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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브티 Mar 08. 2024

소소함과 시시함

영화 9-49일의 레시피

  '소소하게 살았다고 시시하게 산 것은 아니다' 

한 편의 영화가 내게 던진 메시지이다.     


 [나 (유리코)는 친정으로 왔다. 결혼 후 수년이 지나도록 아기가 없자 남편은 내연녀를 두었고 사이에 아이도 있다. ‘내가 물러나는 것이 낫겠다’ 고 생각하고 남편에게 이혼서류를 주고 친정에 오니, 아버지는 끼니도 집안일도 모두 팽개치고 폐인처럼 살고 있다. 새엄마가 돌아가신 지 이 주 후였다. 게다가 이상한 옷과 머리를 젊은 여자아이 (이모토)가  와 있다. 누구냐고 물으니 돌아가신 새엄마가 보낸 아이란다. 새엄마는 여기저기 봉사를 많이 다녔고 그때 도움을 줬던 아이에게 죽기 전 부탁을 했단다. 분명 집이 엉망일 것이니 살펴보고, 더 중요한 것은 자기가 죽고 49일째 되는 날 큰 연회를 열라는 부탁을 받고 온 것이었다.


 나와 아버지의 반대에도 이모토라는 아이는 물러서지 않았고 결국  이모토와 나, 아버지는 49일 째의 연회를 준비한다.

 처녀의 몸으로 시집와서 나를 키운 새엄마에 대해 아는 것이 없는 나는 알 만한 사람에게 물어물어 가며 발자국 책이라는 큰 연대표를 만든다. 49일째 되는 날 새엄마를 아는 사람들은 고인에 대한 소소한 기억과 추억들을 연대표에 각자 써넣는다. 휑할 줄 알았던 연대표의 칸들이 채워지고 모인 사람들은 먹고 마시며 고인을 추모한다. 손님들이 모두 떠나고 난 뒤 내연녀와 헤어진 남편은 찾아와 용서를 구하고 나는 남편과 다시 재결합을 한다.]


 우연히 유튜브에서 찾은 ‘49일의 레시피’라는 일본영화이다.

시어머니 병시중을 들며 열심히 가정을 지켰으나, 유리코는 아이를 낳지 못했다는 자책감에 자신이 살아왔던 삶이 빈 껍데기 같다고 생각한다. 마찬가지로 새엄마가 자신처럼 아이를 낳지 않았기 때문에 연대표가 빈칸으로 남을까 봐 걱정했지만, 새엄마의 자취들이 연대표에 하나둘씩 채워지며 누구에게나 텅 빈 인생은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영화는 남편이 유리코의 헌신과 진정성을 깨닫는 해피엔딩으로 끝나지만 새엄마의 발자국 책을 보며 이미 유리코는 자신이 살아온 삶에 당당한 모습으로 서게 되었다.


 밤늦도록 영화를 보며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다.  

힘든 시기를 보냈는데도 번듯하게 보이지 않는 결과 때문에 그 노력을 인정받지 못했다. 그래서 내가 애쓴 시간들은 실패한 시간이라고 여기고 살아왔다.  최선을 다한 시집살이는 며느리라는 이유만으로 당연시되었고, 아이의 학업 때문에 듣는 말들로 나의 시간들은 부정되었다. 한마디로 나에게는 잃어버린 시간이었다. 이제 아이와 상관없이, 살아온 시간의 가치를 깨달은 유리코처럼 나도 그 시간들이 잃어버린 시간이 아니었다고 스스로 위로하고 싶었다.  


 자신의 삶에 만족하는 사람이 몇 될까 마는 우리는 자신의 삶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삶에도 너무 기대치가 큰 것 같다. 크고 번듯한 결과만이 성공한 인생이라면 90세를 산다 해도 사람들의 인생의 연대표는 채울 내용이 없을 것이다. 새엄마의 일생을 장식할 크고 위대한 사건은 없다. 정말 소소한 일들로 인생이 채워지는 것을 보며 나도 발자국 책을 만들어 볼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건들이 떠오르긴 하지만 좋지 않은 기억들이 대부분이다. 그만큼 소소한 일들에 의미를 부여하지 못하고 산 증거이리라.


결과에 따라 인정받지 못하고 칭찬받지 않은 시간들이었다고 시시한 시간은 아니다. 그 또한 인생 연대표의 한 칸에 쓰일 것이라면 빈칸보다는 차라리 나을 것이다. 새엄마의 평범한 일상이 유리코에게 힘이 되었듯이 평범해서 의미 없다고 생각하는 각자의 삶의 발자국도 누군가에게는 위로가 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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