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왜 그림을 볼까? 그리고 왜 그것들을 찬미하는 걸까?
사람마다 저마다 각기 다른 이유들이 있겠지만 나의 경우 그림을 봄으로써 화가를 느끼고 더불어 나를 느끼며, 화가의 삶을 느끼고 덩달아 나의 삶을 느낀다. 뛰어나게 잘 그리는 사람들은 세상에 너무 많다. 내가 관심을 갖는 것은 그림이 얼마나 사실적이고 정교하며 아름다운가가 아니라 얼마나 작가의 이야기, 작가의 성격, 작가의 삶을 담아내고 있는가이다. 그런 맥락에서 나는 표현주의 작가들을 참 좋아한다. 그들의 그림을 보고 있노라면 붓질 하나하나에 목소리가 봉인되어 있는 것 같고, 캔버스 위에 놓인 수많은 색깔들에는 짙은 사유 아래 부서져 흩날린 파편들이 뒤섞여 있는 것만 같다. 내 눈앞에 놓인 것은 우리가 소위 ‘그림’이라 부르는, 선과 색채를 통해 평면 위에 구현된 어떠한 형상이지만, 내게는 기나긴 ‘산문’ 혹은 ‘모노드라마’처럼 느껴진다. 그림을 보는 일, 아니, 느끼는 일은 내게 이토록 재미있고 때론 격동적인 행위이다.
에드바르트 뭉크(Edvard Munch)는 표현주의 작가로 단연 손꼽을 수 있는, 그야말로 순전히 그림을 통해 사유하고 그림을 통해 말하는 화가였다고 나는 생각한다. 어릴 때는 세상의 부정적인 면을 잘 몰랐기에 뭉크의 작품에 크게 공감하지도, 감동받지도 않았으나, 부모님의 품 밖으로 나와 마주한 세상에서 차츰 여러 가지 부정적인 면들을 보고, 때로는 그것에 찔리고 아파하기도 하면서 세상이란 참으로 깊고도 광대하며 복잡하고 다양한, 면적을 잴 수 없는 저 우주처럼 심원한 것임을 알게 된 후로는 신기하게도 뭉크의 그림을 보았을 때 압도되는 경험을 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나름 삶의 연륜을 조금 쌓았다고 뭉크의 삶을 조금 더 이해할 수 있게 된 영향도 작용했다. 뭉크는 더 이상 내게 <절규>를 그린, 그저 유명한 화가가 아니었다. 그는 내가 감탄해 마지않는, 그 이름을 마음에 특별하게 새기고 진지하게 소리 내어 부르는, 아끼는 화가가 되었다.
그런 뭉크의 대규모 전시가 짧은 기간 동안 대한민국 서울에서 진행되었다. 사실 이 전시는 몇 회에 걸쳐 재방문할 계획이었는데 첫 방문 이후 이런저런 일정들로 바쁘게 살다가 정신을 차리고 보니 전시 기간 종료 사실을 알게 되었다. 기왕 공들여 기획한 대규모의 단독전인 만큼 오래 진행했으면 좋았을 텐데 아쉽게도 4개월이라는 시간은 참 짧게만 느껴진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한 번이나마 다녀오기는 했다는 사실이다.
뭉크는 병약한 집안 내력과 어린 시절 소중한 가족들의 병사에 대한 경험으로 평생을 죽음에 대한 트라우마 속에서 살았다고 전해진다. 그의 뒤틀린 트라우마들은 그의 삶의 전반에 있어서 여러 다른 가치관에 영향을 끼쳤는데, 그는 특히 사랑 그리고 여성에 대해서 다소 왜곡된 가치관을 지니고 있었고 그의 수많은 그림들에서 이러한 그의 생각들이 형상화된 것을 엿볼 수 있다. 평생 동안 그를 놓아주지 않았던 불안, 냉소, 질투, 분노, 고뇌 등은 그의 그림 위에서 다채롭고도 독창적인 색채, 그리고 꿈을 꾸는 것만 같은 몽환적인 선을 통해 이미지화되었다. 그것은 그의 독특한 그림 세계를 구축해 주었음은 물론이고, 그와 같이 때때로 부정적인 감정에 휩싸이곤 하는 보통의 인간인 우리들에게 그의 그림을 봄으로써 아이러니하게도 위로를 받고 치유를 경험하는 기회를 제공해 주었다. 이러한 지점에서 나는 표현주의 화가들을 좋아한다. 뭉크는 생전에 ‘카메라가 지옥이나 천당에서 사용되지 않는 한 붓과 팔레트를 능가할 수 없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그의 말에 동의하는 바이다. 나는 인간의 상상력, 그리고 개개인의 고유한 개성을 매우 가치 있게 여기는 사람이다. 화가 뭉크를 좋아할 수밖에 없다.
내가 특별히 좋아하거나 당시 인상 깊었던 작품들 몇 가지를 찍어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