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의 흐름으로 보는 세계사>를 읽고
세계사는 유럽 관점에서 쓰인 기록이 주를 이루지만 시각을 바꾸지 않고는 전체적인 역사 과정을 이해할 수는 없다. 문명이 보급된 지 5,000년이 지난 현대 사회의 최강의 무기는 통화다. 현대 사회의 토대를 이루는 통화를 언급하지 않고 역사를 조망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4대 문명이 시작되는 기원전 6세기에 통화가 출현했다. 통화 이전의 농민들은 생산물 등을 교환하면서 '물품 화폐' 개념을 사용하고 있었다. 거래가 활발한 지역에서는 그들의 거래를 중개해 주는 상인이 출현했고 상인은 교환증 개념의 화폐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서아시아에서는 은 조각을, 황허강 중류 지역에서는 별보배고둥 껍데기를 화폐로 사용했다. 물품 화폐는 썩지 않고 소지하기 편리해야 했다. 물건에 화폐의 가치를 입히는 데에는 신비한 환상이 필요했고 다수는 물품 화폐를 신성시했다.
기원전 6세기 페르시아 제국은 통화를 지배의 수단으로 사용했다. 화폐에 정치의 색깔을 입혀 정부가 가치를 정한 것이 통화라 할 수 있는 것이다.
몽골인이 세운 원나라는 '교초'라는 지폐로 통화를 제한하며 세계 최초로 지폐 제국이 되었다. 몽골인은 소금을 전매제로 하였고 지폐를 위조하는 자는 사형에 처하도록 했다. 원나라는 지폐를 사용하면서 백성들로부터 부를 착취하기 시작했다.
15세기 중반부터 17세기 중반까지 포르투갈과 스페인 사람들이 대규모 항해를 떠나면서 대규모의 거래가 이루어졌다. 이들은 아메리카 대륙에 보리, 쌀, 커피, 설탕 등의 플랜테이션을 발달시키면서 구대륙의 은 부족 사태를 해결해 주었다.
유럽의 은은 대부분 독일에서 산출되었으나 그 양이 적었다. 16세기 후반 무렵 스페인으로 대거 유입된 은은 종교 전쟁으로 인해 유럽 전체로 퍼졌다. 이러한 까닭에 유럽에서는 100년간 장기 인플레이션인 '가격 혁명'이 지속되었다. 자연스럽게 유럽 경제의 중심이 지중해에서 북해 중심의 네덜란드와 영국으로 이동하는 '상업 혁명'이 일어났다.
17세기 스페인의 식민지였던 네덜란드는 전쟁 이후 세계 무역의 절반을 지배하는 해운 강국으로 성장했다. 네덜란드는 국력을 키우기 위해 상인에게 많은 특권을 주고 세계 최초의 주식회사 '동인도 회사'를 설립했다. 네덜란드인들은 넘쳐나는 돈을 가지고 안정적인 투자처를 찾지 못한 채 방황했다. 그러던 중 각별한 사랑을 받았던 식물 '튤립 구근'의 희소가치에 투기를 하기 시작했다. 구근 거래를 둘러싸고 빈번한 분쟁 등으로 정부는 튤립 거래에 관련된 법률을 제정했고 이러한 정부의 움직임은 '튤립 버블' 붕괴를 부추겼다. 그 결과 네덜란드의 넘쳐나던 자본은 경제 성장이 기대되는 신흥국 '영국'을 향해 이동하게 되었다.
영국은 네덜란드와의 세 차례에 걸친 전쟁에서 승리하면서 유럽의 경제 패권을 거머쥐게 되었다. 네덜란드는 이후 투자를 통해 영국 경제를 지배하게 되었다. 영국, 네덜란드 대 프랑스 동맹의 성립을 의미하는 명예혁명 이후 영국과 프랑스는 100년 동안 식민지 전쟁을 벌였다. 영국보다 세 배나 많은 인구와 유럽 최고 군사력을 보유한 프랑스와의 긴 전쟁의 승자는 다름 아닌 영국이었다. 재정상의 우위에 있었던 영국은 국채 제도 덕분에 전쟁 시에도 국채를 대량으로 발행할 수 있었고 그것은 안정적인 투자 대상이었다. 영국의 잉글랜드은행, 프랑스의 중앙은행, 미국의 연방준비은행 등 당시 돈의 발행권은 민간인에게 있으며 국가가 보증하는 시대가 오래도록 지속되었다.
미국 독립 전쟁, 프랑스혁명, 나폴레옹 전쟁, 라틴아메리카 국가 독립 등의 지속되는 전쟁은 유럽 절대주의의를 약화하고 식민지 미국을 지배할 권한을 빼앗기는 계기가 되었다.
잉글랜드 은행은 지폐와 금의 교환을 보증하면서 돈의 중심은 은화에서 지속 생산이 가능한 지폐로 옮겨갔다. 영국은 신용이 높은 파운드 지폐 사용으로 세계 경제를 움직이게 된 것이다.
1861년 남북 전쟁은 전쟁 프로파간다를 그대로 기술하며 '노예 해방 전쟁'이라고 보는 시선이 많았다. 그러나 실제 남북 전쟁은 세계에서 가장 높은 보호관세를 계속 유지하려는 미합중국에서 자유무역을 주장하는 남부가 독립하려 한 전쟁이었다.
전쟁은 막대한 경제적 손실을 안겨준다. 제1차 세계대전으로 영국은 국가 예산의 70퍼센트를 군사비로 지출하는 등 막대한 경제적 손실로 유럽의 전성기는 저물어갔다. 전쟁 당시 군수 물자를 유럽에 수출하면서 세계 최대 채권국은 다름 아닌 신흥국인 미국이었다. 미국으로 흐르는 금의 이동으로 달러의 영향력은 치솟으며 세계 최대 채권국으로 올라갔다. 하지만 이민자들의 급증으로 만들어진 신흥국이다 보니 지역 간 분열이 지속되었고 국내 체제가 정비되지 않았다. 프랑스와 영국 또한 그러한 미국을 최대 채권국으로 인정하지 않으며 이와 같은 갈등은 20년 후 제2차 세계대전의 원인이 되고 만다.
제2차 세계대전(이하 2차 대전)은 민주주의와 파시즘의 전쟁인가 아니면 민족과 영토 등의 문제인가. 제2차 대전의 가장 큰 원인은 대공황으로 경제의 바닥이 뚫린 것이었다. 19세기가 영국의 시대였다면 제2차 대전 이후 미국은 세계 공업 생산량을 차지하고 전 세계의 금 4분의 3을 소유함으로써 20세기는 미국이 차지하게 되었다.
1971년 달러와 금의 교환을 정지하며 '닉슨 쇼크'라 불리는 화폐 대변동이 일어났다. 파운드에서 달러로 변화된 금본위제가 붕괴하면서 금융의 시대에 도래했다. 이로써 환율 거래가 확대되었고 환율은 매일 격렬하게 변동하고 있는 것이다. 세계 경제가 금융 불안정 시대에 접어들었지만 미국은 기축통화로서의 달러의 지위를 유지하는 것에만 급급했다. 종국에는 최대 산유국 사우디아라비아의 동의 끝에 석유를 오직 달러로만 거래하는 석유 본위제를 만들었다.
1995년 미국은 높은 국채 이자로 전 세계에서 자금을 끌어모았다. 이로 인해 당시 호경기였던 한국, 태국, 인도네시아는 경제 재난에 직면하면서 아시아 금융 위기가 찾아왔다.
2002년 유럽연합은 달러에서 자립하고자 '유로'를 발행했고 한때 세계 통화였던 파운드는 그 주권을 지켰다. 그 결과 런던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국제 금융의 중심지로 외환 거래액의 40퍼센트를 차지하고 있다.
바야흐로 AI 시대에 도래하여 시대에 걸맞은 통화, 전자화폐가 탄생했다. 비트코인은 파운드와 달러의 계승을 잇는 전 세계적인 통화가 될 수 있을까. 현재 비트코인은 하루 만에 가격이 최대 30퍼센트나 변동하는 투기 수단으로 이용되고 있다. 이와 같은 작은 버블은 그 자체가 가치를 지녔다는 환상을 심어준다. 무엇보다 가치 보증이 불명확하다는 큰 단점이 존재한다.
지구의 중심이 유럽은 아니지만 유럽 없는 세계사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일본 국적을 가진 저자라는 점은 사뭇 놀라웠다. 그만큼 중립적으로 저술한 노력이 활자에 만연했다. 통화가 생기기 이전부터 세계는 권력자들에 의한 질서가 만들어졌다. 물품 화폐에서 파운드와 달러로 이어진 기축 통화를 통해 세계사를 알아봤다. 달러 다음의 기축 통화는 그 누구일까. 비트코인은 공공의 통화 수단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을까. 미래를 가늠하는 것은 무엇을 생각하든 상상 그 이상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