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 George, National Gallery, Thames
따뜻한 백숙으로 푸근하게 여는 아침이다. 오늘은 정오쯤에 독서 모임이 있어서 아침 식사를 마치고 부지런히 외출 준비를 하였다. 요즘 들어 너무 열심히 돌아다녔는지 조금 피곤하여, 집을 나서기 직전에 피로를 달래줄 에스프레소 한 잔과 바나나를 목구멍에 밀어 넣었다.
거의 매일 지나가는 St. James Park이지만 매일 달라지는 날씨 덕분에 매번 새로운 장면과 같은 느낌이 든다. 새삼 행복이란 게 별 건가 싶다.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도 미묘하게 다른 자그마한 변화를 감지하고, 찾아낸 작은 것들을 감탄하는 마음으로 바라보며 살아간다면 삶이 훨씬 더 다채롭고 즐겁지 않겠나. 일상을 여행처럼 산다는 게 이런 거지 뭐.
아주 흐리진 않지만 그렇다고 아주 맑은 날씨도 아닌, 오묘한 날씨이다.
약 두 시간의 모임을 마치고 모임원 중 친해진 한 분과 오후를 함께 보내기로 했다. 그분은 패션과 쇼핑에 관심이 많은 분이셨는데, 괜찮은 쇼핑몰을 하나 알고 있다며 나를 Dover Street Market으로 인도하였다. 런던의 Haymarket에 위치한 이 쇼핑몰은 여러 다양한 명품브랜드와 스트리트브랜드가 함께 어우러져 독특한 분위기를 형성하고 있는 감각적인 컨셉 스토어이다. 이런 곳이 있는 줄 전혀 몰랐는데 덕분에 흥미로운 곳을 새롭게 알게 되었다. 이 건물의 위층에 카페도 있다고 하여서 올라가 보았더니 때마침 런던 패션 위크 기간이어서인지 모델로 추정되는 멋진 선남선녀들이 카페 곳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선호하는 분위기의 카페는 아니어서 도로 나왔다.
예전부터 점찍어두기만 하고 한참 동안 방문을 미뤄온 카페에 드디어 방문해 본다. 창가에 와인 병들이 쭉 늘어서 있어서 그런가, 왠지 맛있는 샤퀴테리를 팔 것만 같다.
가게 안에 들어오니 샤퀴테리는 없었고, 그 대신 프랑스풍의 빵들이 다양하게 진열되어 있었다. 바게트부터 뺑오쇼콜라에 이르기까지 갖가지 다양한 종류의 프랑스 빵들이 있었고, 음료로는 와인뿐만 아니라 커피도 갖추고 있어 선택의 폭이 넓었다.
프랑스풍을 지향하고 있어서 그런지 런던 카페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스콘을 적어도 이곳에서만큼은 볼 수 없었다.
아몬드 크루아상과 (아마도) 코르타도를 주문했는데, 웬걸? 커피도 빵도 둘 다 너무 맛있어서 당장에 초콜릿 번도 추가로 주문했다.
앞선 크루아상에 비하여 초콜릿 번은 평범했지만 어쨌든 전반적으로 커피도 빵도 모두 다 맛있었다. 다른 메뉴들도 먹어보기 위해 재방문하고 싶은 의사 100%이다. 런던 내 거의 모든 카페가 그렇긴 하지만 어쨌든 이곳의 직원들 또한 매우 친절했고 심지어 귀엽기까지 했다. 아주 앳되어 보이는 (한국인으로 추정되는) 남녀 두 명이 일하고 있었는데, 젊고 어린 청년들을 보면 귀여워하는 병에 걸린 내게 그들의 모습은 꼭 동물의 숲 주민들처럼 앙증맞게 보였다.
식후 산책하듯 방문하다시피 하는 내셔널갤러리에 오늘도 역시 방문했다. 훌륭한 예술 작품들로 가득한 이곳을 방문하는 일은 매일 반복되어도 결코 질리지 않을 루틴인데, 심지어 내셔널갤러리는 작품 구성에 자주 변화를 주어 방문할 때마다 새로운 느낌을 받도록 만든다. 이날은 전에 못 보던 <The Triumphs of Caesar(카이사르의 개선)> 연작이 새롭게 전시되어 있었다.
Andrea Mantegna(만테냐)는 고대 로마 예술에 깊이 매료되어 있었던 르네상스 시기 화가로, 고전 문헌 및 로마 유물 등을 연구하여 이를 바탕으로 아홉 점의 대형 작품들을 제작했다고 한다. 내셔널갤러리에 전시된 이 연작은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승리를 기념하는 개선 행렬을 주제로 한 것이며, 당시 만테냐는 Mantua의 궁정화가로 일하며 이 시리즈를 완성하였고, 처음에는 Mantua의 Gonzaga 가문 소장품이었다가 현재는 찰스 3세의 소장품이자 영국 왕실 소장품으로 아주 귀중한 대우를 받으며 보존되어오고 있다고 한다. 1629년 찰스 1세가 이 연작을 매입한 후, 1630년경 이래로 쭉 Hampton Court에 전시되어 왔으나 현재 그 전시공간은 2026년까지 보수작업이 진행될 예정이라 임시로 내셔널 갤러리에서 6점을 전시하게 되었단다.
Triumphs 연작을 보고 난 뒤 계속해서 갤러리의 여러 소장품들을 산책하듯 두루 살펴보았다.
아래 작품은 프랑스 바로크 시기를 대표하는 화가 Nicolas Poussin(니콜라 푸생)의 작품이다. Landscape(풍경)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지만 이 작품은 인간의 공포 반응을 세 단계로 나누어 표현하고 있는 철학적인 작품이다. 뱀에 의해 죽은 왼쪽의 남성에 대한 반응으로 각각 오른쪽의 남성은 '극도의 공포'를, 중앙의 여성은 '놀람 및 불안'을, 먼 뒤편의 사람들은 '무관심'을 드러내고 있다. 이 세 가지 반응이 마치 목가적인 것처럼 보이는 풍경 속에 녹아들어 이 작품의 아이러니한 매력을 만들어내고 있다.
푸생의 또 다른 철학적 작품인 <신상 앞에서의 바쿠스 축제>이다. Bacchus(바쿠스)는 익히 잘 알려진 술의 신으로, 이 작품은 인간 본성의 광기, 쾌락, 감정과 이성의 경계 등을 담고 있다.
비슷한 분위기의 또 다른 작품 <판의 승리>는 신화 속 축제 장면을 그리고 있다. 그야말로 술판, 난장판이 따로 없다. 그저 그림일 뿐인데 어디선가 왁자지껄한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다.
<판의 승리>와 같이 인간 쾌락의 절정을 신화 속 한 장면에 은유하여 그려낸 또 다른 작품 <실레누스의 승리>이다. 설명에 따르면 이 작품은 리슐리외 추기경을 위해 푸생이 제작한 바쿠스 연작 중 하나이며, 한때는 진품이 아닌 모작으로 여겨져 왔던 바 있으나 보존 및 분석 결과 현재는 푸생의 진품으로 인정받고 있다고 한다.
아래는 Claude(클로드 로랭)의 대표작 중 하나인 <성 우르술라의 배 출항이 있는 항구 풍경>이다. 특유의 색감 및 빛 표현, 그리고 삼각형 구도를 그림 속에 담아냈던 클로드 로랭은 Turner(터너)의 작품 스타일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던 화가로 알려져 있다.
클로드의 아름다운 화풍이 드러나는 또 다른 작품 <항구>이다. 그림 속의 풍경은 실제로 존재하는 장소가 아닌 가상의 장소를 그린 것이지만 로마에 실제로 존재하는 건물들을 본떠 풍경 내에 배치함으로써 이상에 현실성을 더하였다.
우리에게는 거울 속 비너스의 시선으로 유명한 작품, 벨라스케스의 <로크비의 비너스>이다. 거울 속에 비친 비너스의 시선이 마치 비너스 등 뒤에 선 관람자를 향하고 있는 것처럼 보여 감상자를 당황하게 만드는 흥미로운 그림이다. 설명문에 의하면 당시 스페인에서는 엄격한 종교 검열로 인하여 여성 누드화가 그려지는 일이 매우 드물었다고 하니 이 작품은 단순한 누드화를 넘어 그 자체만으로도 대담하고 도전적인 시도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어지는 32번 방에 얼마나 훌륭한 작품이 있는가에 대하여 구구절절 써 놓았다. 17세기 초, 안니발레 카라치와 귀도 레니를 주축으로 한 고전주의적 양식과 카라바조를 주축으로 한 강렬한 자연주의적 양식이 이탈리아에서 크게 성행했음을 설명하고 있다.
카라바조의 너무나도 유명한 작품 <도마뱀에 물린 소년>이다. 올 때마다 한참을 들여다보고 가곤 하지만 카라바조의 작품은 어쩐지 봐도 봐도 질리지 않는다.
카라바조의 또 다른 작품 <엠마오의 만찬>이다. 종교적으로 중요한 순간을 사실적이고도 극적인 묘사를 통해 카라바조만의 방식으로 캔버스 위에 구현했다.
또 다른 카라바조의 그림 <세례 요한의 머리를 들고 있는 살로메>는 종교 장면의 한 순간을 그리고 있지만 사실 카라바조의 개인사와 내면세계를 그려낸 작품이라고 해설되고 있다. 이 그림은 카라바조가 로마에서 살인을 저지르고 난 후 나폴리에서 도피 생활을 하는 동안 그려졌으며, 이는 그의 죄책감과 불안이 극에 달하던 말년의 시기에 해당한다. 작품의 색조, 명과 암의 대비, 인물들의 표정을 통해 그가 작품으로 속이야기를 털어놓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다음은 Guercino(귀레치노)의 <성 토마스의 의심>이다. 앞선 카라바조 또한 일찍이 동일한 장면을 소재로 하여 동일한 제목의 작품을 그린 바 있다. 극적인 긴장감이 감도는 극사실주의의 카라바조의 그림과 달리, 귀레치노의 그림은 좀 더 부드럽고 온화하다.
성모가 입은 옷의 질감과 모자의 다정하고 따스한 분위기가 눈에 띄는 이 그림은 Sassoferrato(사쏘페르라토)에 의해 그려졌다.
신적, 영적 순간을 묘사한 Domenichino(도메니키노)의 이 작품은 요한복음의 저자 성 요한이 신의 계시를 받는 장면을 그리고 있다. 설명문에 따르면 독수리는 성 요한을 상징하는 동물로, 당시 사람들은 독수리가 하늘과 가장 가까이 나는 새라고 생각했고, 이러한 독수리를 하늘에서 계시를 받는 성 요한에 비유했다고 한다. 또한, 그림 속 성 요한의 인체 비율이나 자세로 미루어 보아 도메니키노는 고대 그리스 로마 예술에서 인체의 이상적인 비례 및 자세를 학습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기괴하고 기묘한 분위기의 이 그림은 Salvator Rosa(살바토르 로사)가 그린 <마녀들이 주문을 외우는 모습>이다. 그림 속 마녀들은 어둠 속에서 묘약을 만들고 주문을 외고 있으며, 이외에도 잔혹하고 기괴한 장면들이 곳곳에 함께 배치되어 있다. 로사는 화가이자 시인이며 연극배우이기도 했다는데, 이 작품을 그리던 때쯤 <La Strega(마녀)>라는 시도 쓴 바 있다고 한다. 이때 당시 로사는 어떠한 불안을 겪고 있었던 것일까?
마녀들의 기괴한 판타지를 그렸던 로사는 또한 편 <파스카리엘로로 분장한 자화상>을 그렸다. 이 작품 속에서 로사는 자신을 화가가 아닌 배우로 표현하며 스스로가 지닌 다양한 정체성과 재능을 초상화에 담아냈다.
내셔널 갤러리에 와서 터너 작품을 보지 않고 갈 수는 없는 법. 이 작품은 J. M. W. 터너의 걸작들 중 하나로 손꼽히는 <폴리페모스를 조롱하는 율리시스 - 호메로스의 오디세이로부터>이다.
신화에 따르면 영웅 율리시스(오디세우스)는 외눈박이 거인 폴리페모스의 동굴에 갇혔지만 기지를 발휘하여 폴리페모스를 술에 취하게 만든 뒤 눈을 찔러 실명시키고 극적으로 탈출에 성공한다. 하지만 오만했던 율리시스는 도망치던 도중 자신의 정체를 밝히며 폴리페모스를 조롱했고 이로 인해 폴리페모스의 아버지인 포세이돈의 분노를 사고야 만다.
그림 속에서 좌측의 산속에서는 거인 폴리페모스의 실루엣이 드러나며, 반대편 아래로는 전진하는 율리시스의 배 뒤로 아폴로의 전차가 뒤따르는 듯 해가 떠오르고 있다. 바닷속에는 유영 중인 바다의 요정들이 그려져 있다. 이 그림은 신화적인 내용을 통해 상징적인 메시지를 전달함과 동시에 강한 색채와 뿜어져 나오는 듯한 빛으로 그 작품 자체의 미적인 강렬함을 관람자에게 전한다.
Turner(터너)의 작품을 보았다면 John Constable(존 컨스터블)의 작품 또한 빼놓을 수 없는 일이다. 이 작품은 컨스터블의 후기 작품으로, 작품의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조슈아 레이놀즈 경에 대한 그의 헌사와도 같은 그림이다. Joshua Reynolds(조슈아 레이놀즈)는 영국 왕립 미술원의 초대원장으로, 영국 회화 역사에 공헌한 인물이고, 컨스터블은 레이놀즈를 깊이 존경했다고 한다. 컨스터블은 그림 속 기념비를 통해 죽음은 있을지언정 그가 남긴 예술은 영원함을 말하고자 하였고, 기념비 옆으로 미켈란젤로와 라파엘로의 흉상을 두어 레이놀즈를 이 두 거장에 견줄 만큼 훌륭한 사람으로 묘사하였으며, 전경에 사슴을 배치함으로써 자연의 순수함과 예술이 지닌 생명력을 표현하고자 한 것으로 해석해 볼 수 있다.
수많은 작품들을 둘러보고 나가기 직전 들른 마지막 방에서 전에 못 보던 작품을 발견했다. Edgar Degas(에드가 드가)의 <머리를 빗겨주는 모습>이다. 온통 붉은색으로 칠해져 있어 못 보고 지나쳤을 리가 없을 텐데, 새로 가져다 놓은 작품인가? 아무튼 이 특유의 붉은 색채가 매우 인상적이다. 드가의 여느 작품들과는 제법 다른 느낌도 나고 말이다. 설명문에 의하면 말년의 드가의 후기 화풍은 20세기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주었고, 특히 이 작품의 경우 Matisse(앙리 마티스)에게 지대한 영향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마티스는 이 작품을 소장하기까지 했다고 한다.
그렇게 오늘도 내셔널갤러리를 한바탕 실컷 즐기고 나왔다. 집에 가는 길 여느 때와 같이 Sainsbury's에 들러 장을 보았다. 가성비와 맛 모두 좋은 과일인 사과와 치즈는 필수 구입 항목이다.
뭐 하나에 꽂히면 흡사 광인처럼 매달리는 나는 오늘도 역시 치즈&꿀 오픈샌드위치가 절대 빠질 리 없는 구성의 저녁 상을 차렸다.
추적추적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었지만 이제 이깟 비쯤은 별 것도 아니다. 내리는 비에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템즈강 러닝을 나왔다. 비가 내리니 강변 따라 거니는 사람들이 줄어들어 오히려 좋은 것 같기도 하다.
비가 오는 흐린 밤이어도 템즈강변의 풍경은 예쁘고 낭만적이기만 하다. 한국에 돌아가면 템즈강 따라 달리던 일상이 가장 그리울 것이다.
집에 돌아와 따뜻한 꿀물로 축축이 젖은 찬 몸을 녹인다. 한국으로 돌아갈 날이 점차 가까워지니 매 순간 일분일초가 너무나도 애틋하게만 느껴진다. 런던이 너무 좋아서 그럼 한 번 살아보자며 온 것이었지만 한편으론 이번 두 달 살이를 통해 런던에 대해 간직하고 있던 나의 아름다운 기억에 혹여나 금 가기라도 하면 어쩌나 두렵기도 했다. 하지만 살아보니 웬걸, 오히려 런던이 전보다도 더 좋아져 버렸다.
이 달콤한 꿀물이 나중에 런던으로 향하는 포트키(Portkey)가 되어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터무니없는 상상을 하는 동안 달콤한 꿀물이 온몸에 사르르 퍼진다. 그래, 아직 오지 않은 미래에 대한 씁쓸한 생각은 저리 치워두고 지금 이 순간을 온전히 달콤하게 즐기자. Good nigh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