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기만 해도 거칠고 푸석한 감촉, 스산하기 그지없는 공기가 느껴지는 것 같은 그림. 통상적으로 아름다움이라고 칭하는 것들이 도통 보이지 않는 그 그림들은 어느 날 내 삶에 느닷없이 찾아와서는 ‘위로’를 전해 주었다. 그 그림들의 주인공은 바로 ‘베르나르 뷔페’. 모두가 동경하던 찬란한 문화·예술의 나라 프랑스의 앙상하고 푸석한 민낯을 그렸던 화가다. 그의 그림들은 (물론 예외도 있지만) 대체적으로 어딘가 음산하고 황량한 분위기를 풍기는 것이 특징이다. 비죽비죽 뻗은 직선들, 각박하게 사용된 물감과 색채, 텅 비거나 메마른 정물, 하나같이 공허한 눈빛을 하고 앙상한 몸뚱이를 지닌 인물들…. 풍수지리적 관점으로 보면, 집에 걸어두었다가는 행운은커녕 불운만 굴러들어 올 것 같은 그림이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커다란 참상 속에서 성장했다. 더불어, 그는 삶의 어두운 면을 똑바로 마주보고 정직하게 표현해 낼 줄 아는 사람이었다.
슬프거나 고통스러울 때 슬픈 음악 또는 슬픈 이야기를 감상하면 고통을 차단하는 엔도르핀과 고통을 완화하는 프롤락틴이라는 호르몬의 수치가 높아져 되려 고통을 견디는 데 도움이 된다고 하는 내용을 어딘가에서 읽은 적이 있다. 아하, 그래서인 걸까? 힘들고 속상한 때에 그의 그림을 보고 어딘가 묘하게 공감과 위로를 받는 느낌이 들었던 것은 단순한 기분 탓이 아니었나 보다.
나는 속상한 일이 있을 때 주변 사람들에게 잘 터놓지 않는 편에 가깝다. 그런 때에 나의 곁에 있어주었던 것들은 뷔페, 뭉크, 고흐, 클림트, 프리다, 이중섭의 그림들, 쇼팽, 쇼스타코비치, 슈만의 음악들이었다. 그들의 그림을 보고, 그들의 음악을 들으며 나는 내 고통이란 하등의 특별함이 없음을, 그저 공기와 같은 것임을 느꼈고, 뿐만 아니라 그 고통이란 건 때때로 어떻게 승화시키느냐에 따라 그 어떤 긍정적인 것들보다 아름다울 수 있음을 느꼈다. 그 주역에는 뷔페도 있었으니, 베르나르 뷔페에 대한 나의 애정은 이 정도면 충분히 설명이 되었겠다.
이번 베르나르 뷔페의 전시 기간 동안 나는 세 번이나 그의 전시를 방문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왠지 아쉬운 마음이 들었으나 음식도 맛있다고 과식하면 체하는 법이니 세 번의 감상으로 마무리하기로 했다. 세 번의 방문에 걸쳐 나는 전시장에 걸린 수많은 작품들을 보며 느낀 감상들을 메모장에 빼곡하게 기록해 두었으나 막상 그 모든 것들을 정리하여 글을 쓰려고 하니 그토록 써두었던 온갖 구구절절한 말들이 불필요하게만 느껴진다.
잡다한 이야기들일랑 집어치우고 그의 그림 앞에 서서 그가 붓질에 담아낸 감정, 그가 담아낸 삶의 색채를 느껴보자. 그 순간 ‘말’은 사라지고 ‘감정’만이 그 자리를 압도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