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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런던일상 (feat. 인생뮤지컬 본 날)

Onion Garden, Phantom of the Opera, 비베이글

by Daria



쾌청한 하늘 아래, 숨 쉴 때마다 맑고 투명한 공기가 비강을 타고 들어와 두개골의 둥근 선을 따라 돌며 뇌에 붙은 먼지를 홀홀 털어주는 것 같은, 그런 산뜻한 날이다.


청아한 아침 분위기 속, 주방에서는 새빨간 빛깔의 해물 짬뽕이 한바탕 보글보글 끓었다. 든든한 아침 식사와 함께 짤막하게나마 나른한 오전을 보낸 뒤 집을 나섰다. 오늘은 할 일이 많다. 정오쯤 친구와 카페에 가기로 했고, 저녁에는 혼자 뮤지컬을 보기로 계획되어 있다. 알찬 하루가 될 것이 분명하다.




전날 친구가 카페 하나를 추천해 주었는데 때마침 집 근처에 있는 곳이라 내친김에 그 친구와 함께 그 카페에서 만나기로 했다. 구글맵을 보며 갔는데도 찾는데 애를 조금 먹었다. 현대식 고층 빌딩이 줄지어 서있는 Victoria Nova 거리에 이런 비밀 정원 같은 곳이 꽁꽁 숨겨져 있었다니. 들어서는 동안 마치 판타지 소설 속의 등장인물이 된 것 같았다.




Onion Garden이라는 이름에 걸맞도록 곳곳에 양파들이 가득한 정원이 카페를 둘러싸고 있었다. 정원은 보기 좋게 손질되어 있다기보다는 어느 가정집의 진짜 정원처럼 다소 투박한 모습을 하고 있었는데, 내게는 그 점이 더욱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왠지 아늑하고 평온한 느낌을 자아낸달까.




상점에서 파는 양파나 보고 살아온 것이 전부인 나에게 이곳은 양파도 훌륭한 정원용 식물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우쳐 주었다. 이렇게 꾸며 놓으니 꼭 할로윈 호박 장식 같기도 하고, 제법.. 아니 무척 잘 어울린다!






커피나 차뿐만 아니라 주류와 베이커리류도 판매하고 있었는데 모든 메뉴들이 다 맛있어 보여서 계산대 앞에서 한참을 고민해야 했다.




고민 끝에, 직접 만들었다는 할머니메이드 생강쿠키와 카페라테를 주문했다. 커피 위에 자그마한 하트가 앙증맞게 올라가 있다.




음료를 받아 들고 야외 정원으로 나가 자리를 잡고 앉았다. 역시나 자리도 차 마시기 편하게 잘 차려놓은 느낌이 아닌, 정원의 주인이 정원을 가꾸다가 이따금씩 차 한잔을 마시고자 간단하게 마련해 놓은 것 같은 투박한 모양을 하고 있었다. 자그마한 나무 탁자 위에는 랜턴과 양파 그릇이 놓여 있어서 커다란 쟁반 따위는 감히 올려놓을 수도 없는 모습이다.




카페라테는 무난하게 맛있었고 안에 라즈베리잼이 샌드된 생강쿠키도 아주 맛있었다. 차를 주문한 친구에게는 꽃이 그려진 예쁜 찻잔이 제공되었다. 푹신한 고급 소파에 앉은 것도 아니고 세련되게 가꾼 정원에 있는 것도 아닌데 왠지 그보다 더 아늑하고 평화롭게 느껴진다.




밖에 계속 앉아 있다 보니 으슬으슬하여 실내로 들어왔다. 토끼굴처럼 작은 공간 안에 소파와 탁자를 비롯한 온갖 소품과 장식품들이 빼곡히 담겨 있어서 왠지 포근하게 느껴지는 곳이었다. 나도 그 수많은 소품 중 하나가 된 것 같달까. 따스한 노란빛의 조명과 통유리 벽을 통해 쏟아져 들어오는 햇살도 이 따스하고 포근한 분위기에 한몫 단단히 하는 것 같다.






친구가 내 사진도 한 장 찍어줬다.



탁자마다 이렇게 생긴 요상한 것들이 하나씩 올려져 있어서 직원에게 무엇이냐고 물어보니 양파 씨앗이란다. 발아를 위한 과정이라고 한다. 신기했다.




친구와 카페에서 헤어진 뒤 저녁 뮤지컬 시간까지는 한참이나 여유가 있어 뭘 할까 고민하다가 친구가 추천해 준 The Courtauld Gallery(코톨드갤러리)를 가기 위해 코번트가든 쪽으로 걸어서 이동하였다. 쾌청한 하늘 아래에 선 웨스트민스터 수도원 건물은 오늘따라 더욱 깨끗하고 맑은 빛을 띤다. 상앗빛 석회암 건물과 맑고 부드러운 색의 하늘이 청량하고 우아한 조화를 빚어낸다.



음악도 없이 그저 거리를 걷는 것만으로도 구름 위를 걷는 것처럼 기분 좋아질 수 있는 곳, 런던. 난 아무래도 런던이란 도시랑 잘 맞는 게 분명하다. 런던에 있으면 그냥 사소한 모든 것들에 다 행복과 안정을 느낀다.








걷고 걸어 드디어 Somerset House(소머셋하우스) 앞에 당도했다.




그러고 보니 런던에 있는 동안 Somerset House를 방문한 건 이번이 처음인 듯하다. 친구의 추천 덕에 이렇게 와 보는구나.








하늘이 너무나도 맑고 예뻐서 자꾸만 사진을 찍게 된다.




이런 계단마저도 예뻐 보인다. 눈에 콩깍지가 단단히 씐 걸까.




한국에선 몇 년을 통틀어 고작 딱 한번 입었던 분홍색의 샤스커트. 어차피 이곳 런던에선 우스꽝스럽게 입든 고리타분하게 입든 그 누구도 뭐라 하지 않으니 여기에서 실컷 입다가 귀국 전 버리고 떠날 생각으로 가져왔는데, 이게 웬 걸! 이 치마만 입고 나갔다 하면 어김없이 런더너들로부터 패션 칭찬을 받았다. 오늘도 귀여운 스무 살 대학 새내기 여학생이 불쑥 다가와 치마가 너무 예쁘다며 어디서 샀냐고 물어보았다. 치마를 빌미로 하여 그 여학생과 인스타그램 친구를 맺었는데 알고 보니 The Courtauld Institute of Art에서 수학하는 미술학도였다. 치마 덕분에 귀엽고 멋진 예술가 소녀와 친구가 되었다.




영국 답게 아직 이른 시간임에도 햇빛이 슬슬 낮게 내려오기 시작한다. 상앗빛 건물 외벽에 쏟아진 맑은 햇살이 꼭 엎지른 우유 같다.






내가 싫어하는, 아니.. 무서워하는 비둘기. 내겐 너무나 무서운 존재이지만 종종 나의 사진 모델로 쓰이곤 한다. 사진 모델로서는 꽤 귀여운 녀석이다.




코톨드갤러리 폐장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 미술품 관람은 다음을 기약하고 소머셋 하우스 내부 카페에나 잠시 들렀다가 나왔다. 밖으로 나오니 더욱더 낮게 내려온 황금빛 햇살이 눈부시게 빛난다. 그 햇살 속에 섞여든 노천카페의 사람들 모습이 꼭 한 폭의 그림 같다. 당장이라도 캔버스와 물감을 꺼내어 이 순간을 그려내어 붙잡아두고 싶다. 아쉽게도 지금 내게 화구는 없으니 카메라를 통해 이 순간을 정성스레 붙잡아 본다.











소머셋 하우스를 나와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길을 따라 동네 일대를 정처 없이 걸어 다녔다. 오늘은 잠깐 스치듯 찾아오는 비 한 방울조차도 없이 하루 종일 맑고 온화하기만 하니 그 어느 때보다도 걸을 맛이 난다.




주말이라 그런지 코번트 가든에 사람들이 평소보다도 훨씬 더 많아서 기차놀이하듯 다닥다닥 붙어서 걸어야 했다. 주말의 햇살을 즐기러 나온 사람들로 북적북적하다.







광장에서 음악을 틀어놓고 춤추는 무리도 있다. 익숙한 노래 APT가 흘러나오고 있다.






몸도 녹이고 커피 한 잔도 마시기 위해 트라팔가광장 쪽에 위치한 Notes Coffee Roasters를 찾았다. 예전부터 언제 한 번 들러야겠다고 줄곧 생각해 왔던 곳인데 막상 카페에 갈 때면 요상하게 꼭 다른 곳을 선택하게 됐다. 뭐랄까... 궁금은 하지만 그렇다고 엄청 끌리는 곳도 아니랄까. 오늘은 정말로 어느 카페를 가야 할지 선뜻 확신이 서지 않아 이때다 싶어 Notes에 들어갔다. 들어가자마자 엄청나게 북적북적하고 정신없는 분위기에 압도되었다. 작은 공간 안에 수많은 테이블을 어쩜 이리 다닥다닥 야무지게도 붙여서 모아 놓았는지... 카페 안에서 피어난 소음들은 갈 곳을 찾지 못한 채 그 안에 고이 갇혀 버려 우왕좌왕하고 있었으니 그야말로 도떼기시장이 따로 없는 것 같았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정신없는 분위기에 일순간 머무를지 말지에 대하여 고민하였으나 이내 곧 친절한 직원이 자리를 안내해 줌으로써 고민의 기회는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매우 쾌활하고 친절한 직원은 만석인 카페 안에서 내 자리를 가까스로 하나 겨우 찾아내 주었는데, 썩 맘에 드는 자리는 아니었지만 거기 말곤 앉을 수 있는 빈자리도 없었거니와 다른 빈자리가 나면 자리를 바꿔주겠다고 하여 그냥 그곳에 앉았다. (막상 나중에 다른 빈자리를 권유받았을 때는 이동하기 귀찮아서 그냥 바꾸지 않았지만 말이다.)

진열대에 다양한 종류의 페이스트리가 있는 것을 보곤 빵도 하나 곁들일까 고민하다가 어차피 곧 저녁을 먹을 것이기에 에스프레소 한 잔만 주문했다. 커피의 맛은 대단히 감동적이지는 않았지만 꽤 괜찮았다. 나는 에스프레소 한 잔을 비우고, 스케쥴러를 한 번 정리한 뒤 카페를 빠져나왔다.




카페를 나와 다시 그 길을 따라 걸어 올라가면서 중고서점을 구경했다.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Evgeny Kissin에 이끌려 홀린 듯 들어간 것인데 정작 그 책은 손도 못 대도록 해 놓아서 터럭만큼도 구경할 수 없었다.




점점 뮤지컬 공연 시간이 다가왔고, 나는 공연을 보러 가기 전 요기를 하고자 B Bagel(비베이글)로 향했다. B Bagel을 처음 방문한 나의 첫인상은 "가게 분위기가 우울하다", "가게가 청결하지 않다"였다. 지점마다 다르겠지만 내가 방문한 지점은 그러했다. 주문을 받아준 직원의 얼굴엔 퇴근하고 싶다는 생각이 선명하게 쓰여 있었고, 마치 살기 싫지만 죽지 못해 어쩔 수 없이 산다는 듯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심술궂은 응대는 아니었지만 그들의 우울하고 무기력한 분위기가 괜히 나에게까지도 전염되는 것 같았다.





그래도 받아 든 음식은 꽤 먹음직스러워 보였고, 이를 들고 2층으로 올라왔는데 정말 입맛이 뚝 떨어지는 광경을 마주했다. 아주 오랫동안 제대로 청소를 안 해왔는지 테이블의 표면은 끈적끈적했고, 모서리에는 빵가루와 먼지, 기름때가 가득 엉겨 붙어 있었다. 바닥 역시 큼직큼직한 쓰레기만 없다 뿐이지 기름에 엉겨 붙은 빵가루들이 구석구석 그득했다. 게다가 몇 명 없는 손님들은 저마다 우울한 얼굴을 하고는 무기력하게 앉아 있는데 정말이지 이런 곳에서 한시라도 빨리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 밖에는 들지 않았다. 음식은 이미 받아 왔으니 어쩔 수 없이 서둘러 먹어 치우고는 도망치듯 잽싸게 뛰쳐나왔다. 식탁에 보이는 음식물 찌꺼기 때를 보며 구역질 나는 것을 간신히 참으며 말이다.




그 후 나는 곧장 뮤지컬 공연장이 있는 West end로 향했다. 오늘 관람할 뮤지컬은 <오페라의 유령>. 뮤지컬계의 전설과도 같은 작품이다. 런던 <오페라의 유령>은 His Majesty's Theatre에서 상연되어오고 있는데, 공연장 외관이 매우 멋지고 위엄 있다. 종종 지나갈 때마다 공연장이 멋지다고 생각했는데 바로 이곳이 <오페라의 유령> 공연장이었던 것이다. <오페라의 유령>은 1986년 런던 이곳에서 초연된 이래로 현재까지 꾸준히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작품이다.


His Majesty's Theatre 공연장 외관.



1막이 시작되면 천에 덮여 있던 무대 위 샹들리에가 모습을 드러내고 웅장한 음악(모두가 아는 그 음악!)과 함께 천장으로 올라가는데 이때부터 기선 제압 제대로 하며 관객의 흥미를 단단히 사로잡는다. 그 후 이어지는 웰메이드 넘버들과 화려한 무대 연출, 좋은 넘버들을 훌륭하게 소화하는 배우들의 섬세한 감정 연기와 우수한 노래 실력, 탄탄한 서사와 메시지를 바탕으로 펼쳐지는 감동적인 이야기가 어느 하나 부족함 없이 모든 공연이 끝날 때까지 관객을 사로잡고 놓아주지 않는다. 다양한 장르가 혼재하는데도 불구하고 그 모든 요소들이 부족함 없이 각자의 무게를 굳건히 갖고 있다. 만약 누군가 런던에 여행을 가는데 어떤 뮤지컬을 보면 좋을지 추천해달라고 한다면 난 주저 않고 이 공연을 추천할 것이다. 물론 사람마다 취향은 모두 다 다르니 개개인의 호불호는 내가 보장할 수 없지만 말이다.


1막 후 인터미션 때.



해당 공연에 대해 앞서 작성하여 게시한 공연 후기 글의 링크를 첨부한다.

(더 상세한 공연 글을 읽고 싶으신 분이 계시다면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https://brunch.co.kr/@myhugday/136


공연이 모두 끝난 후 커튼콜 때 찍은 사진.



공연을 보고 나와 감동으로 벅찬 가슴을 안고 집으로 향하는 길, 평소에 못 보던 설치물들이 눈에 띄어 관계자로 보이는 분에게 물어보니 내일 이곳에서 마라톤이 있다고 한다. 어머나! 마라톤이라니. 이런 행사가 있는 줄 진작에 알았다면 나도 신청했을 텐데. 참여하지 못하는 점이 못내 아쉽다.




공연장에서 집까지 <오페라의 유령>의 감동을 계속해서 곱씹으며, 차분해진 런던의 밤 골목 정취를 즐기며 걷는다. 길 위를 걸어 다니는 사람은 별로 없지만 여전히 환하게 빛나는 빅벤 덕분에 하나도 무섭지 않다. (그리고 이 동네는 아무래도 경비가 철저한 곳인지라 밤에도 제법 안전하다. 내가 늦은 시간에도 맘 놓고 운동하러 나갈 수 있는 이유다.)







하루하루 흘러가는 나날 속에 런던에서의 생활에 익숙해져 가고, 런던에 더욱 깊이 정 들어가는 나 자신을 느끼며 떠날 날이 다가오는 것에 대해 슬픔과 아쉬움을 느낀다. 파랗게 마른하늘 아래 마냥 편안하고 행복하다가도 이따금씩 슬픔의 여우비에 홀딱 젖어버리곤 한달까. 하지만 우리 모두는 안다. 영원하지 않기에 더욱 아름답게 빛나는 것임을. 끝이 있기에 더욱 소중하고 애틋하게 여겨지는 것임을.


밤하늘 아래를 걸으며 아름답게 빛나는 애틋하고 소중한 이 순간에 온전히 흠뻑 녹아들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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