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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리아빠 Jul 01. 2024

꽃을 준다, 나에게

장사익 선생님을 알게 된 1997년, 그 무렵 이야기

  내가 장사익 선생님을 알게 된 것이 1997년이다. 데뷔는 94년(45세)에 하셨다는데, 마케팅은 고사하고 홍보조차 없어서 음악계 맨땅에서 올라오는 소리를 3년이나 지나 라디오를 통해 알게 된 것이다.


  당시 나는 음악 듣는 걸 좋아하는 청년으로 신당동 떡볶이집에서, 홍대에서 DJ를 하면서 그런 방향의 직업을 가져보기를 꿈꿨으나 현실과 타협하며 평범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2002년 11월 춘천 한림대 공연사진

  암만 그래도 음악 듣는 귀까지 닫을 수는 없어 월급 일부를 LP나 CD를 사 모으며(지금처럼 스트리밍 서비스가 있었다면 더 다양하게 많이 듣고 평론가가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음악 듣는 것을 꾸준히 해 오고 있었는데, 첫아들이 태어나던 93년 무렵부터는 전통음악 듣기에 빠졌다.    

2002년 12월 천상병 시인 추모제

  왜 전통음악이냐고?      


  그 무렵 내가 아는 음악은 영미 팝, 아니면 청춘들이 좋아하는 가요였는데, 누구한테 들은 건지 나 스스로 생각한 건지 기억은 희미하지만, AFKN을 문제로 인식하면서 내 인생은 달라졌다.


  지금은 AFN Korea, 예전의 명칭은 AFKN(American Forces Korean Network)으로 방송되던 미군 방송은 주권국가 대한민국에 공중파 방송으로 자리를 잡아 청년들의 정신세계에 큰 영향을 주었다. (우리 집에 TV가 생긴 게 1975년, 그전부터 공중파 채널을 장악하고 채널 2번을 통해 2008년까지 전국에 송출되었다.)  

2003년 7월 공연

  '문화는 위에서 아래로 흐른다'      


  즉, 문화산업은 경쟁력이 높은 국가에서 낮은 국가로 이동한다는 게 정설이고 상식이다. 그럼에서 미국은 불과 200년 갓 넘긴 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막강한 경제력으로 다른 나라들을 순종하게 했는데, 미국이 암만 미워도 코카콜라를 마시지 않는 나라가 거의 없는 그것처럼 부자나라 미국이 만드는 문화는 청년들에게 큰 자극이 되었다.


  우리나라도 예외가 아니어서 현재 음악계에 활동하는 내로라하는 분들에게 음악을 하게 된 동기와 과정을 여쭤보면 공통점이 있어, 하나는 AFKN이고 또 하나는 교회이다.   

2003년 7월 김광석 콘서트 '비밀' 게스트 출연

  지금은 TV 채널이 수백 개이지만, 당시엔 7번, 9번 11번 13번으로 국내 방송은 4개였다. 그나마 2번 AFKN과는 내용으로 차이가 커서 기성세대라면 모르되 젊은 층은 AFKN을 자주 접했다.


  특히'Soul Train'이라는 프로그램은 80년대 매주 토요일마다 방송되어 이 방송을 통해 많은 국내 음악가들이 어릴 적 음악적 영감을 받았다 하는데, 영감은 받았으나 경제적인 이유로 플레이할 장소를 찾지 못하는 청소년들에게 교회가 내주는 연습 공간과 인프라는 그들이 차곡차곡 실력을 쌓을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었고, 지금 한국 대중음악이 흑인 음악 기반으로 바뀌며 K-POP로 성장하는데 매우 큰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한다.

2006년 1월 선생님 댁에서

  그런데 나는 그 배경을 20대에 파악하고는 갑자기 영미 팝이 듣기 싫어졌었다.   

  

  아무리 문화가 위에서 아래로 흐른다지만, 미국의 식민지처럼 사는 대한민국이 불쌍했고, 문화마저 굴종당하는 것 같아 서러웠고, 그 무렵 월드뮤직에 대한 호기심이 생긴 때문이었는데, 약 3년은 미국, 영국 음악을 뺀 나머지 나라들 특히, 남미와 유럽 음악만 들었다. 그러다 아시아로 넘어와 티베트, 인도, 몽골음악도 찾아 듣다가 또 한 번의 자각이 있었으니,     


 "나는 왜 우리 음악을 모르지?"였다.     


  바보같이 내 것은 모르고 남의 것만 좋아하는 모습이 한심스러워 속죄하는 마음에 신나라 레코드에서 많이 나왔던 유성기 복제 음반을 중심으로 판소리와 민요를 찾아 들으며 우리의 전통음악에 심취해 있었다.


  아무튼, 그러다 라디오에서 들은 장사익 선생님 목소리는 판소리 복각 음반에서 들었던 구한말 송만갑, 이동백의 목소리가 묻어 있는 듯했고, 고음에서 진성으로 내지르는 샤우팅 창법에 넋을 빼앗겼다.    

2006년 12월 선생님 댁에서

  그렇게 노래하는 사람이 있다는 게 놀라워 선생님이 출몰하시는 공연장을 찾아다니다 생각이 비슷한 동지들을 만났다. 그게 지금의 '찔레꽃 향기 가득한 세상'인데, 그들은 선생님의 대표곡 '찔레꽃' 가사처럼 장미의 아름다움보다 찔레꽃같이 순박했다.

    

  '시를 노래하는 가수 장사익'   

2006년 12월 선생님 댁에서

  선생님은 알면 알수록 존경스러웠다. 새로운 노래를 만들기 위해 작업하시는 것 지켜보면, 세상에 발표되는 수많은 '시' 중에 보석을 찾는 일이 매우 비중 있는 일 있었고, 그렇게 찾아낸 보석은 일상에서 시도 때도 없이 구음으로 흥얼거리며 기본 멜로디를 만들어 함께한 세션들과 공동 작업으로 완성했다.

      

  역사를 거슬러 그리스와 로마 시대에 음악은 시와 분리할 수 없었다. 달리 말해 시는 바로 노래였다. 그리하여 당시 시인들은 시인이라기보다 음악가에 가까웠다고 할 수 있는데, 요즘은 어떤가? 물론 대부분 가사가 시적 표현과 상상력을 가지고는 있지만 너무 직설적 아닌가?


  또 그마저도 싱어송라이터 적 역량이 부족한지 아니면 완성도를 더 높이기 위함인지 작사, 작곡, 편곡이 모두 분업화되어 자기의 머리와 손과 입으로 만들고 부르는 가수가 점점 줄어드는 듯 보이는데, 장사익 선생님은 지금도 시를 직접 짓기도 하고, 또는 좋은 시를 찾아내 민족이 공감하는 창법으로 노래하신다. 마치 밥 말리, 이브라힘 페레, 메르세데스 소사처럼.

  

2006년 10월 마라톤 입문과 완주

  '꽃을 준다, 나에게'는 이번에 발표하신 신곡이다. 제목이 참 멋있다.

     

  우리가 일상을 살며 나 자신 돌아보며 살기 얼마나 어려운가, 또 돌아보면 어찌 그렇게 못한 것에 대해 후회가 많은가, 가만 생각해 보면 마냥 잘 못만 하고 살지는 않았을 텐데, 우리는 자신에 대해 너그럽지 못한 경우가 있다.


  부족했지만, 열심히 살아온 나에게 꽃을 준다는 선생님의 노래는 나에게도 큰 위안으로 다가온다.   

  데뷔는 한참 늦지만, 음악계 존경받는 어른이 되신 선생님, 1023일 저녁 세종문화회관에서 오랜만에 공연하신다는데, 식지 않은 열정으로 만드신 신곡이 빨리 듣고 싶다.   


  국창이라 불러도 손색없는 장사익 선생님,

  건강하셔서 오래도록 그늘진 마음들을 위로해 주시길 바라고  또 바라며 10월 공연을 기다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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