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오전에 소호에서 독서 모임이 있어 아침 식사 후 늑장 부리지 않고 곧장 채비를 하여 나갈 예정이다. 외출하기 전 돼지불고기와 고추장찌개로 든든하게(아니, 과하게) 배를 채운다. 맛있지만 너무 자극적이야....(그래놓고 제일 많이 먹음)
What a lovely sunny day! 오늘도 날씨가 황홀할 만큼 아름답다. 하늘에서 쏟아지는 햇살이 빅벤에 부딪혀 자글자글 작은 보석 조각들로 깨지고 공중으로 흩어진다.
어느 한 펍 앞을 지나가고 있는데 느닷없이 허공에 물안개가 가득 지기 시작했다. 건물의 2층 주민이 창밖을 향하여 갑자기 스프링클러를 가동한 것이다. 그 아래에 서 있던 행인들은 영문도 모르고 물을 맞게 되었는데 이 만화 같은 광경이 어찌나 웃기던지 나를 포함하여 지나가던 모든 사람들이 다 함께 와하하 웃었다. 햇살을 받아 반짝반짝 빛나는 작은 물방울들이 허공에 가득 흩날리고, 그 아래에서 사람들은 다 같이 어린아이처럼 싱글벙글해하는 풍경이 왜인지 평화롭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 사람이 창 밖에 물을 뿌린 이유는 아직까지 그 누구도 모른다.)
모임 장소까지 걸어가는 동안 얼굴에 따뜻하게 내려앉는 햇빛의 푸근한 감촉이 너무나도 좋았다.
햇살을 받아 더욱 알록달록하게 빛나는 모습에 이끌려 오늘은 차이나타운을 가로질러 가보기로 한다. 잔뜩 달아놓은 빨간 등이 이렇게 예뻤던가? 하늘이 우중충할 때는 한 번도 예쁘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는데 말이지.
오늘도 즐겁게 모임을 마치고 커피숍으로 이동하여 다 함께 수다를 즐겼다. 모임원 중 한 명이 스페인 여행을 다녀왔다며 과자 한 상자를 탁자 위에 펼쳤고 그 덕분에 달콤한 티푸드와 함께 커피를 마셨다. 모임에 참석하시는 분들은 다들 여행을 좋아하여서 여행으로 자주 모임 자리를 비우시곤 한다. 다들 좋은 것 보고, 좋은 것 먹고, 좋은 사람들을 만나며 인생을 알차게 살아가고 계신다. 게다가 성격도 좋고 늘 배려해 주셔서 함께 있는 시간이 즐겁다.
모임이 파하고 난 후 혼자 Maison Bertaux에 갈 생각이었는데 모임원 중 한 분께서 함께 가겠노라 하여 동행하게 됐다. 때마침 친해지고 싶었던 분과 함께 가게 되어 무척 반가웠다. 카페까지 걸어가는 동안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나누며 그 분과 조금 더 가까워지는 것을 느꼈다. 처음 보았을 때는 도도한 고양이와 같은 이미지의 소유자였는데 알고 나니 다정하고 귀여운 분이셨다.
이윽고 메종베르토에 도착하였다. 운이 좋게도 대기줄이 없어 바로 입장하여 주문할 수 있었다. 쇼케이스에 진열되어 있는 온갖 종류의 케이크와 구움 과자들이 식욕을 마구 돋운다. 아기자기한 장식들을 주렁주렁 달아 놓아서 그런지 몰라도 이곳에 오면 꼭 사탕 가게에 온 어린아이가 된 기분이 든다.
한국인들에게는 메종베르토가 스콘 맛집으로 유명하지만 사실 메종베르토는 케이크로 유명한 카페라고 하여 이번엔 케이크를 주문해 봤다. 엄청나게 맛있어서 눈물 날 정도는 아니지만 맛있었다. 케이크 위에 올라간 베리 콤포트에 젤라틴이 섞여 있어 젤리와 같은 식감이었는데 그 점이 다소 내 취향에 맞지 않았다.
이번에 안내받은 공간은 분홍색 벽지를 바른 벽과 천장에 온갖 하트 모양 장식과 장미 장식이 가득하여 동화 속 사랑의 요정의 방에 들어온 것 같았다. 왜 이렇게 꾸며 놓았나 했더니 동행한 분께서 밸런타인데이 시즌이라 그런 것 같다고 하셨다. 듣고 보니 이해가 된다.
메종베르토에서 함께 즐거운 티타임을 즐긴 후 그분께서는 남편과 저녁식사를 하기 위해 귀가하셨고, 나는 또 스콘을 먹기 위해 혼자서 Fortnum&Mason(포트넘 앤 메이슨)으로 향했다. 포트넘 앤 메이슨의 크림 티 세트는 전부터 궁금해서 꼭 한 번 먹어봐야지 벼르고 있던 터라 오늘 생각난 김에 가기로 마음먹었다.
건물 전층을 포트넘 앤 메이슨 매장으로 쓰고 있을 정도로 규모가 크다. Ground층은 각종 차, 스프레드, 치즈, 스낵류, 선물세트 등을 살 수 있는 쇼핑 공간으로 꾸며져 있고, 1층(우리나라 기준으로 2층)은 식기류나 홈웨어들을, 2층(우리나라 기준으로 3층)도 비슷하지만 액세서리와 화장품 등을 함께 취급하고 있다. 또한, 3층에는 세련된 카페, 지하 1층에는 와인 바가 있다. 여기에 더하여, 2층에도 좀 더 작은 규모의 카페가 있는데 이곳에서는 보다 캐주얼한 애프터눈티를 즐길 수 있다. 따라서, 애프터눈티세트를 이용하려면 3층으로 가야 하고, 가볍게 크림티세트만 즐길 거라면 2층도 조용하고 쾌적한 선택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층마다 다른 종류의 상품들을 다루고 있으니 한 층 한 층 오르며 구경하는 재미가 있었다. 인테리어 소품 가게를 구경하는 일은 언제나 즐겁다. 고등학생 때 단짝 친구와 틈만 나면 그러한 가게들을 구경하러 다녔던 기억도 새록새록 난다.
2층(우리나라 기준 3층)에 있는 카페가 바로 이곳이다. 바 테이블도 있고 조금 더 캐주얼한 성격의 티룸이라고 볼 수 있겠다. 하지만 직원들의 서비스는 결코 캐주얼하지 않고 매우 수준이 높다.(물론 가격도...)
오늘의 차는 Royal Blend Black tea. 무척 친절하고 젠틀한 직원에게 오늘도 역시 추천을 받아 메뉴를 선택했다. 마셔보니 과연 직원이 자신 있게 추천할 만하더라. 특정한 향이 두드러지지 않고 아주 조화로운, 그러나 마냥 뻔하지만은 않은 차였다. 누구든 호불호 없이 마실 수 있을 것 같은 부드럽고 풍부한 맛의 차라 왜 Royal Blend라는 이름이 붙었는지 알 것 같다. Victoria Grey 차도 너무너무 궁금했는데 그건 다음에 마셔봐야겠다.
차가 담긴 포트넘 앤 메이슨의 찻주전자와 찻잔도 정말 앙증맞고 귀엽다. 하얀색과 청록색 배합에 알록달록 작은 깃발 무늬가 있는 다구라니!
스콘을 기다리면서 매장 안을 둘러보았는데 벽에 그려진 재미있고 귀여운 벽화가 눈에 띈다. 정말이지 다구도 그렇고 벽화도 그렇고 참 아기자기한 공간이다.
스콘을 주문하니 플레인 스콘과 프루트 스콘 각각 한 덩이씩 총 두 덩이가 제공된다. 클로티드크림과 과일잼도 빠지지 않고 함께 나온다. 크림과 쨈은 아마도 포트넘 앤 메이슨의 자사 제품일 것으로 추정되는데 정말 맛있었다. 이 클로티드크림을 G층에서 판매하지 않을까 싶어 나가는 길에 열심히 살펴봤는데 아무리 샅샅이 뒤져 보아도 판매용 클로티드크림은 없었다. 쨈과 버터, 심지어 치즈도 있는데 클로티드크림만 없더라.
아무튼 스콘은 아주 훌륭한 정도는 아니지만 보통 이상 정도의 맛이라고 느껴졌다. 특히, 스콘을 따뜻하게 데워 준 점이 참 좋았다. 아무리 잘 만든 빵일지라도 차갑게 식은 상태로 내면 그 맛이 좀 덜한 느낌이랄까.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내 취향은 그렇다. 난 따뜻한 빵이 조금 더 좋다.
시간이 지나니 차가 너무 진하게 우러나서 우유를 부어 마셨다. 사실 난 이렇게 진해진 차에 우유를 부어 마시는 것을 좋아해서 일부러 차가 진해질 때까지 기다리곤 한다.
혼자서 여유로운 티타임을 즐긴 뒤 다시 한번 천천히 매장 구경을 하며 나왔다. 포트넘 앤 메이슨에서 판매하는 다구들이 모두 다 너무 예뻐서 정말 정말 정말로 몽땅 사 오고 싶었다. 하지만 이것들을 한국까지 파손 없이 무사히 옮길 자신이 없다. 캐리어에 자리가 없는 것은 물론이고 말이다.
천장에 달아 놓은 샹들리에도 예쁘고, 그 아래 놓인 흰 화병과 푸른색 꽃도 어쩜 참으로 예쁘다. 포트넘 앤 메이슨은 흰색과 푸른색의 대비를 참 좋아하는 것 같다.
매우 다양한 종류의 티 컬렉션이 구비되어 있고, 각종 스프레드들도 많으니 차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이곳 Fortnum & Mason Piccadilly 본점은 매우 추천하는 곳이다. 나는 런던 체류 동안 책을 하도 많이 샀더니 캐리어 안에 뭘 더 이상 담을 공간이 없어서 포트넘 앤 메이슨 제품은 나중에 한국에서 온라인으로 주문하기로 했다.
궁금했던 Fortnum & Mason 매장에 와 보길 정말 잘했다. 직원들도 정말 친절해서 머무는 동안 편안하고 즐거웠으니 다음에도 방문할 의사가 충만하다.
집에 곧장 가기에는 괜히 조금 아쉬워 인근 Waterstones에 들렀다.
아래 그림에서 하얀 동그라미를 친 두 권의 책을 구매했다. 집에서도 나만의 즐거운 애프터눈티타임을 즐기기 위해 엄선한 레시피책이다. 이 책에 있는 레시피들을 하나하나 시도해 볼 생각에 벌써부터 기쁘고 설렌다. 집에서 혼자 음악을 들으며 갖는 티타임은 나와 같은 내향인에게 최고의 힐링 시간이다.
한국에서 수년간 나의 육체를 다듬어주고 계시는 필라테스 선생님께서 이런 엽서들을 아주 좋아한다고 하신 바 있어, 선생님께 사다드릴 엽서도 구경했다. 누가 봐도 "나 영국 다녀왔소." 하는 앙증맞은 그림들이 눈에 띈다.
서점을 나와 집으로 향하는 길에 Tesco에 들러서 야무지게 장도 보았다.
해가 진 저녁의 한적한 St. James Park를 가로질러 간다. 밤에는 사람이 없어서 조금 무섭지만 그래서 더욱 고즈넉한 맛이 있기도 하다.
남은 서양배 한 개를 해치우면서 맥주도 한 잔 곁들였다. 하지만 맥주가 맛없어도 너무 맛없어서 결국 저 한 잔도 채 다 마시지 못하고 배수구에 부어 버렸다. 이 서양배엔 드라이한 화이트와인이 잘 어울렸을 것 같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위장에 쉴 틈도 주지 않고 먹어댔던 오늘 하루는 헬스장에서 운동을 하며 마무리한다. 차근차근 되새겨 보니 좋은 사람들과 모여 알찬 대화를 나누었고, 먹어보고 싶었던 것들도 먹었고, 내게 필요한 책도 샀으니 제법 야무지게 꽉 채운 하루였는 걸? 반짝반짝 빛나는 날씨와 함께 행복을 가득가득, 하루 안에 예쁘게 채웠다. 까만 밤하늘 반짝반짝 빛나는 별빛 아래에서 또 예쁜 꿈을 꿀 수 있도록 이 예쁜 기억을 꼬옥 안고 잠자리에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