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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고리 Sep 20. 2023

[오늘#3] 낡은 볼펜

평범한 직장인의 김치같은 오늘#


  요즘은 컴퓨터나 테블릿, 휴대폰 등을 이용하여 업무 대부분을 소화해야 하는 시대이다. 아주 간단히 하는 회의에서 조차도 휴대폰의 메모기능이나 테블릿 등을 이용하여 의견을 서머리하니까.


  난 오늘도 보고서를 쓴다. '쓴다'는 표현은 필기도구를 이용하여 종이나 종이를 대체할만한 어딘가에 글씨를 표시하는 의미이지만, 보고서는 컴퓨터로 쓴다. 정확히 표현하면 보고서를 '만든다' 정도로 표현하면 될듯하다. 보고서를 만드는 도중 아침부터 유관기관에서 전화가 왔다.


"부장님. 안녕하세요~ 저 000입니다."
"네 안녕하세요."
"본청 회계팀에서 연락이 왔는데, 준공금을 아직 받아가지 않으셨더라고요. 준공서류랑 납품은 받았는데, 회계과에 준공서를 제출안하셨나요?"
"아... 그랬나요? 제가 담당 실무자하고 저희 회계팀에 확인해보겠습니다."


  전화 너머 담당 주무관의 전달사항을 부리나케 받아 적는다. 책상 왼쪽 모서리에 놓은 펜꽂이에 아무렇게나 꽃혀있는 펜 중 손에 잡히는 펜을 꺼내들고 메모장에 받아 적는다. 그런데, 펜 상태가 이상하다. 나왔다가 안나왔다가, 꾸욱 눌러 써봐도 종이가 움푹 페어질 뿐 펜 색은 안나온다. 삼색볼펜이라 이번에는 빨간색을 눌러 다시 써본다. 그래도 안나온다. 이번엔 파란색. 역시나다. 펜꽂이로 시선이 간다. 뾰족하게 깎아놓은 연필이 눈에 띄어 연필을 들고 다시 부리나케 받아 적었다.



  통화를 마치고 볼펜을 메모장에 다시 써봤다. 기울여서도 써보고, 똑바로 세워서도 써보고, 왜 안나오는지 펜 끝부분의 아주 작은 볼 부분에 침도 묻혀보고, 메모장에 거칠게도 휘갈겨봤다. 역시나 안나온다. 삼색볼펜인데 세가지 색이 전부 다 안나오다니... "에이~" 하며 책상 아래 쓰레기통에 던져 버렸다.


  방금 온 전화의 내용을 담당 실무자에게 전달하고 다시 내 자리로 돌아와 의자에 털썩 앉았다. 앉자마자 보고서를 다시 만들기 위해 자연스럽게 손을 키보드 위로 올렸다. 그런데, 전화통화로 의식의 흐름이 끊겨버리는 바람에 잠시동안 멍~하니 있게 되었는데, 갑자기 쓰레기통에 버린 볼펜이 떠오른다.


  쓰레기통에 버렸던 볼펜을 다시 꺼냈다. '이게 언제부터 썼던거지?' 찬찬히 들여다보니 닳을대로 닳아 있었다. 몸체에는 여기저기 흠집이 있고 표면의 색도 누르스름하게 바래있었다. 볼펜 아래쪽의 고무부분은 표면이 쭈글쭈글했고, 헐거워져 위아래로 왔다갔다 한다. 몸체 한편에 붙어있는 상품텍은 완전히 색이 바래 그냥 투명 테이프처럼 되어있다. 펜을 분해해 봤다. 삼색 모두 잉크는 아직 조금 남아있다. 아마도 펜의 볼 부분이 망가져 안나오는가보다.


  '아니, 언제부터 썼는지도 모르겠는, 오래되어 나오지도 않는 펜이 왜 펜꽂이에 그대로 꽂혀있던거지?' 그제서야 펜꽂이로 시선이 다시 간다. 펜꽂이엔 오래되어 색이 바랜 형광펜 몇개와 뾰족하게 깎아놓은 연필들, 가위와 칼, 샤프 등등이 있는데 쓸만한 볼펜은 하나도 없다. '볼펜이 다 어디간거야...'


우리딸이 만들어준 펜꽂이. 벌써 6년이나 되었다.


  얼마전 경주에 일이 있어 편도 6시간을 들여 갔다온적이 있었다. 무심코 운전석 옆 콘솔박스를 열었을 때 삼색볼펜이 3개나 들어있던 것이 불현듯 떠올랐다. '이런... 맨날 외부미팅때 쓸만한 펜을 들고 갔다 오면서 거기에 그냥 넣어놨었네... 이러니 펜꽂이에 쓸만한 펜이 없지...' 다시 닳을대로 닳아 버린 삼색볼펜으로 시선이 간다. '옛날엔 얘도 콘솔박스에 있는 펜들처럼 내가 여기저기 다니며 쓰던걸 텐데...'



낡은 볼펜.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많이 썼던 볼펜.
내가 많이 써 먹어서 낡아진 볼펜.



  문득 낡은 볼펜에 감정이 이입된다. 내가 좋아해서 언제나 나와함께 하던 이 볼펜. 내가 험하게 써서 망가졌구나. 아직 잉크도 조금 남아있으니, 만약 좀 더 조심히 다뤄 썼다면 더 긴시간 나와 함께 할 수 있었을 텐데... 어찌보면 넌 나랑 처지가 비슷하구나... 내 회사생활 20여년을 문득 돌아보게 된다.






여러 사람이 모여 일을 하는 '회사'에서는 작게는 3명, 많게는 8~9명이 한 팀을 이뤄 주어진 프로젝트를 진행한다. 각각의 구성원은 프로젝트의 큰 틀과 진행방향을 알고 있음과 동시에 개별적 실무를 분담하여 하곤 한다. 이때 개별 실무에 경험이 많아 노하우가 축적되어 잘하는 사람이 있으면, 프로젝트의 진행속도는 단축되고 성과는 배가 된다. 결국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하게 되면 능력을 발휘한 구성원은 보상을 받게 된다. 문제는 그 보상이 노력한 바에 비해 크지 않은 회사가 다수인 건 유감일 뿐이다.(성과가 반영되어 연말 성과급이 지급된다해도 눈에띄게 다른 직원에 비해 많이 받는것도 아니고, 심지어 칭찬으로만 때우는 회사도 부지기수이다.)


  그런데 다음이 문제다. 비슷한 프로젝트를 또다시 진행할 경우, 과거 프로젝트에서 능력을 발휘한 그 구성원은 또다시 동일한 개별실무를 맏게 될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다. 과거 프로젝트에서 소스를 디자인하는 디자이너가 프로젝트 리더의 의도를 잘 파악하여 디자인의 결과물을 훌륭하게 만들어내고 작업속도도 매우 짧아서 성과를 냈다면, 새로 시작되는 프로젝트에서도 또다시 동일한 실무를 맏게 된다. 이러한 결정은 거의 대부분 프로젝트 리더와 회사 운영진이 결정한다. 말 그대로 실무자는 회사에서 월급받고 '쓰임을 당하는' 사람이다.


  회사에서는 비슷한 프로젝트때마다 그 실무자를 디자인 담당으로 설정할테고, 그 디자이너는 본인의 바램이야 어쨋든 그 회사에 근무하는 동안에는 대부분의 업무가 디자인일 가능성이 높아진다.


  나도 그렇게 회사에서 '쓰임'을 당했었고, 지금도 당한다. 당연하다. 난 회사원이기 때문에. 그런데 회사에서는 날 빨간색으로만 사용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난 삼색볼펜인데... 빨간색은 이제 잉크가 다 달아 간당간당해져 가고 있는데, 검은색과 파란색은 아직도 가득이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검은색과 파란색을 같이 써서 좀 더 눈에 띄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회사에서는 빨간색만으로 쓰길 원한다. 이제 빨간색 잉크가 거의 다 되어간다. 빨간색이 안나오게 되면 거칠게 휘갈겨도 써보고, 볼끝에 침도 발라보고 하겠지. 그러면 나는 낡아지다 못해 서서히 망가질것 같은데...


 한동안 낡은 볼펜을 바라보게 된다. 쓰레기통으로 던져 넣었던 낡은 볼펜을, 다시 펜꽂이에 꽂아 놓았다.





회사가 당신의 장점을 바라봐줄 가능성은 낮습니다. 당신의 장점은 당신 스스로가 가장 잘 알고 있겠지요. 저의 경우에는 삼색볼펜처럼 여러색을 보일 수 있는게 장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보여줘야할 색을 못보여준다고 고통받을 필요는 없습니다. 그저 당신이 보여 줄 수 있는 색 중에 가장 멋진색은 무엇인지 경험을 하면서 찾아가면 좋습니다. 회사에 '쓰임'을 당하지 마세요. 보여주고 싶은 색으로 쓸 수 있을때 까지 가장 멋진 나의 색은 무엇인지, 기회가 오면 그 색은 어떻게 표현할지 알아 놓으세요. 그리고 정신적으로 중심을 잘 잡아 놓으세요. 볼펜 끝의 볼이 망가지면 보여주고 싶은 색을 보여줄 수도 없으니까요.



나의 오늘은 다시 돌아오지 않을 어제가 됩니다.
오늘을 사색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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