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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브티 Feb 15. 2024

화해의 합창곡

영화 8-마담 프루스트의 비밀정원


  몇몇 사람들과 차를 타고 가는데 라디오에서 ‘amazing  grace’라는 찬송가가 흘러나온다. 모든 사람에게 아름답고 평화로운 느낌의 곡이다.  음악을 들으며 같이 가는 사람들에게 “저는 이 음악을 들으면 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마음이 답답하고 무거워요. 그래서 듣다가 항상 중간에서 멈춰요” 했더니 그중의 한 분이 묻는다.

“혹시 이 노래를 들을 때 본인의 상황이 좋지 않았다거나 기분 나쁜 일이 있었다든가 그랬던 거 아니에요?”

일리가 있는 말이다 싶어 왜 그럴까 곰곰 생각해 보니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었다.


지하철을 타면 겪는 곤욕스러운 일이 있다. 앞을 못 보거나 생계가 힘들어 보이는 장애인들이 도와달라고 바구니를 내밀 때 영락없이 흐르는 음악이 바로 이 곡이다. 아마 이 노래를 들을 때마다 구걸하는 모습과, 머뭇거리는 부끄러운 내 손이 생각나고 그래서 그리 좋은 기억들이 연결되지 않는 것 같다.


 내가 이렇게 부정적이고 우울한 마음이 드는 비슷한 또 하나의 상황이 있었다. 바로 비 오는 날이다. 20살 때쯤 우리 형제들끼리만 살고 있을 때였다. 어느 날, 언덕배기의 낡은 아파트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 나는 이사 가는 그 아파트가 싫었지만 위의 형제들의 결정과 집안 사정에 맞춰 어쩔 수 없이 이사를 했다. 가뜩이나 마음에 들지 않는 집으로 이사 가는 날, 추적추적  비가 내리고 있었다. ‘구질구질’이라는 표현이 딱 들어맞는 비 오는 날의 이사였다.


그 뒤, 비가 오는 날이면 마음이 우울해질 뿐 아니라 몸도 물 먹은 솜처럼 되어  몸과 마음이 맥을 못 추는 상태가 수년간 계속되었다. 20대의 한창 팔팔한 나이였는데 말이다. 아마 비 오는 날의 서글픈 이사가 내 마음속에 부정적 기억으로 새겨졌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상황들은 정신과에서는 무슨 증후군이라든가 하는 전문용어가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하지만, 무슨 연유에서인지 다행히 어느 해부터는 비 오는 날 이런 증상들이 없어져 버렸다. 아마 비 오는 날 다른 좋은 일이 일어나서 예전의 우울을 덮어버리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뒤에 생긴 좋은 기억이 앞의 나쁜 기억을 덮은 셈이랄까? 다행히 그 후로는 세찬 빗줄기를 즐기게 까지 되었다.

    


 <마담 프루스트의 비밀 정원>이라는 영화가 있다.

주인공 ‘폴’은  아기 때 부모를 잃고 말을 한마디도 하지 않는 늘 무표정한 얼굴의 청년이다. 피아노에 재주가 있는 폴은 나이 든 이모들이 운영하는 댄스교습소에서 피아노를 반주해 주며 하루하루를 산다. 그러던 어느 날 같은 아파트에서 실내에 가득 식물을 키우는 마담 프루스트의 집에 우연히 들어가게 된다. 그녀는 폴에게 마들랜느 과자와 차를 내어놓는다.

마담 프루스트와의 만남이 계속되며 폴은 그녀가 주는 차를 마실 때마다 과거 무의식 속의 아픈 기억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잘못 알고 있던 부모의 죽음의 원인을 바로 알게 되면서 점차 마음의 상처가 회복되기 시작한다. 그리고 한 여인을 만나 행복한 가정을 이루는 것으로 영화는 끝난다.

     

주인공의 아픔과 회복에 따라 내 감정도 같이 따라가며 보았던 감동이 있는 영화였다. 이처럼 음식이나 음악 또는 물건을 통해서 부정적 기억이 떠오를 때가 있는가 하면, 반대로 긍정적이고 따뜻한 기억을 끄집어내는 경우도 있다. 내게 부정적인 기억은 비 내리는 날의 이사와 amazing  grace 라는 노래였다면 따뜻한 기억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내가 제일 좋아하는 추어탕에 넣어 먹는 ‘산초가루’이다.

 

 어릴 적 맑은 가을날, 엄마는 싱싱한 미꾸라지를 들통에 넣고 소금을 뿌려 뚜껑을 닫는다. 그 속에서 미꾸라지들이 서로 부딪히며 파득거리는 소리가 나고 그 소리가 사라질 즈음 물을 흘려보내며 깨끗이 씻는다. 그리고 삶고 거르는 수고를 거친 뒤 추어탕은 저녁상에 올라오고 빠지지 않는 것이 ‘산초가루’이다.

지금도 산초가루의 향기로운 풍미를 맡으면 맑고 청량한 가을날과 들통 속 싱싱한 미꾸라지의 요동침이 떠오르는, 기분 좋은 기억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그래서 추어탕집에 가서 포장을 해 올 때 산초를 더 달라고 부탁을 한다


 누구에게나 나쁜 기억, 좋은 기억들이 있다. 좋은 기억들이 나쁜 기억들을 덮어 버릴 수 있다면 나쁜 기억조차도 추억으로 만들 수 있을 것이다. 기억과 추억은 다 같이 과거의 일이나 무엇이 지금 내 마음을 지배하는 가에 따라 누리는 삶에 커다란 차이가 있을 수 있다.


오늘은 전국적으로 비가 올 것이라는예보이다.

내리는 ‘비’를 바라보며,

amazing  grace’를 들으며,

‘산초가루’를 뿌린 추어탕을 먹는다면 기억과 추억의 화해의 합창곡이 어떤 것인가를 알게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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