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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브티 Apr 02. 2024

파 한 단


  비가 오락가락하는 날이 계속되며 이삼일 외출을 하는 동안 정신없는 사람 여럿을 보았다. 버스 안에 두고 간 우산을 서너 개 봤고, 정류소 의자에 주인 없는 우산이 놓여있기도 하고 야채가게 앞에 얌전히 걸려있는 우산도 있다. 합하면 아마 여섯 개 정도는 되는 것 같다. 주인 잃은 우산을 보며 몇 달 전의 일이 생각났다.


유난히 따뜻하고 화창한 봄날의 주말 오전, 친구와 가락시장에서 만나기로 했다. 차를 가져갈까 하다 주말이라 주차장이 복잡하려니 싶어 그냥 버스를 타고 갔다. 싱싱한 해산물과 야채를 보니 처음 마음보다 욕심이 생긴다.

 먼저 근처 큰 마트에 들러 전기주전자를 사서 한 손에 들고 생선시장으로 가서 남편이 좋아하는 해삼을 샀다. 옆을 보니 멍게도 욕심이 난다. 멍게를 사고 야채코너로 넘어와서 연근과 파를 사서 시장바구니에 넣었다.

한 손에는 가방과 전기주전자. 다른 손에는 시장바구니. 평소보다 무거운 데다 양손 가득 들은 물건을 놓칠세라 나름 신경을 쓰며 버스를 탔다. 그리고 시장바구니만 버스 바닥에 내려놓고 한숨을 돌렸다. 몇 정류소를 지나 내려 길을 건너 다시 차를 바꿔 타려고 하는데 이상하게도 한쪽 팔이 허전하고 가볍다. ‘이상하네.... 뭐가 이리 가볍지?’ 생각하며 팔을 보니 가방과 전기주전자는 손에 있는데, 다른 손에 있어야 할 시장바구니는 어디로 가고 '' 만 달랑 들고 있다.


순간 기가 막히다. 무겁다고 시장바구니를 바닥에 내려놓고 하차하며 삐죽 솟아있는 파만 들고 내린 것이다. 파밭도 아닌데 그야말로 파만 뽑아 온 셈이다. 버스는 이미 떠났고 택시를 타고 쫓아갈 엄두도 못 낸 채 허탈해진 나는 시장바구니를 포기하고 말았다. 그 버스는 운행거리가 길기로 유명한 버스이다.

 화창한 주말, 교통체증을 생각하면 족히 세 시간은 넘어 걸릴 것이고 종점에서 찾은들 이미 상해버린 해삼과 멍게를 어떻게 먹겠는가. 차라리  종점으로 들어가는 차라면 찾아가서 받아오련만.....

내 생전 이런 건망증은 처음이라는 생각이 들자 화도 나고 우습기도 하였다.

다행히 남편은 해삼, 멍게를 잃어버렸는지 아직 알지 못한다. 실수를 알았다가는 두고두고 정신없는 마누라 소리를 들을 것이다.


 다른 사람의 건망증 얘기를 들을 때마다 내가 겪은 일이 새록새록 기억이 난다. 정도의 차이만 다를 뿐 주위에서 제법 겪는 일들이다. 잠깐의 건망증으로 아차! 하는 순간에 잠시 내려놓은 물건을 못 챙기는 것은 나이 든 사람만은 아닐 것이다. 바쁜 시간을 사는 젊은이에게도 건망증은 종종 있을 것이다.


 사람들이 노후에 가장 무서워하는 병이 치매이다. 수명이 길어지며 치매는 살아있는 동안 피할 수 없는 일이 되었다. 의학프로그램에서는 치매와 건망증은 다르다고 알려주지만 건망증이 잦거나 심해지면 치매가 되지 않을까 걱정이다.

 꽤 시간이 지난 지금도 파만 보면 정신이 퍼뜩 나며 끝까지 정신 차리고 살아야지 하는 생각이다. 파 한 단이 나의 치매예방약이 된 셈이다. 큰돈을 건망증으로 잃어버리고 마음의 병이 생기느니 차라리 해삼 만원, 멍게 만원. 연근 이삼천의 적은 가격을 잃었으니 다행이며, 이천 원 파 한 단 값으로 예방약이 처방되었으니 인생에 큰 이익을 본 기회로 여기며 살아야겠다.     


                     

                 다시올문학 2023  가을ㆍ겨울호 실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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