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보다 느지막이 뜬 눈앞에 노란 아침 햇살이 따사롭게 쏟아지고 있었다. 이렇게 파랗고 예쁜 하늘이라니! 이런 날씨에 놓칠 수 없는 명소가 하나 있지. 오늘은 그곳에 가야겠다.
오늘의 아침 식사는 칼칼하게 끓인 햄 듬뿍 부대찌개와 밥에 달걀 프라이! 한국에서도 한식을 잘 먹지 않던 내가 영국에 와서 아침마다 한식을 먹고 있는데, 처음에는 이 색다른 아침 메뉴들을 아주 즐겼지만 두달차에 접어드니 슬슬 물리기 시작하고 자극적인 맛에 소화도 영 안 되는 것이(사실 내가 너무 많이 먹어서 소화가 안 되는 거지만) 한식은 이제 그만 먹고 싶은 심정이다. 하지만 우리 엄마 말씀, 단체생활할 때는 맘에 안 드는 것이 있어도 싫은 티 내지 말라 하셨으니 오늘도 양손 엄지를 날리며 아주 맛있게 먹었다. 그리고 사람 마음이란 참 재미있는 것이, 그렇게 맛있다 생각하며 먹으면 진짜 맛있게 느껴진다. 아마 이 집에서 아침밥을 나만큼 많이 먹는 사람도 없을 거다.
날이 지나면서 더욱 후숙 됨에 따라 더 부드러워지고 더 달콤해진 서양배와 함께 디저트 시간을 즐겼다. 새로 산 해리포터 머그에 차를 담아 마시니 입도 즐겁고 눈도 즐겁고, 즐거움이 배가되는 기분이다.
해가 가장 예쁘게 빛날 정오쯤 집을 나섰다. 템즈강 위 다리를 건너는데 강물 위에 누군가가 다이아몬드를 잔뜩 쏟은 것처럼 윤슬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이렇게 반짝반짝 아름다운 날씨에 어딜 가냐고? 바로 Tower Bridge(타워브리지)다. 많은 사람들이 타워브리지에 방문하여 사진으로 보던 것과는 다르다며 실망하곤 하는데, 화창한 날에 가면 사진 속에서 보던 것만큼 정말 예쁘다. 잿빛 하늘 볼 일이 많은 영국에 머물면서 만약 오늘과 같이 맑은 날씨에 당첨된다면 타워브리지에 들러보는 것을 추천한다.
타워브리지가 잘 보이는 Southwark(서더크)의 명당까지 가는데 걸어서 딱 한 시간, 대중교통으로 30분쯤 걸리는데 역시나 나는 걸어서 가는 쪽을 택했다. 워낙 걷기 좋은 날씨이기도 하고 말이다.
가는 길에 봉준호 감독의 신작 <Mickey 17>를 홍보하는 버스를 보고 반가워서 찍었다.
걸어가면서 길거리 곳곳의 풍경을 신나게 찍어댔다. 런던이라는 도시는 그 자체만으로도 구석구석 어디든 참 예쁘지만 맑고 화창한 날씨를 만나면 그 아름다움이 더욱 빛을 발한다. 오며 가며 매일 보는 풍경이어도 볼 때마다 처음 보는 것처럼 신나서 사진을 찍게 된다.
별 걸 다 궁금해하며 찍어놓은 이것저것....
지나가다 POTTER라는 글자를 발견하고 그냥 반가워서 찍은 사진이다. 물론 Harry Potter의 그 Potter가 아니지만 아무렴 어때. (참고로 이곳의 potter는 '도공'을 의미한다. 과거 이곳에는 도자기 공방이 있었다고 한다.)
드디어 도착한 타워브리지 앞. 런던 하면 떠오르는 하늘색 다리가 눈앞에 선명하게 펼쳐져 있다.
햇살이 들이받아 번쩍이는 유리창과 푸른 하늘 아래 놓인 하늘색 다리, 여유로운 한낮의 분위기가 모두 한데 어우러져 이 순간 자체가 너무 예쁘고 소중해서, 이 순간이 사라지는 게 아까워서 오래도록 간직하고 기억하고자 연신 사진을 찍어댔다.
오늘 일광욕을 실컷 한다. 그냥 태양 아래 거니는 것만으로도 사람이 이토록 행복할 수가 있구나. 역시 사람은 해를 보고 살아야 해.
햇볕은 따사롭지만 공기는 차가워서 밖에 너무 오래 있었더니 고되었다. 따뜻한 커피 한 잔, 달콤한 케이크 한 조각과 함께 차가워진 몸을 녹이고자 근처의 커피숍을 찾았다.
어느 지점을 가도 분명 평타는 칠 거라고 확신할 수 있는 카페, Watchhouse에 방문했다. Watchhouse는 커피와 빵 모두 맛있고 매장 인테리어도 깔끔한 데다가 직원들도 친절해서 좋다. 그리고 지점마다 분위기도 조금씩 달라서 뻔하지 않아 더 좋달까.
맛있어 보이는 것들이 너무 많다. 고민하지 않고 종류별로 모조리 다 사 먹을 수 있을 만큼 돈이 많다면 얼마나 좋을까. "여기 종류별로 하나씩 다 주세요."라고 말하는 나 자신을 상상만 해 본다.
매장 규모가 큰 편인데도 만석이다. 아마 타워브리지라는 관광 명소 근처의 카페여서 더 사람이 많은 것 같다.
직원의 추천을 받아 플랫화이트 한 잔과 당근케이크를 주문했다. 나는 항상 직원의 최애 메뉴를 물어보곤 하는데 그리하여 이 날은 당근케이크에 당첨됐다.
라테아트가 곱게 올라간 플랫화이트의 우유는 벨벳처럼 아주 부드러웠고 은은한 산미가 감도는 커피와 함께 한 몸처럼 어우러졌다. 당근 케이크 역시 촉촉하고 포슬포슬한 데다가 과하게 달지 않아서 부드러운 플랫화이트와 정말 잘 어울렸다. 내가 방문한 런던의 카페 직원들은 항상 적절한 메뉴를 잘 추천해 주어 언제나 만족스러운 선택을 이끌어내곤 했는데, 손님을 응대하는 직원이라면 자사의 제품에 대해서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어야 한다 생각하는 나로선 이 점을 참 높이 사는 바이다.
손님으로 가득한 데도 매장 안이 소란스럽지 않고 아늑하다. 노트북을 펼쳐 놓고 일에 집중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보인 것으로 보아 평소 조용하고 깔끔한 카페로 잘 알려져 있는 모양이다.
오래 지나지 않아 카페에서 나와 집으로 향하는 길에 다시 타워브리지를 만났다. 아까보다 해가 조금 더 낮게 내려와 더욱 따뜻한 색채로 물든 풍경이다.
조금 걷다 보니 어느덧 세상이 노을로 붉게 물들었다. 곧장 집에 들어가기에는 조금 아쉬워 전쟁박물관에 들렀다 가기로 했다.
앞서 두 차례 방문한 바 있으니 오늘은 곧장 2차 세계대전 전시실로 향했다. 사진 속 게시된 설명에 따르면, 1차 세계대전 후 이탈리아, 일본, 독일 등의 국가에서는 민족주의 세력이 커져갔고, 영국, 프랑스, 미국 등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국가들과의 정치적 대립이 점차 뚜렷해짐에 따라 1930년대, 두 번째 세계대전이 현실로 다가오고 있었다.
당시 이탈리아, 독일, 일본에 대한 내용이 적혀 있다. 무솔리니는 아비시니아를 정복했고, 히틀러는 라인란트를 점령하고 오스트리아를 흡수했으며, 일본은 상하이를 점령했다는 내용이다.
이 세 국가에 대해 조금 더 자세한 내용이 언급되어 있다.
1938-39년, 독일의 체코슬로바키아 침공 사건을 기점으로 유럽의 평화는 깨지고 점점 더 뚜렷하게 2차 세계대전으로 향하고 있음을 설명하는 내용이 소개되어 있다.
이윽고 1939년,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고 이어서 노르웨이, 프랑스, 영국으로까지 전쟁을 확장해 나갔다는 내용이 안내되어 있다.
독일의 폴란드 침공 이후 이어진 독일-영국-프랑스 간의 Bore War(지루한 전쟁) 시기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 당시 영국과 프랑스는 폴란드 침공에 대하여 독일에 선전포고를 날렸으나 정작 서부 전선에서 큰 육상 전투는 진행되지 않은 채 서로 긴장 상태만 유지하는 긴 시간을 이어갔다. 영국-프랑스 연합군은 영국의 해군 전투력을 이용하여 독일의 무역과 물자 공급을 차단하고 독일 경제, 그리고 정권 내부의 붕괴를 노렸으나 결과적으로 이 전략은 실패하였다.
아래는 1940년에 있었던 덩케르크 철수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이 철수 작전에 대한 이야기는 영화로도 제작되었을 만큼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건 중 하나인데, 당시 독일군의 맹렬한 기세에 덩케르크 항구에 고립되었던 대규모 영프연합군을 기적적으로 구출해 내는 데 성공했던 일이다. 참고로 나는 영화 <덩케르크>를 정말 재미있게 봤다. 아직 안 보았다면 매우 추천하는 바이다. 해당 영화는 크리스토퍼 놀란이 감독을 맡았으며 이외에도 여러 쟁쟁한 배우들이 출연하였다.
프랑스군의 항복 후 전쟁 상황 속 영국군의 상태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 영국의 전쟁박물관이어서 그런지 아무래도 자국에 대한 내용은 조금 더 긍정적으로 서술하는 것 같은 느낌이 있긴 하다.
2차 세계대전 중 영국 여성들의 헌신과 활약을 전시해 둔 공간도 있었다. 그중, 후방 지원 역할을 수행하던 WVS(Women's Voluntary Services)라는 단체 소속 Nancy Drapkin이라는 여성의 유니폼 배지와 소지품에 대해서 소개하고 있는데, 여기서 특별히 흥미로운 점은 그녀가 소지하고 있던 립스틱이다. 그녀가 소지하고 있던 립스틱 케이스에는 WVS의 로고가 새겨져 있었으며 제품 색상은 Victory Red로, 이는 Elizabeth Arden(엘리자베스 아덴)이라는 화장품 브랜드에서 당시 여성들을 위해 특별히 만든 제품이었다고 한다.
1941년, 전 세계적으로 대대적인 전쟁이 터졌음을 설명하고 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진주만 폭격도 1941년에 있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미국이 전쟁에 공식적으로 참전하게 되었다고 알려져 있는데, 당시 미국은 영국과 동맹 관계를 맺는다.
아래에는 당시 일본군이 입었던 군복을 소개하며 특히 'Jika-Tabi'라는 독특한 신발에 대해서 언급한다. 지카타비는 발가락 부분이 갈라져 있는 독특한 모양을 하고 있는데 이로 인하여 당시 호주군이 진흙으로 가득한 뉴기니 열대 우림 속에서 일본군을 추적하는데 용이했다고 한다.
일본군은 당시 미국(진주만) 뿐 아니라 많은 태평양 및 동남아시아 전역을 공격하였다. 아래 설명에 따르면, 많은 아시아인들이 유럽 및 미국의 지배 하에 차별을 받고 있었으며(식민지라는 단어는 없으나 사실상 식민지를 이야기하는 것), 일본은 그들에게 'Greater Asia Co-Prosperity Sphere(대동아공영권)'이라는 그럴듯한 개념을 내세우며 서양 세력을 몰아내고 독립을 가져다주겠다는 약속을 한다. 하지만 이는 실제로 (모두가 알다시피) 또 다른 식민 지배에 지나지 않았다.
엄청난 속도로 태평양 및 아시아 지역을 점령해 나가던 일본은 1942년 6월 The Battle of Midway(미드웨이 해전)에서 크게 실패하고 이때부터 전세는 뒤집히기 시작했다. 참고로 이 미드웨이 해전을 배경으로 한 영화 역시 많은데, 2019년작 <미드웨이>라는 영화를 재미있게 본 기억이 나서 앞선 <덩케르크>에 이어 이 또한 추천해 본다.
전시장 말미쯤 이르자 제2차 세계대전 후 결과, 세상에 일어난 변화에 대해서 언급한다. 이 대규모 전쟁을 겪으며 사람들은 다시는 이러한 비극을 겪지 않기를 강력히 소망하였고, 이를 위해 1945년 UN(국제연합)을 창설, UN은 세계인들에게 전쟁의 종식과 평화를 약속하였다. 또한, 아시아와 아프리카 전역에서 무력 투쟁을 동반한 독립운동이 일어났고 제국주의의 불씨는 꺼져갔다. 이뿐만 아니라 미국과 소련이라는 두 초강대국이 떠오르며 the Cold War(냉전)가 시작된다. 공식적인 전쟁은 끝이 났지만 과연 폭력은 가고 평화가 왔느냐 하면 그것은 아니라고 할 수 있는 모습이다.
2차 대전은 인류 역사상 전례 없는 사상자 및 도시와 사회의 붕괴를 낳았다. 전쟁 후 재건 활동이 이어졌고 이 과정에서 개혁이 대두되기도 했으며, 세계 곳곳에서 국가 간, 민족 간, 인종 간, 이념 간의 대립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전쟁은 끝났지만 전후 상처와 혼란, 분열은 계속해서 사람들을 고통스럽게 만들었다.
2차 대전 후 영국의 변화, UN 창설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또한, 공산주의의 대두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
냉전 속 소련과 미국 사이의 핵폭탄 경쟁까지 언급하며 2차 대전 전시장은 마무리된다.
이외에도 층마다 다양한 주제의 전시장이 마련되어 있으니 전쟁 역사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방문에 참고하기를 바란다.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이 전쟁 박물관은 정말 추천하는 장소다.
폐장 시간이 되어 밖에 나오니 해가 땅까지 내려오다 못해 언덕 너머로 숨어 들어가며 나뭇가지 틈으로 불그스름한 황금빛을 세상에 내뿜고 있었다. 전쟁박물관 앞의 아기자기한 공원에 땅거미가 깔리자 꼭 다른 세계에 놓인 것처럼 환상적이고 평화로워 보인다. 2차 대전 후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 평화로운 세상에 더 가까워졌을까, 아니면 더 멀어졌을까. 세상은 더 나은 방향을 향해 가고 있을까, 아니면 더 나쁜 방향을 향해 가고 있을까.
집에 가자.
집에 가는 길에 또 한 번 템즈강 위를 건넌다. 아까는 반짝반짝 윤슬이 부서지는 템즈강을 바라보며 걸었는데 지금은 빌딩 불빛이 잔잔히 비치며 일렁이는 짙은 쪽빛 강을 바라보며 걷는다.
저녁하늘의 신비롭고도 오묘한 빛깔 옷을 입은 빅벤이 미모를 뽐낸다.
내일 비가 오려고 하는지 저녁 하늘이 지나치게 화려하도록 아름답다.
집에 와서 어김없이 치즈 샌드위치와 따뜻한 차를 만들어 먹는다.
저녁을 먹고 소화를 시킨 뒤 강변을 달리러 나왔다. 춥지만 바람 없는 맑고 산뜻한 날씨에 뛸 맛이 난다. 게다가 맑은 하늘에 야경은 더욱 선명하고 뚜렷하게 빛이 나니 달리는 길이 더욱 즐겁다.
집에 돌아와 따뜻한 홍차를 마시며 차갑게 언 몸을 녹이고 나눠 받은 작은 귤로 비타민 충전도 했다.
맑고 푸른 하늘 아래 놓인 타워브리지를 실컷 보았고, 덤으로 브리지를 오가는 동안 사랑스러운 동네 산책 시간을 누릴 수 있었으매 아주 아름다운 하루였다. 뿐만 아니라, 전쟁박물관에 방문하여 지난 역사를 되짚어 보고, 같은 실수가 반복되지 않기 위해서 그리고 아주 티끌만큼이라도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가기 위해서 인간들이 어떻게 사고하고 행동해야 할지에 대하여 생각해 보고, 그러고 나니 또 심란하기도 했던 하루다.
모두가 알고 있듯, 더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꼭 거창한 일을 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사람들에게 친절하게 행동하고, 누군가 도움을 필요로 하는 상황을 외면하지 않는 일과 같은 작은 것들부터 움직임은 시작되는 것이니까 말이다.
세상이 아주 조금이라도 더 따뜻하고 건강해졌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