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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리스 Oct 22. 2024

눈송이처럼 반복될 사랑과 역사

<작별하지 않는다>를 읽고


작별 인사만 하지 않는 거야,

정말 작별하지 않는 거야?

완성되지 않는 거야, 작별이?

미루는 거야, 작별을? 기한 없이?


 작별 인사도 없었고 정말 작별하지 않았다. 인선과 경화는 누가 혼인지 모르게 끈끈하고 은근하게 삶에 연결되어 있었다. 육신과 혼이 대화를 주고받는다. 그 둘이 함께 마주 보고 조릿대 잎을 마시고 콩죽을 먹는다. 적막에 싸인 조그맣고 가벼운 아마는 흰 무명실로 감고 두 번 십자로 묶고 매듭을 지었다. 이내 나무 아래 부드럽지만 차가운 흙더미 안에 잠들 것이다. 거센 눈보라와 찬 공기에 딱딱하게 얼어야 할 아마가 푸드덕 날아올라 목을 축이고 크랜베리를 먹는다.


 경화는 유서를 완성하겠다는 모순된 의지로 삶을 연명하고 있었다. 경화는 인선의 무리한 부탁을 거절하지 못한 채 눈보라가 빗발치는 제주로 향한다. 그곳에서 경하는 칠십 년 전 제주의 학살과 인선의 가족사를 당면하게 된다. 잔인하고 처참한 대학살 끝에 제주 외딴집에는 인선과 인선의 어머니 정심만 남게 된다. 정심은 인선이 누구인지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쇠약했지만 인선을 끔찍이 사랑했고 의지했다. 인선은 그 끈적한 사랑에서 벗어날 수 없어서 견뎌야 했다. 돌아갈 다리가 끊어졌는데 인선은 계속해서 죽고 싶었다.


 영원처럼 느린 속력의 눈송이들은 허공에 잠시 멈추어 있거나 중력을 거스르는 것처럼 보인다. 무엇보다 희고 작은 눈송이는 우리의 피부에 닿는 순간 마법처럼 투명한 물방울이 되고 만다. 눈과 사랑은 닮았다. 고요하고 조용한 눈송이는 잔잔한 새벽녘 무섭게 쌓여 그 모든 것을 고립되게 만든다. 눈이 내리는 풍경은 아름답지만 수천 개의 눈송이가 스민 거리는 그렇지 않다. 타자의 삶이 내 삶에 스미는 사랑 또한 그렇다. 인선의 방을 건너왔던 정심의 목소리가 그랬다. 사랑은 때론 고통이었다.


 저서를 통해 참혹하고 잔인한 역사를 재조명한다. 1947년 3월 1일부터 1954년 9월 21일까지 7년이 넘는 세월 동안 무차별 학살이 제주도에서 일어난 것이다. 사망자 숫자만을 비교하면 6.25 전쟁 다음으로 가장 많은 희생자가 발생한 사건이며 미 군정을 포함하여 정부 모두가 민간인 학살에 적극적으로 가담했다. 6.25 전쟁 발발 이후에도 제주도에서는 학살을 계속 진행했으며 참혹한 살육에는 이승만 정부와 미 군정의 무거운 책임이 있다. 제주 4.3 사건의 희생자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3만 명에서 최대 8만 명으로 추정하고 있다. 역사는 과거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정부의 공리적 몸부림은 그 시대와 흐름에 맞게 다양한 모습으로 반복될 것이다.


 정부는 국민을 보호와 사랑이라는 명분으로 국가를 번영하지만 뻐근한 사랑은 살갗을 타고 스며든다. 하얀 눈송이는 아름답지만 폭설은 재앙이다. 사랑도 때론 무서운 고통일 수 있다는 것을. 지난 역사와 그녀들의 우정을 통해 되새겨본다.


 역사를 창조한 것이 인간이건만 자연과 역사 앞 인간은 나약하기만 하다. 작가는 그녀의 바람대로 지독한 사랑을 참혹한 역사의 서사와 함께 강렬하게 집필했다. 경화의 스펙터클한 꿈처럼 저서의 내용은 격렬하지만 그 모든 것이 암시적이고 은유적이다. 이와 같은 산문은 가볍게 일독 후 거듭 재독해야 작가의 메시지를 들을 수 있을 것이다.



한국 최초 노벨문학상 수상 | 한강 최신작 | 작별하지 않는다
뻐근한 사랑이 살갗을 타고 스며들었던 걸 기억해. 골수에 사무치고 심장이 오그라드는..... 그때 알았어. 사랑이 얼마나 무서운 고통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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