긱 이코노미 시대를 깨닫다.
제주 서귀포시 안덕면 향교로 214.
내비게이션을 찍는다. 평화로를 달려 시골길을 지난다. '여기인가?' 싶을 때 초록색 작은 표지판을 따라 우회전한다.
차에서 내린다. 풍경이 기가 막히다. 눈앞에 펼쳐진 산방산 전경에 몇 초나 넋을 잃는다. 산에서 나오는 '기운' 혹은 '정기'같은 게 정말 존재하는 걸까, 그렇다면 여기서 무언가 근사한 일을 기대해 봐도 되는 걸까 잠시 생각한다.
그리고 뒤돌아서 초록빛 야자수와 대비되는 적갈색 건물 앞으로 걸어간다. 푸른 하늘, 선명한 대비감, 이 모든 걸 아우르는 적당한 감도와 밸런스에 묘하게 끌린다. 이윽고 머릿속으로 프레임을 그려본다. 스마트폰이 어딨더라.
이 풍경은 긴장감과 흥분 속으로 사람을 몰아넣는다. '휴가온건가! 일하러 온 건가?' 물음표와 느낌표 사이에서 헤매게 만든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THIS WAY IN'이라고 적힌 표지판에 홀려 철문으로 향한다. 표지판 아래 놓인 돌하르방의 환영을 받으며 반쯤 미소 짓다가, 철문에 달린 문고리를 손에 쥔다. 그건 네모난 사무실에 살던 도시여행자는 여태 알지 못하던, 환상 속으로 이동할 수 있는 포털인 것도 모르고.
나는 그 문이 해리포터로 따지면 9와 4분의 3 승강장쯤 되는 것 같았다.
그 문을 열기 전까지는, 솔직히 어느 정도의 자부심이 있었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유연한 IT기업의 성지인 판교에서 4년을 보냈으니 ‘자유롭게 일하기'에 관해서는 누구보다 빠삭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건 착각이었다.
이세계를 잇는 철문 하나와
서너 개의 지문이 찍힌 유리문 하나를 지나면
엘리베이터 앞, 한 손엔 캐리어를 쥐고 호기심 많은 눈으로 공간을 탐험하는 사람이 있다. 워케이션을 왔나 보다.
그 왼쪽엔 로비에 앉아 하와이안 셔츠를 입고 노트북을 두들기는 N잡러가 있다.
안쪽으로 조금 더 들어가면 줄지은 모션데스크가 보인다. 엊그제 서핑을 하다 왔는지 새까맣게 탄 사람이 오늘은 새까만 모니터와 씨름하고 있다. 스타트업 대표다.
그 왼편 파란색 유리벽 안, 탱크톱을 입고 누구보다 자유롭고 편하게 모니터 세상을 누비는 프리랜서가 있다.
그 사이 복도에는 그리스에서 왔다던 여자와 다음 주에는 오사카로 떠날 남자, 디지털 노마드가 지나다닌다.
복도 끝 커피바 앞에는, 오전엔 한라산 날다람쥐였다가 보송한 얼굴로 돌아온 리모트워커가 있다. 이제 막 도착해서 커피를 내리러 왔다.
왼쪽으로 더 깊숙이 들어가면 책꽂이 앞 빈백에 드러누워 잠시 눈을 감고 영감을 찾아오는 1인기업가를 만난다.
그리고 다시 뒤돌아가면 채광 좋은 통창 아래 반짝이는 책상 위, 흔들리는 나뭇잎 아래에서 글을 쓰는 사람, 내가 있다.
'한국어'가 아니라 '나의 일'이 공통어가 되는 이곳, 공유오피스 '오피스제주'의 철문을 열어젖히면 자신의 리듬대로 일하는 사람들이 있다.
N잡러, 디지털노마드, 프리랜서, 리모트워커, 1인기업가, 워케이션이라는 단어가 살아 움직이기 시작한 것은 이때부터였다.
나는 연애만 글로 배운 게 아니었다. '긱 이코노미'도 글로 배웠다.
때는 2019년, 신입시절. 매일 하루에 1개의 HR 관련 아티클을 읽고 정리했다. 그날의 아티클은 '인재노마드시대, 채용브랜드를 관리하라'. 2017년에 쓰인 동아 비즈니스 리뷰 아티클이다.
프리랜서 및 계약직의 비중이 전체 인력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노마드화’는 기업 인력 활용의 중요 고려 요인이다. 과거처럼 한 직장에 묶이지 않고 전문성을 바탕으로 여러 기업을 대상으로 고가의 용역을 제공하는 인력들이 많아지고 이런 인력을 잘 찾아 활용해야 경쟁력을 높일 수 있는 세상이 다가오고 있다. 이런 인력들을 확보, 검증, 연결하는 중개서비스도 일반화될 것이다.
출처 : 동아 비즈니스 리뷰 / 인재노마드시대 ,채용 브랜드를 관리하라
이때 처음 긱 이코노미, 노마드화에 대해 알게 됐다. 그러나 '앞으로 이런 변화가 있겠군' 정도로 피상적으로만 받아들였다. 알파고가 나오기 전, chat GPT가 나오기 전에 4차 산업혁명을 텍스트로만 이해하는 사람처럼 말이다.
업무 강도가 높기로 악평이 난 업계의 HRer로서, 솔직히 긱 이코노미의 바람은 그다지 신경 쓰이지 않았다. 직원경험 강화, 리텐션 향상, 성과관리 등 눈앞에 놓인 과제들만으로도 벅찼기 때문에 회사 밖 다양한 계약형태와 직업의 모양에 대해서는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그래서 전통적인 "직장인"의 삶에만 매몰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제주도 사계리에 위치한 이 공유오피스에는 나와 전혀 다른 삶의 방정식을 가진 사람들이 모였다. 삶에 주어진 문제는 같을 텐데, 풀이 방식이 전혀 다르다. 회사가 없으면 존재 이유가 사라지는 것 같던 인사담당자는, 회사라는 테두리 없이도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잠시 회의를 느꼈다.
그리고 그곳의 사람들과 놀고 마시며, 자고 운동하며 차츰 5년 전에 읽던 아티클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친구들에게 ‘이런 세상이 왔다, 이런 삶이 당연한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전하며 흥분감을 감추지 못했다. 친구들은 ‘제주도니까 아무래도 더 그렇지 않을까‘ 라는 말로 답했다. 나는 그 말이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고 생각한다.
정말 제주도만 그런걸까?
5개월 뒤, 육지에 왔다. 그 환상과 흥분감은 제주에서 끝났어야되는게 맞다. 그런데 나는 그 환상을 삶으로 살아내보기 시작했다. 회사가 필요 없어진 사람들 속에 뛰어들었다. ‘혹시 나도 그들 중 하나가 될 수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에.
그래서 나는 하이아웃풋 클럽을 하게 되었다. 그 이야기는 다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