, 오해는 다시 고립으로 돌아왔다.


나는 그 고리를 옆에서 지켜보며 감정이 많은 사람이 아니라, 감정을 홀로 감당해온 사람이라는 결론에 이르었다. A양은 나에게 묻지 않았다. 대신 보여주었다. 사람이 얼마나 아프면서도, 얼마나 끝까지 연결을 포기하지 않는 존재인지.


완벽하지 않으면 존재할 수 없었던 사람, B여사는 강박과 결벽, 조울의 파도 속에서 자신과 타인을 동시에 몰아붙이며 살아온 사람이었다. 그녀의 사랑은 늘 통제와 함께 있었고, 그 통제는 불안에서 비롯되었다.불안은 자존감의 붕괴로 이어졌고, 붕괴는 분노로 표출되었다. 나는 그녀를 관찰하며 깨달았다. 완벽을 요구하는 사람은 대부분 자신에게 가장 잔인하다는 사실을.


B여사는 내려놓는 법을 배우지 못한 채 삶의 많은 것을 잃었다. 그리고 결국, 스스로를 용서하지 못한 채 떠났다. 그녀는 나에게 사항과 폭력이 얼마나 쉽게 섞일 수 있는지를, 그리고 그 경계가 무너질 때 한 사람의 인생이 얼마나 조용히 붕괴되는지를 남겼다.


몸으로 버텨온 생, 말없이 흘러간 시간들을 버틴 C선생님. 그는 말수가 적었다. 대신 그는 몸으로 살아왔다. 정화조 차를 몰고, 고장을 고치고, 차고에서 잠들며 일을 이어갔다. 그는 강압적인 아버지가 되지 않으려 애썼고, 아이들을 친구처럼 대하고 싶어 했다. 그러나 현실은 늘 그의 의도보다 무거웠다. 아내의 욕망과 자신의 한계 사이에서 그는 늘 스스로를 뒤로 미뤘다.


B여사의 죽음 이후, 그의 삶은 책임이라는 단어로만 유지되었다. 자립하지 못한 아이들, 떨어져 지내는 가족,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 그는 술에 기대어 하루를 넘기며 말한다.


"너희만 자립하면, 나는 산으로 들어가겠다."


나는 그 말이 도피가 아니라 마지막 휴식에 대한 소망이라는 것을 안다. 그러나 그 소망 속에서는 자식의 마음을 끝내 묻지 못한 아버지의 고독이 겹겹이 쌓여 있다.


이유 없는 무기력의 얼굴로 지내는 D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하루 속에서 자신이 사라지고 있다고 느꼈다. 잠들어도 피곤했고, 쉬어도 회복되지 않았으며, 사회하는 무대 앞에서 발걸음을 돌려세우는 일을 반복했다. 그의 무기력은 게으름이 아니었다. 그것은 감정의 엔진이 멈춘 상태, 아니, 멈추지 않으면 버틸 수 없었던 상태였다.


나는 그가 커튼을 걷고, 바람을 맞고, 말 한마디와 한 걸음 다시 꺼내는 과정을 지켜보았다. 아주 느린 회복, 아주 작은 생존의 증거들. D군은 나에게 알려주었다. 살아 있다는 것은 크게 달리는 일이 아니라, 오늘도 숨 을 쉬는 일일수 있다는 것을.


이름 없는 교차점들이 무수한 나의 동지들. 특별한 이름으로 묶이지 않는 사람들. 각자의 상처를 가지고, 각자의 방식으로 버키며 살아온 이들. 그들 중 누구는 성향의 문제로, 누구는 관계의 실패로, 누구는 말해지지 않은 정신의 문제로 늘 경계선 위에 서 있었다.


그들과의 대화 속에서 나는 자주 느꼈다. 우리는 서로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지만, 비슷한 외로움을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 외로움은 사람이 없어서가 아니라, 존재가 환영받지 못한다는 감각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관찰자이자 교차점을 지닌 나는 이 모근 사람을 관찰하며 나는 끝내 한 가지 사실을 인정하게 되었다.나는 결코 바깥에 서 있지 않았다는 것.


나는 관찰자였지만, 동시에 그들의 이야기와 겹쳐지는 지점에 서 있었다. 무기력의 언어를 이해했고, 통제의 불안을 보았으며, 완벽을 요구하는 내면의 목소리를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 기록은 타인의 삶을 정리한 문서가 아니라, 나 자신의 좌표를 확인하는 작업이 되었다.


A양, B여사, C선생님, D군, 성향자들...그리고 나.

우리는 서로 다른 이름을 가졌지만, 비슷한 질문 앞에 서 있었다.


"이 상태로 살아도 되는가."

"완전히 낫지 않아도 괜찮은가."

"설명되지 않아도 존재할 수 있는가."


나는 이 장의 끝에 이렇게 적는다.


우리는 모두 교차점에 서 있다. 누군가의 삶을 스치며, 서로의 상처를 비추며,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해도 함께 존재하고 있다. 그리고 그 사실만으로도, 이 기록은 계속될 이유가 충분하다.





병과 성향, 그 사이의 인간다움

나는 오랫동안 이 질문을 피해 왔다. 병과 성향을 구분하는 선이 어디에 그어지는지, 혹은 그 선이 실제로 존재하는지에 대해 말하는 일은 언제나 누군가를 다치게 할 가능성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관찰을 계속할수록, 나는 더 이상 침묵이 중립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침묵은 종종 기존의 구분을 강화하는 쪽으로 작동한다.


병이라는 이름과 성향이라는 이름은 서로 다른 범주처럼 보이지만, 현실에서는 자주 겹쳐지고, 엇갈리고, 오해된다. 그리고 그 오해의 중심에서 가장 쉽게 사라지는 것은 인간다움이다.병은 설명을 위한 언어다. 고통의 원인을 찾고, 치료의 방향을 정하기 위해 만들어진 개념이다. 그러나 그 언어가 사람 전체를 대표하기 시작하는 순간, 병은 설명을 넘어 정체성이 된다.


“그 사람은 우울증이야.”

“그건 조울의 증상이야.”

“그건 정신적인 문제지.”


이 문장들 속에서 사람은 빠르게 사라지고, 상태만이 남는다. 나는 이 지점을 여러 번 목격했다. 고통을 설명하려던 말이 어느 순간부터 그 사람의 말과 선택을 무효화하는 도구로 변하는 순간을. 그의 감정은 ‘증상’으로 환원되고, 그의 욕망은 ‘왜곡’으로 해석되며, 그의 판단은 ‘믿을 수 없는 것’이 된다. 병의 언어가 강해질수록,

인간은 점점 작아진다.


성향은 본래 설명의 언어다. 사람이 어떤 방식으로 느끼고, 어떤 방식으로 관계를 맺으며, 어떤 방식으로 세상과 접속하는지를 말하기 위해 사용된다. 그러나 사회는 성향을 설명보다는 평가의 기준으로 사용해왔다. 정상과 비정상, 안전과 위험, 허용과 금지. 특히 성과 욕망이 얽힌 성향은 더 빠르게 병의 언어와 연결된다.


“그건 정신적인 문제 아니야?”

“치유가 필요한 상태 아닌가?”


이 질문들은 호기심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정상성의 경계를 재확인하는 질문이다. 그 결과, 성향은 사람의 삶을 설명하는 하나의 요소가 아니라 사람 전체를 규정하는 꼬리표가 된다. 병과 성향이 동시에 언급되는 순간, 인간은 가장 취약한 위치에 놓인다. 이때 사람은 ‘아픈 사람’도, ‘다른 사람’도 아닌 설명되어야 할 대상이 된다. 그의 말은 신뢰를 잃고, 그의 선택은 의심받으며, 그의 고통은 진정성보다 원인 분석의 대상이 된다.


나는 이 교차지점에서 가장 자주 지워지는 것이 책임도, 도덕도 아닌 존엄이라는 사실을 보았다. 사람은 더 이상 자기 삶의 해석자가 아니라, 타인의 해석을 기다리는 존재가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병과 성향 사이에는 완전히 지워지지 않는 영역이 있다. 바로 인간다움이다. 인간다움은 정상일 때만 존재하지 않는다. 명확할 때만 유지되지도 않는다. 흔들리고, 모순되고, 설명되지 않을 때에도 그것은 남아 있다. 아픈 사람도 자신의 선택에 대해 고민한다. 성향을 가진 사람도 타인에게 해가 되지 않기를 바란다. 그들은 여전히 사랑하고, 미안해하고, 책임을 느끼고, 자신의 삶을 어떻게든 살아내려 애쓴다.


이 지점에서 나는 분명히 말하고 싶다. 병은 인간다움을 제거하지 않는다. 성향은 인간다움을 왜곡하지 않는다. 인간다움은 상태나 분류 이전에 존재한다. 인간다움은 판단을 멈출 때가 아니라, 질문의 방향을 바꿀 때 회복된다.


“이게 정상인가?” 대신
“이 사람은 무엇을 겪고 있는가.”

“고쳐야 하지 않나?” 대신
“이 상태에서 어떤 선택이 가능한가.”

“왜 저런 욕망을 가지는가?” 대신
“그 욕망은 어떤 필요에서 비롯되었는가.”


이 질문들은 병과 성향을 없애지 않는다. 그러나 그 사이에 이 질문들은 병과 성향을 없애지 않는다. 그러나 그 사이에 사람이 다시 서 있을 자리를 만든다. 사람이 다시 서 있을 자리를 만든다. 병과 성향 사이에서 우리가 끝까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정상성도, 분류도 아닌 인간다움이다. 인간다움은 설명되지 않아도 존재하며, 완전히 이해되지 않아도 존중받아야 한다. 나는 이 문장을 이 기록의 다음 장으로 넘긴다.


“결국, 우리는 모두 치유를 원했다.”

나는 오랫동안 치유라는 단어를 믿지 않았다. 그 단어는 너무 쉽게 사용되었고, 너무 자주 완성을 요구 했으며, 너무 많은 사람들을 기준 밖으로 밀어냈다. 치유라는 말은 늘 어떤 상태를 전제로 했다.


아프기 전의 상태,

망가지기 전의 상태,

문제가 없다고 여겨졌던 상태.


그러나 애가 관찰해온 삶들에는 되돌아갈 지점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들은 이미 그 지점을 지나왔고, 그 이후의 삶을 살아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끝내 이 문장을 쓰게 된다.


결국, 우리는 모두 치유를 원했다.


치유는 회복이 아니라, 견딤이라는 다른 이름이었다. A양은 사람에게 상처받고, 다시 사람에게 기대며 흔들렸다. 그녀의 감정은 과잉처럼 보였지만, 그 과잉은 세상과 끊어지지 않으려는 몸부림이었다. 그녀가 원했던 것은 강해지는 것이 아니라 계속 연결되어도 괜찮다는 허락이었다.


B여사는 완벽하지 않으면 존재할 수 없다고 믿었다. 그 믿음은 그녀를 끝까지 몰아붙였고, 결국 스스로를 용서하지 못한 채 멈추게 했다.그녀가 원했던 치유는 고쳐지는 것이 아니라 내려놓아도 괜찮다는 인정이었을지도 모른다.


C선생님은 몸으로 버텼다. 말하지 않았고, 설명하지 않았고, 묻지 않았다. 그가 술에 기대며 버텨온 시간은 도피처럼 보였지만, 실은 책임을 놓지 않기 위한 마지막 선택이었다. 그가 원했던 치유는 떠나는 것이 아니라 잠시 쉬어도 되는 자리였다.


d군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하루 속에서 자신이 사라지고 있다고 느꼈다. 무기력은 그를 움직이지 못하게 했지만, 동시에 그를 보호했다. 그가 원했던 치유는 다시 달리는 것이 아니라 숨 쉬어도 괜찮은 속도였다.


치유는 서로 다른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나는 이들을 하나의 이야기로 묶으면서 치유가 얼마나 다양한 형태를 띠는지 알게 되었다. 어떤 사람에게 치유는 고통을 덜 느끼는 것이고, 어떤 사람에게는 고통을 말할 수 있게 되는 것이었으며, 어떤 사람 에게는 고통이 있어도 사람받을 수 있다는 확신이었다. 치유는 약속이 아니라 가능성의 언어에 가까웠다.


"언젠가는 괜찮아질 것이다."가 아니라,

"지금 이 상태로도 완전히 버려지지는 않는다."는 감각.


그 감각이 사람을 하루 더 살게 했다.


치유를 방해한 것은 고통이 아니라 기준이었다. 우리는 가장 오래 괴롭힌 것은 고통 그 자체가 아니었다. 고통을 설명해야만 하는 상황, 고통이 정상에서 벗어났다고 판단되는 순간, 고통이 수정 대상이 되는 구조였다. 우리는 아팠지만, 그보다 더 아팠던 것은 아픈 채로 존재할 자리가 없다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숨겼고, 줄였고, 침묵했고, 스스로를 의심했다. 그 과정에서 치유는 점점 더 멀어졌다. 그래서 우리가 원한 치유의 본질. 결국 우리가 원했던 것은 완벽한 회복이 아니었다. 정상이라는 인증도 아니었다. 우리가 원한 치유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었다.


이해받지 못해도, 배제되지 않는 것

설명하지 않아도, 존재가 유효한 것

낫지 않아도, 관계가 유지되는 것

흔들려도, 인간으로 남을 수 있는 것


이 조건들이 갖춰질 때, 사람은 스스로를 조금 덜 미워할 수 있었다. 조금 덜 미워할 수 있을 때, 비로소 회복은 시작되었다. 치유는 끝이 아니라, 함께 머무는 방식이었다. 나는 이제 치유를 목표로 두지 않는다. 대신 태도로 둔다. 아픈 사람 곁에 판단 없이 머무는 태도, 다른 욕망을 위험으로 단정하지 않는 태도, 완전히하지 않은 상태를 실패로 번역하지 않는 태도.


이 태도 속에서 치유는 조용히 발생한다. 눈에 띄지 않게, 천천히, 그러나 분명히. 결국, 우리는 모두 치유를 원했다. 그 치유는 고쳐지는 일이 아니라 살아도 괜찮다는 허락이었다. 그리고 나는 이 기록을 그 허락을 조그이라도 넓히기 위한 작은 시도로 남긴다. 누군가 이 문장을 읽고 자신의 상태를 조금 덜 미워하게 된다면, 그것으로 이 기록은 이미 치유의 일부가 되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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