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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런던일상 - 흐르는 시간 속 변하지 않는 것들

대영박물관, 메종베르토, 빅벤

by Daria



지난 런던 여행을 통해 런던이라는 도시 자체가 지닌 매력에 흠뻑 빠져버린 나이지만, 무엇보다 나를 이번 '런던살이'로 이끈 가장 큰 동기는 사실 '매일 미술과 함께하는 삶'에 대한 희구였다. 런던에는 내셔널갤러리, 테이트모던, 테이트브리튼, 코톨드갤러리, 대영박물관, 자연사박물관, 빅토리아 앤 알버트뮤지엄 등 세계 유수의 미술관 및 박물관들이 많을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관들이 대중에게 무료로 개방되어 있다. 그래서 나는 런던에 머물며 매일 공원 걷듯이 미술관을 거닐고 싶었고, 틈 날 때마다 소셜미디어 게시물을 보는 대신 우수한 미술 작품들을 보며 미감과 영감을 채우고 싶었다. 그리하여 나는 런던에 머무는 동안 가능한 한 매일 미술관이나 박물관을 방문했고, 정말로 소셜미디어 앱은 내게서 멀어진 반면 그 빈자리에는 훌륭한 미술 작품들이 채워졌다. 내가 원하고 바랐던 바를 충분히 이루며 런던에서의 충만한 삶을 이어나가고 있던 나날들 속, 오늘 나의 하루는 British Museum(대영 박물관)을 통해 채워질 예정이었다. 대영박물관은 이전에도 방문하였지만 워낙 규모가 큰 탓에 한 번에 모든 전시관을 다 둘러보기에는 어려워 몇 차례에 걸쳐 재방문을 하게 됐다.

(아, 오늘은 아침 식사 사진 찍는 것을 깜빡했다. 뭘 먹었더라? 기억이 나지 않는 것을 보면 아마도 평소와 크게 다르지 않은 메뉴였을 것이다. )




오늘따라 입장 대기줄도 매우 길었고 내부에도 방문객들이 아주 많았다. 북적북적 모여 앉은 사람들 위로 Kayung Totem Pole이 천장을 향해 우뚝 솟아 있다. 기둥 상단에는 Yetl(예틀)이 조각되어 있다. 이 기둥은 Graham Island(그레이엄 섬)의 Kayung 마을 원주민들이 자신의 집 앞에 세워두기 위한 용도로 만든 것들인데, 1884년 마을이 폐허가 된 후 Charles Frederick Newcombe에 의해 수집되었고 그 후 대영박물관에 기증되어 이곳에 자리하게 되었다고 한다.




오늘 감상의 시작점이 될 이곳은 기원전 6000년에서 1500년 사이, 고대 메소포타미아 시기를 다룬 전시관이다. 굉장히 오래된, 귀한 유물들이 놓여있는 공간이다.




무엇의 형상인지 알쏭달쏭하게 생긴 이것은 덤불 속의 숫양(혹은 염소)으로, 마치 먹이를 찾듯 식물의 가지에 앞다리를 올리고 서있는 모습을 형상화했다고 안내되어 있다. 이러한 조각품들은 당시 수메르인들에게 있어서 중요한 존재였던 자연과 풍요로움을 상징했다고 한다.




아래는 The Standard of Ur(우르의 깃발)이라는 유물인데, 발굴 당시 훼손 정도가 심하여 섬세한 복원 과정을 거쳐 현재의 상태로 전시될 수 있었다고 한다. 이 유물은 전쟁의 장면과 평화 및 번영의 장면, 대조되는 두 장면을 묘사하고 있는데, 사진 속 면은 War Side(전쟁)이다. 전투 이후의 왕과 병사들, 그리고 포로들을 묘사하고 있다.




매우 화려하게 생긴 이 악기는 The Queen's Lyre(여왕의 수금)으로, 갖가지 장식적인 요소들로 화려하게 만들어진 현악기이다. Queen's Lyre이지만 아마 여왕이 직접 연주하기 위한 용도로 만들어진 악기라기보다는 여왕을 위한 중요한 행사에서 전문 연주자들에 의해 사용된 악기였을 것이다.




이 멋있는 검은 Bronze swords from the Babylonian army(바빌로니아 군대의 청동검)이다. 기원전 약 1100년에서 900년경 사이에 제작 및 매장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이 검에는 명문이 새겨져 있는데 그 글에 바빌론의 왕 Marduk-nadin-ahhe(기원전 1099-1082년 재위)와 그의 장교 Shamash-Killani의 이름이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전투 후에 신에게 바쳐진 칼이거나 무덤에 매장된 칼일 확률이 높다고 안내되어 있다.




기원전 860-850년경의 것으로 추정되는 이것은 The Sun God Tablet(태양신 석판)이며, Sippar에 있던 태양신 Shamash 신전에서 샤마쉬 신상이 파괴되고 그의 제의가 중단되었다는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The last woman standing이라고 명명된 이 유물은 King Ashur-bel-kala에 의해 제작된 것으로, 정교하고도 비용이 많이 드는 방식으로 누군가를 모욕하고자 한 행위의 산물이었다고 한다. 여성이 완전히 벌거벗은 형상을 하고 있는 이 조각상에는 글이 새겨져 있는데, 그에 따르면 이 조각상을 본 사람들은 이 형상이 누구인지 알아볼 것이며, 그 여성을 조롱하고 비웃게 될 것이라고 암시한단다. 이 조각상은 단순한 예술 작품이 아니라 왕이 권력을 이용하여 누군가를 공개적으로 망신 주고자 한 하나의 수단이었던 것이다.




바빌로니아 포로들의 수용소 생활 모습을 묘사한 이 부조 유물은 Assyrian Stone Relief(아시리아 석재 부조)로, 당시 아시리아 제국의 힘과 우위를 과시하기 위한 왕실 선전 도구였다. 당시 메소포타미아 북부의 아시리아 왕(군대)들은 자주 바빌론 군대와 충돌하였고, 기원전 689년, 648년 두 차례에 걸쳐 바빌론은 아시리아 군에 의해 함락되고야 말았다고 한다.




아래의 방패와 투구는 Urartu(우라르투) 왕국의 유물들이다. 방패는 신전의 외벽을 장식하기 위한 용도였고, 투구는 실제 우라르투 병사들이 사용하던 것들이라고 한다.




영국 철기 시대 후기의 무덤을 재구성한 아래 전시물은 철기 시대 후반기 브리튼의 고위 계층이 어떠한 생활양식을 지니고 있었는지 어렴풋이나마 살펴볼 수 있도록 보여주고 있다.




또한, 로마 시대 브리튼의 개인 위생과 미용 문화에 대해 보여주는 전시물들도 다음과 같이 마련되어 있다. 고대 로마인들은 건강과 웰빙을 위해 개인의 몸을 청결히 관리하는 것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다고 하며, 그 예로 향유/향수병, 거울, 빗, 머리핀, 귀지 제거용 도구, 손톱 청소기, 족집게 등을 보여주고 있다.




여러 종류의 화려한 도자기 그릇들도 전시되어 있다.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의 이 도자기들은 19세기 초 웨일스에서 제작된 것들이라고 한다. 조지안 시대 말기에서 빅토리아 시대로 넘어가기 직전쯤의 유행 양식을 반영하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현대 기타의 조상 격으로 여겨지는 악기 'Citole(시톨)'이다. 자세히 보면 장식이 매우 화려하다. 귀족들의 연회 자리에서 이용되던 악기라고 하니 이해가 간다.




이렇게 열심히 둘러보았는데도 아직도 못 본 구역들이 남아있다. 박물관 규모가 너무 크고, 꼭 미로처럼 복잡한 데다가, 사람은 너무나도 많아서 정말 온몸의 진이 다 빠지는 것만 같다. 게다가 순수 미술을 좋아하는 나로선 유물 위주의 박물관은 흥미롭기는 하지만 상대적으로 덜 매력적인 것이기도 하여, 대영박물관에는 앞으로 또다시 찾아올 것 같지 않다. 그야말로 "너무 힘들다"! 나는 마지막으로 굿즈샵을 둘러보고 대영박물관을 도망치듯 빠져나왔다.




박물관을 나온 뒤 당 충전을 위해 Maison Bertaux(메종 베르토)를 방문했다.




먹는 사람은 나 혼자 뿐이지만 욕심을 내어 스콘과 케이크를 주문했다. 예전에 메종베르토에서 처음 스콘을 먹었을 때 너무 만족스러웠던 기억을 갖고 있어서 그때의 행복을 다시금 소환하고자 스콘을 주문한 것인데 어쩐 일인지 그때 그 스콘 맛이 나지 않았다. 예전의 기억이 미화된 것일까, 아니면 정말로 스콘의 맛이 변한 것일까. 분명한 것은, 예전에 먹었던 메종베르토 스콘은 따뜻했고 지금 먹는 스콘은 차갑다는 것이다. 아마도 그때는 갓 나온 스콘을 먹었던 것이 아닌지, 그래서 맛있을 수밖에 없던 것이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든다. 케이크는 여느 평범한 레어치즈 케이크의 맛이었고 대단히 인상 깊지는 않았다. 불과 며칠 전에 와서 사 먹었던 케이크도 그렇고, 메종베르토가 오래된 케이크 맛집이라고 알려진 것 치고는 그렇게 엄청난 맛인지는 잘 모르겠다는 것이 개인적인 생각이다. 물론 대체로 다 맛은 있다.




며칠 전에 안내받았던 공간과 다른 공간에 착석했는데 이곳 역시 밸런타인데이 기념 장식으로 화려하게 꾸며져 있다. 요정들의 티파티에 온 것처럼 아기자기하고 화려하며 환상적이다.






원래는 앉아서 책을 좀 읽으며 시간을 보낼 생각이었으나 아까 대영박물관에서 체력을 너무 많이 소진했는지 잠기운이 스멀스멀 밀려와 눈이 자꾸만 감겼다. 결국 나는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 자리를 정리하여 나왔다. 집에 가는 길에 마주친 노란 꽃이 예뻐서 사진을 찍었다. 수선화를 닮았으나 크기가 몹시 작은 것이 정확히 무슨 꽃인지 모르겠다.



집에 가는 길에 Sainsbury's에 들러서 치즈를 샀다. Sainsbury's의 PB 상품들은 합리적인 가격 대비 제품 질이 꽤 괜찮아서 애용하고 있는데, 치즈 또한 제법 맘에 든다.




집에 돌아와 저녁 식사를 하고,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저녁의 여유를 즐긴다. 헬스장에 가야 하는데 저녁을 먹고 나면 만사가 귀찮게 느껴져서 항상 최후의 시간까지 미루고 미룬 뒤에야 겨우 집을 나선다.




거의 저녁 9시가 다 되어서야 헬스장을 향하여 길을 나선다. 나오기 직전까지는 발목에 쇠공이라도 달아놓은 것처럼 발걸음이 무거운데, 막상 나오고 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발걸음도 가볍고 기분도 상쾌해진다. 시원한 밤공기를 들이마시며 빅벤 야경을 봄으로써 기분이 전환되는 효과가 있는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나의 헬스장, The Gym Group - London Charing Cross. 오늘도 한 시간 동안 집중하여 알차게 운동했다. 매번 비슷한 시간대에 가다 보니 항상 마주치는 고정 운동 동료(?)들이 생겼다. 마주치면 우호적인 무언의 눈빛 인사를 주고받기도 하고 가끔 탈의실에서 가벼운 잡담을 나누기 시작했다.




아홉 시 무렵 집을 나섰던 나는 열 시 무렵 헬스장을 나섰다. 약 한 시간이라는 시간이 흐르는 동안에도 빅벤은 여전히 같은 자리에서 같은 모양을 하고 서 있다는 것이 새삼스레 나로 하여금 시간과 역사 속에서의 존재의 상대성을 느끼도록 하였다. 한 시간, 두 시간, 혹은 하루, 일 년,…. 시간은 계속해서 나를 지나가지만 어떤 것들은 그 자리에 그대로 멈춰 서 있다. 내가 이 세상에 존재하기도 전부터 그 자리에 서있던 그것들은 내가 지나간 뒤에도 계속 자리를 지키고 있을 것이다. 수만 번의 해가 뜨고 진 뒤에도, 수억 명의 사람이 오고 간 뒤에도 그들은 한결같이 그곳에 존재한다. 멈추지 않고 끝없이 흘러가는 시간 속에도 어떤 것들은 멈춰있고, 끝없이 변화하는 세상 속에서도 어떤 것들은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인생과 시간이라는 개념 속에서 데굴데굴 구르고 달리며 나아가는 한 인간에게 묘한 안심을 가져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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