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식사로 치즈를 뿌린 닭갈비 볶음밥을 먹고 후식으로 스트룹 와플과 커피까지 곁들였더니 꼭 대학생 때로 돌아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러고 보면 시간이 새삼 너무나 빠르다. 내 정신은 아직도 20대 초중반 그 어디쯤에 머물러 있는 것 같은데 어느덧 이렇게 나이를 먹어서 '건강하게 나이 들기'를 목표로 삼으며 살아가는 어른이 됐으니 말이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평생 젊고 건강할 줄만 알았지 노화에 대해서 고민이란 걸 했던가. 허구한 날 맵고 기름지고 단 걸 먹고 다녔으니 말이다.
오늘은 전부터 궁금했던 Arome Bakery에 가 보려고 한다. 점심때쯤 집을 나와 곧장 소호의 빵집으로 향했다. 날씨가 이토록 좋으니 빵을 사들고 공원에 가서 먹어도 좋을 것 같다.
빵집 앞에 대기줄이 있어서 얼마간 기다려야만 했는데, 처음 도착했을 때만 해도 대기줄이 한 줄 뿐이어서 포장 전용 줄과 매장 이용 줄로 나뉘어 있는지 전혀 모르고 매장 전용 줄에서 기다렸으니, 그렇게 한참을 기다린 시간이 왠지 아까워 그냥 매장에서 먹고 가기로 했다. 햇볕이 따사롭긴 했어도 기온은 낮아 제법 쌀쌀했기에, 따뜻한 실내에서 먹고 가는 것이 결과적으로 현명한 선택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Arome Bakery는 아래 왼쪽 사진의 허니버터토스트로 유명해진 빵집인데, 방문해 보니 허니버터토스트보다 더 먹음직스러워 보이는 다른 빵들이 많아서 나를 몹시 고민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나는 허니버터토스트에 추가로 다른 빵 하나를 더 사 먹기로 마음먹었다.
이번에도 역시 나는 직원에게 'Your Favorite item'을 물어보았고, 그리하여 허니버터토스트와 아몬드크루아상 두 가지를 주문하였다.
허니버터토스트는 우리가 아는, 중고등학생 때 동네 빵집에서 흔하게 사 먹던 그 허니버터토스트 맛이었다. 맛이야 물론 있었지만 특별함은 전혀 없었고 오히려 약간 실망스러울 정도였다. 이게 그렇게 극찬할 정도인가 의아한 맛이었다. 뭐 그래도 맛은 있었다. 우리가 아는 그 맛이다.
직원의 추천을 받아 구매한 아몬드크루아상이 오히려 정말 맛있어서 감탄을 자아냈는데, 결이 살아있는 바삭한 크루아상 안에 고소하고 달달한 아몬드크림이 한가득 들어 있어서 정말 맛있었다. 하긴 아몬드크루아상을 맛없게 만드는 빵집이라면 진지하게 레시피에 대해서 다시 고민할 필요가 있을 정도로 아몬드크루아상은 웬만해서 맛없기 힘든 재료들로 구성되어 있다. 어쨌든 아무리 그렇다 해도 Arome Bakery 아몬드 크루아상은 정말 맛있었다! 다른 빵집의 것과 비교해 보아도 확실히 더 맛있다.
런던에서는 가게 안이 만석일 경우 낯선 사람과 테이블을 나누어 쓰는 일이 아주 흔한 편이다. 이번에도 역시 나는 또 다른 방문객 한 명과 식탁을 나누어 썼는데, 그녀는 피스타치오 초콜릿 에스카르고를 먹고 있었다. 사실 아까 그 빵이 너무나 맛있어 보여서 살까 말까 몹시 고민했던 터라 그녀에게 그 빵은 어떻냐고 넌지시 물어보았다. 그녀는 정말 맛있다는 극찬과 함께, 자신은 이 빵이 너무 커서 혼자 다 먹지 못하니 맛을 볼 수 있게 조금 나눠주겠다고 했다. 고마운 마음에 나도 그녀에게 내 빵을 나눠 주었고, 우리는 서로의 빵을 교환해 먹으며 이를 빌미로 하여 이야기를 조금 나누었다. 빵집 이후의 동선이 비슷하면 오후를 함께 보내려고 했는데 각자 예정된 동선이 극명하게 달라서, 아쉽지만 빵집 데이트(?)를 끝으로 작별하였다.
고지방 고열량의 빵을 두 개나 먹고 났더니 제법 배가 부르다. 나는 오늘 가기로 계획했던 Sir John Soane's Museum을 위해 자리를 털고 일어나 또다시 부지런히 발걸음을 나섰다. 반짝반짝 빛나는 햇살 때문에 거리 위의 건물들이 꼭 보석 장신구를 두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Holborn에 위치한 Sir John Soane's Museum의 앞에는 Lincoln's Inn Fields라 불리는 평화로운 공원 부지가 있다. 박물관으로 향하는 길에 자연스럽게 이 공원을 가로질러 산책을 하게 되었다. 평일 한낮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공원에서 여유롭게 햇살을 즐기고 있는 모습이 참 보기 좋다.
잔디밭 한가운데에서 청년들이 모여 무언가 일을 꾸미고 있다(?).
까마귀로 추정되는 새들이 무척 많았는데 하나같이 모두 다 닭에 견줄 정도로 크기가 크다. 런던에 머무는 동안 공원을 산책할 때마다 마주치는 다양한 종류의 조류 및 설치류 동물들을 보면서 느낀 점은 확실히 이 나라 동물들은 우리나라 동물보다 같은 종류여도 몸집이 더 크다. 그래서 가끔 어떤 동물은 "쟤랑 나랑 맞붙으면 내가 질 수도 있겠는데...."라는 생각을 하게 만들기도 한다. 그리고 실제로 그 동물한테 난데없이 얻어맞은 적도 있고 말이다.
창문에 반사된 햇빛이 날카롭게 번쩍 빛나는 건물, 그 아래 많은 사람들이 길게 줄지어 서 있다. 웬 줄인가 하니 Sir John Soane's Museum 입장 대기줄이어서 당황스러웠다. 솔직히 말하면 이 박물관은 그다지 유명하지 않은 곳이라 생각했고, 게다가 오늘은 평일이니 이러한 대기줄 같은 것이 존재하리라고는 눈곱만큼도 예상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게 웬 걸. 내가 이 박물관을 너무 얕잡아 봤나 보다. 참회하는 마음으로 줄 맨 끝에 공손히 섰다.
줄을 서 있는 동안 딱히 할 것도 없고 대화를 나눌 상대도 없었지만 바로 앞의 공원을 멍하니 바라보며 자연이 선사하는 평화로움과 아름다움을 가만히 느껴 보았다.
그렇게 기다리다 보니, 사실 내 뒤에 서 있던 남자가 쉬지 않고 속사포로 떠드는 지경에 귀에서 피가 나기 일보직전쯤, 드디어 나의 입장 차례가 되었다. 런던에서 거의 매일 미술관과 박물관을 드나들었지만 이렇게 오래 기다려서 들어가기는 또 처음이다. 여기에 오기 전까지만 해도 별 기대 없었는데 이쯤 기다리고 나니 도대체 얼마나 대단한 곳인지 기대를 안 할 수가 없게 됐다.
John Soane은 영국의 신고전주의 건축가이자 건축과 교수로, 영국 내 건축계에 대한 그의 공로를 인정받아 1831년 William IV로부터 기사 작위를 수령하여 Sir이라는 칭호를 달게 되었다. 이 박물관은 살아생전 그의 개인 주택이었는데, 그가 이 집을 단순히 주거 목적으로만 삼지는 않았고 처음부터 전시 및 교육공간으로 활용할 의도를 갖고 설계했으며, 생전에는 주거 공간이면서 동시에 아틀리에이자 전시 공간으로 사용되었다가, 사후 즉시 대중에게 개방하여 공식 박물관으로 운영되기 시작했다고 알려져 있다.
이곳은 설계도들이 벽면을 빼곡하게 수놓고 있는 공간이었는데, 관리자로 보이는 한 남성이 갑자기 나타나 벽을 열어젖히고는 사람들을 비밀의 공간으로 안내했다.
그가 벽을 열어 드러내 보인 공간에는 또 다른 그림들과 조각으로 가득했으며, 사람들은 이 마법과 같은 경험에 즐거워하며 남성에게 찬사를 보냈다.
풍자적인 그림들로 잘 알려진 18세기 영국의 화가 William Hogarth(윌리엄 호가스)의 작품 중 하나인 <The Elction>, 인상 깊은 작품이라 찍어 두었다. 정치 및 선거의 부패를 고발하는 풍자화이며, 인물 하나하나 허투루 존재하지 않고 각자의 역할을 지니고 있는 것이 역시 그의 그림답다.
이곳은 조각품들로만 꾸며져 있는 전시 공간인데, 돔형 천장과 그를 통해 쏟아지는 태양광이 빚어내는 모습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오랜 역사가 깃든 온갖 조각품들로 가득 찬 이 비좁고 어두운 공간을 밝게 비추는 단 하나의 빛, 그리고 그 빛의 발원지는 머리 위 저 높은 곳에 떠 있는 눈부신 원(圓)이라는 사실이 공간을 더욱 경이롭게 보이도록 만들었다.
건축가의 집답게 박물관 내의 전시품들은 건축과 관련된 것들이 주를 이루었고 상대적으로 순수 회화의 비중은 적어서 둘러보는 데 비교적 적은 시간이 들었다. 이 박물관에 들어가기 위하여 밖에서 오랫동안 기다렸던 것 치고는 관람하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아서 떠나기에 왠지 아까운 마음이 들기도 했으나 이 정도면 충분히, 실컷 감상한 것 같아 이만 떠나기로 했다.
박물관을 나와 특별한 목적지 없이 걷다가 우연히 발견한 커피숍이 아주 강한 힘으로 나를 이끌어서 홀린 듯 들어가 보았다.
단순하지만 감각적인 인테리어, 차분하지만 활기찬 분위기를 지닌 공간이다. 왠지 커피도 꽤 맛있게 만들어줄 것 같다는 기대가 피어오른다.
전에 쇼디치에서 마셨던 기막힌 에스프레소 맛을 아직도 잊지 못하여 그 후로도 계속해서 새로운 에스프레소 맛집을 갈망하여 찾아다니고 있는 나는 오늘도 역시 살포시 기대를 품고 에스프레소를 주문했다. 떨리는 마음으로 입 안에 한 모금 품은 이 커피는 아쉽게도 쇼디치의 그 커피를 이기지는 못 했지만 분명 맛있는 커피였다. 집에 돌아온 후 룸메이트에게도 이 카페를 매우 자신 있게 추천했을 정도이니 말이다. 참고로 이곳은 Redemption Roasters - Covent Garden이다. 찾아보니 Redemption Roasters는 여러 군데 지점이 있는데 내가 방문한 곳은 코번트가든점이다. 점바점이란 말이 있듯, 다른 지점의 Redemption Roasters 커피 맛은 어떨지 나도 모르겠다.
조금 앉아있다 보니 어느새 갑자기 해가 저물고 푸른 쪽빛 저녁하늘이 나타났다. 유리창 너머로 지나가는 사람들의 수가 급격히 많아진 것을 보니 퇴근 시간대인가 싶다.
나도 슬슬 집에 가서 저녁 일과를 마무리하기 위해 카페를 나왔다. 귀갓길에 M&S에 들러 All Butter 시리즈 쿠키와 쇼트브레드를 샀다. 전에도 한 번 이야기한 바 있듯 M&S의 올버터쿠키 시리즈는 맛있기로 유명하다. 이와 더불어 M&S의 쇼트브레드 쿠키도 꽤 맛있으니 강력 추천한다. 쇼트브레드는 구성도 다양하게 나오니 구입 목적에 따라 적절한 제품을 선택하기에 용이할 것이다.
아까 낮에 빵을 너무 많이 먹어서인지 그다지 시장기가 돌지 않아 바나나와 치즈, 그리고 커피로 가볍게 저녁 상을 차렸다. 달콤한 바나나에 향이 강한 블루치즈를 곁들이니 그 조합이 제법 이색적이면서도 흥미롭다.
저녁을 먹고 난 후 템즈강을 따라 한바탕 달렸다. 맑고 시원한 밤바람이 머리카락을 가르는 느낌이 무척 황홀하다. 눈앞에 멋진 런던 야경이 펼쳐져 그 즐거움을 한층 더욱 돋우는 것은 두 말할 것도 없고 말이다.
찬 바람맞으며 달리고 돌아와 몸속을 따뜻하게 데우기 위해 따뜻한 밀크티를 한 잔 마시고 룸메이트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하루를 마무리한다. 오늘도 여느 때와 같은 하루가 평화롭고 잔잔하게 흘러갔다. 맛있는 음식을 먹고, 예술 작품을 즐기고, 아름다운 런던 풍경 속을 거닐고, 때론 달리면서…. 아름다운 런던에서의 나날들엔 단 하루도 보잘것없이 여겨지는 날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