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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러나 Dec 22. 2023

내가 어떻게 보여지든 상관 없는 이유

테네리페에서 찾아온 것

"나 결혼한 거 후회해"


규영의 사전에는 후회도, 고통도 없을 것 같았다. 한치의 어두움도 없이 맑기만 하던 아이였는데, 오늘은 호의주의보가 떴다. 카페에 울리는 천둥 같은 목소리, 먹구름처럼 찌푸러지는 미간의 근육, 바쁜 손짓이 그날 규영이의 날씨를 말해주는 것 같았다.


잘 맞을 것 같아서 평생을 함께하기로 한 남편이 원수가 되었다는 말을 엄마가 아닌 친구한테서 듣게 되는 날이 오다니. 솔직히 규영이 화가 그렇게 많았는지 몰랐다. 서로 알고 지낸 10년동안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그런데, 그런 모습을 처음 보여준다 한들 규영에 대한 나의 시선은 달라질 게 없었다. 규영이 지금 힘들다고 해서 "불행한 사람"이라고 혹은 "화가 많은 사람"이라고 정의되는 건 아니었다. 내가 아는 규영의 1000개의 모습 중 한 개, 그러니까 규영의 삶 중 한 부분이고 하루 중 어느 단면일 뿐이니까. 삶의 불행이 있어도, 파도가 쳐도 나한테 규영이는 그냥 규영이다.  


그렇게 생각할 수 있는 이유는, 다 테네리페 때문이다.




지난해 혼자 '산타크루즈 데 테네리페'에 갔다. 이름만 들어서는 어디 있는지도, 무엇인지도 모르는 곳이다. '윤식당' 촬영지였다는 부연설명이 있어야만 비로소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도시로, 스페인령이지만 위치상으로는 아프리카랑 더 가깝다.


  "산타크루즈 데 테네리페"를 초록창에 검색하면 '1년 내내 온화한 테네리페 섬의 뜨거운 심장과도 같은 도시'라는 설명이 뜬다. 하지만 나의 테네리페는 뜨거운 심장 같지는 않았다. 어떤 날은 죽을 것 같이 내리는 비 때문에 강한 호우주의보가 떴고, 태양보다 먹구름을 더 많이 봤다. 어느 날은 자꾸 궂어지는 날씨 때문에 천연수영장이 폐쇄됐다.


테네리페에서 혼자 에어비앤비 빌라 한 채를 빌렸다. 오션뷰가 보이는 2층 루프탑이 있었는데, 그곳에 앉아서 매일 몇 시간 동안이나 하늘을 봤다. 하늘을 봐봤자 먹구름 밖에 없었다. 눈에 보이는 건 먹구름, 작은 섬, 흐린 바다가 전부였다.


그런데 먹구름이 빠르게 이동하면서 해가 뜨기도 하고 먹구름 뒤 새파란 하늘이 보이기도 했다. 먹구름 진 궂은 날씨는 그냥 하늘이 덧입은 옷이고, 그 뒤에 멋진 하늘과 태양은 그대로 있었다. 테네리페는 비가 오면 운치 있고, 구름이 끼면 선명해지고, 태양이 뜨면 팔레트 같았다. 그리고 그 모습을 몇 시간이나 지켜보며 타임랩스에 담아왔다. 그리고 눈에 보이는 것에 일희일비할 필요가 없다는 꽤 무거운 깨달음도 담아왔다.


사람의 기분도, 상황도 시시각각 바뀌는 날씨나 그 사람이 갈아입는 옷 같은 것에 불과하다. 나는 사물과 상황을 바라볼 때 항상 그 속에 있는 본질을 볼 수 있기를, 무엇보다 사람을 볼 때는 더 그러기를 바란다. 그리고 나도 나 자신을 그렇게 바라보기로 했다.




요즘 제주에서 육지로 올라오니 자꾸 마음이 물먹은 솜처럼 무거워졌다. 제주에서 분명히 나는 행복했고 밝았는데, 육지에서의 나는 사뭇 진지하고 과하게 현실적이다. 그래서 친구들을 만나기가 싫었다. 제주에서의 밝은 웃음을 잠시 잊어버린 것 같은 내 모습을 친구들에게 들키기 싫었다.


 그런데, 그 어떤 모습에서도 '나는 이런 사람이야'라고 정의할 수 없게 되었다는 걸 규영이를 보면서, 테네리페를 기억하면서 깨닫게 됐다. 내가 마음에 들어하는 나의 모습도 나고, 내가 싫어하는 모습도 나다. 제주에서의 나도 나고, 도시에서의 나도 나다. 그 갭이 크다할지라도 나는 그 어떤 적당한 밸런스를 찾아나가는 과정일 테고, 이런 모습도 저런 모습도 나의 단면 중 하나라는 것을 받아들이니까 마음에 큰 짐을 덜게 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사랑하는 친구들은 내게 먹구름이 꼈어도 날 어두운 사람이라고 정의하지 않을 것을 안다.  나의 긴 여정이 실패라고 쉽게 단정하지 않으며 그저 흐린 날이라고 보아주는 사람이라는 걸 아니까 친구들 앞에 서는 것도 두렵지 않아졌다. 나아가서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 눈에 지금 내가 행복해 보이든, 불안해 보이든, 에너지가 없어 보이 든 상관이 없어졌다. 나는 이런 모습도 있고 저런 모습도 있으니까.  


15개월 뒤의 나를 탈탈 털고 일어나게 했으니 테네리페에서 비싸게 얻은 수업은 가치가 있었다. 테네리페는 뜨거운 심장 정도는 아니지만, '본질'이라는 키워드를 떠올리면 내내 생각나는 곳이 되었다. 그리고 테네리페에서 본 작은 섬을 닮은 산방산이 오늘 더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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