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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러나 Dec 31. 2023

브런치? 나는 당신의 일기장이 궁금하지 않다.

23년의 마지막 브런치

브런치를 시작한 지 74일이다. 퇴사 후 제주에서 있었던 일과, 일을 찾아가는 지금의 고민들을 적어 내려가고 있다. 사실 일기장에 적으면 그만인데 굳이 왜 공개적인 공간에 글을 쓸까. 내가 가진 모순에 대해 생각하고 또 생각한다.


처음, 브런치에 번아웃으로 퇴사한 인사담당자 이야기를 쓰고자 했던 건 크게 두 가지 이유였다.



1. 깨달은 것을 잘 기록해서 삶으로 살아가자는 다짐.


2. 나같이 인생에서 하나의 쉼표를 찍고 방황 중인 사람들에게 위로와 격려를 건네겠다는 것.



그리고 그 글들을 모아 책을 내고 싶었다. 퇴사하고 뭐 했어? 제주도 어땠어?라는 물음에 책 한 권을 들이밀며 답하고 싶었다. 그리고 그 책은 제주에서 함께한 사람들에게 바치고픈 선물이기도 했다. 지인들에게는 그러한 의미였는데, 나를 모르는 수많은 사람들이 이 글을 읽어야 할 이유는 뭘까. 퇴사를 고민하거나, 퇴사하고 방황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힘이 되어주고 싶다고 했는데 내 글은 정말 그런 힘이 있을까?


나는 몇 달간 제주에서의 기억이 흐려지기 전에 글을 쓰고 또 썼다. 74일 동안 37개의 글을 발행하고 6개의 글을 저장해 두었으니 1.7일에 1편씩 쓴 꼴이다. 누가 뭐라 하든, 어떻게 생각하든, 그 어떤 회고도 하지 않고 가열차게 글공장을 돌렸다.


글을 썼다기보다는 어쩌면 '배출'의 의미가 더 강했을지도 모른다. 근사하고 세련된 한 편의 글을 선물처럼 발행해야 하는데, 내 글은 그렇게 신성하지 못했다. 어느 날은 글쓰기가 싫어서 울기도 했고, 어느 날은 내 글이 창피해서 지워버리고 싶었다. 그래도 글을 썼다.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을 일기를 퇴고도 하지 않고 모두가 보는 곳에 써 내리는 모순적 행동을 하면서. 







어느 날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무도 내 일기장을 궁금해하지 않는다'


어쩌다 훔쳐본 남의 일기는 재미있지만, 남의 일기를 각 잡고 읽는데 그만한 이유가 있어야 한다. 내가 쓴 글은 누군가에게 뾰족한 이유를 주기에는 한참 부족하다. 37편의 글 중 어느 한편도 제대로 퇴고한 적도, 회고한 적도 없으니 이 글작업들이 제대로 되어가고 있는지 알리가 없다. 그걸 알면서도 나는 계속 썼다.


퇴고를 왜 안 했냐고 묻는다면, 나는 조금 더 '날 것의 글'을 간직하고 싶었다. 글쓰기를 배운 적 없는 지금의 나만 쓸 수 있는 글을 발행해보고 싶었다. 어차피 글을 배우고 퇴고하면 이 날것들과 풋풋함은 사라질 것 같았다. 이 과정마저도 간직하고 싶은 이상한 욕심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우습고 창피한 고집이다.


퇴고도 안 하고 글을 묵혀둔 또 하나의 이유는 '나'때문이었다. 누군가에게 글로 설득하기 이전에 이 글을 가장 처음으로 읽는 독자인 나 스스로를 설득하는 시간이 필요했다. 솔직히 글을 퇴고할 용기도 준비도 되지 않았다. 내 그릇만큼 담기는 게 글이라, 지나온 시간을 충분히 소화해야만 글을 쓸 수 있다. 그리고 내 호흡이 자라난 만큼 글을 퇴고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 브런치를 하나의 safe zone으로 삼는 전략을 취했다. 그래서 브런치 구독자수를 모으지도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 제주에서의 기억이 흐려지니까 빨리 기록해 두자는 것이 가장 중요한 목표였다. 그래서 '발행' 버튼은 스스로에게 주는 적당한 긴장감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이렇게 누군가에게 글을 보여줘야겠다는 생각스스로를 설득하는데 시간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싸우면서 결국 브런치의 글들은 애매한 일기장이 되었다. 그게 지금 이러나 브런치의 현재다. 그것을 23년이 지나기 전에 꼭 직시하고 회고하고 싶었다.





43개의 글을 써두고도 제주의 이야기를 담기엔 모자라다. 아직도 4-5편 이상의 주제가 더 남았다. 이 글들을 써 내린 후에는 누군가가 궁금해할 일기장이 될지, 선물이 될지, 무엇이 될지 가치를 정해야 하는 시간이 온다. 그리고 그 가치를 정하기 전에 스스로를 수없이 헤집고 찌르며 퇴고하고 글의 완성도를 높이는 시간을 지내야 한다. 23년은 글을 쓰는 행위 자체에 집중했다. 24년에는 좋은 글을 완성해보고 싶다. 그리고 가능하면, 이 일기장을 근사하게 재구성해서 읽어보고 싶은 구미가 당기게 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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