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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별난 Oct 26. 2024

25화 산산조각

돈에 깨어지는 인간관계

산산조각


2년 후


#01


"형, 진짜 돈 구하려면 도둑질 밖에 없어요."


"원강아 그럼 도둑질해서라도 가져와. 너, 문제가 뭔지 알아? 날짜를 어기는 건 일상이고, 약속 날짜가 되면 오히려 죽는소리 하면서 더 빌려달라고 하고, 돈이 없어서 못 갚겠으면 그전에 무슨 멘트가 있어야 하는데, 넌 그런 게 없어"


"도중이 형, 죄송해요. 좀만 미뤄 주세요. 갚으려고 했던 돈인데 보이스 피싱 당했어요."


"흐~음. 그건 니 사정이고. 너 아버님 병원에 계시다며? 문병 오는 아버님 지인분들한테 무릎이라도 꿇든지, 친척들한테 손 빌리든지, 가져와."


도박꾼들 사이에서 돈을 빌려주고, 갚을 우선순위에 내 존재를 올려놓지 못하면 받기가 힘들다. 원강이는 벌써 몇 번째 미루고 넘어가는 상황이다. 원강이 머릿속에 내 이름을 올려놓기로 했다. 나중에 내용을 들어보니 대출 승인이 나려면 신용등급을 올려야 한다고 해서 돈을 보냈다는 것이다. 그때 생각하면 지금도 어이가 없다. 


'돈이 없는 사람한테 돈을 달라고 한다고? 사금융 대부업체가 몇 십만 원에 신용등급을 올려준다고? 이걸 당한다고?'


예전에는 이런 물음들이 지배적이었다. 지금도 '이런 류의 보이싱 피싱을 당한다고?'라는 생각을 여전히 갖고 있지만, 한 편으로는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도 하게 된다. 진짜 돈이 궁핍해지면 작은 속삭임에도 사람의 마음은 흔들린다. 그리고 쓰러질 것 같으면, 그 무엇이라도 잡으려고 발버둥 칠 수 있다. 나도 이런 상황이라면 장담은 못할 것 같다. 


원강이는 항상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하소연하듯 징징대며 동정심을 유발한다. 몇 년을 봐왔지만, 그는 인간관계에서 심하게 이끌려 다닌다. 가끔 너무 감정적이어서 선을 살짝 넘을 때도 있지만, 예전 내 모습이 생각나서 남다른 애정이 있었는데 이제 그의 모습이 질리기 시작했다. 원강이도 도박꾼이다. 보이싱 피싱을 핑계로 나한테 돈을 안 갚고 더 빌려가려 했을 가능성이 더 커 보인다. 돈을 구하기 위해 산 사람도 죽이는 거짓말을 할 수 있는 것이 도박꾼들이다. 그리고 진짜 보이스 피싱인지 거짓말인지 이제는 상관도 없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나에게 중요치 않다. 난 내 돈만 받으면 된다. 나는 이렇게 몇 명에게 더 전화하며 나가 있는 현금을 모두 수거하고 있다. 며칠 후 원강이는 '늦게 드려 죄송하다'며 입금을 했다. 


#02


"성우(의) 형이에요. 성우한테 얘기는 들었는데 도박으로 빌린 돈인데 좀 깎아줘야 되는 거 아닌가?"


순간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참고 얘기했다.


"그거 제가 도박으로 성우한테 딴 돈이 아니라, 지 혼자 잃고 현금으로 빌린 돈이에요. 계산은 안 했지만, 그냥 준 돈까지 합치면 더 돼요. 그 액수까지 알려드려요? 복잡하게 만들지 마시고 그 금액만 보내세요"


성우는 여자에 빠져 살다가 빚이 산더미처럼 쌓였고, 가족의 도움으로 겨우 정신 차린 놈이다. 낮에는 보험회사에서 일하고, 밤에는 대리 기사로 일하며 생계를 꾸리고 있었다. 그러던 성우가 내게 추천인 아이디를 알려달라고 했지만, 절대 알려주지 않았다. 그런데 어디서 알아왔는지 가입한 그를 보고는 잔소리를 퍼부었었다. 도박하지 말라고 그렇게 말리던 동생이었다. 그런 그가 기어이 도박을 시작한 걸 보고 불안해하며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안쓰럽게 여겨 조금 챙겨줬던 것이 화근이었다. 이제는 대리 기사를 안 가는 날이 많아졌고, 밤새 도박에서 딴 돈을 제수씨에게 주기 시작했다. 잃은 날에는 자기 차 옆에 앉아 고개 숙여 있는 그에게 대리기사 하루 일당을 챙겨주기도 했었다.

성우 사정을 뻔히 알아서 웬만하면 독촉을 안 했다. 어느 날, 내 사정이 안 좋아져서 돈 이야기를 조심스레 말했는데, 성우의 반응은 원강이와 다를 바 없었다. 단호하게 선을 긋자, 결국 성우의 형에게서 전화가 걸려왔었다. 


'띠링'


문자가 왔다. 성우의 형이 바로 송금을 했다. 이제 가족이 다 알았으니 성우가 여기서 도박을 멈추길 바란다.


그네와 미끄럼틀


성우의 형이 보내준 천만 원을 도박 사이트 계좌에 입금시켰다. 


도박은 쾌락의 끝과 고통의 끝을 하루에도 수십 번을 마치 그네처럼 왔다 갔다 한다. 내 의지와 전혀 상관없이 이리저리 놀아날 뿐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그네가 아닌 미끄럼틀을 타고 있는 느낌이다. 그네를 타던 돈의 잔액이 내리막길만 타고 있다. 그네가 아닌 미끄럼틀을 탈 때부터였다. 좌측 머리 위에서 오른쪽 턱 밑까지 관통된 대못 같은 것이 박힌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빼내려고 벽에 머리통을 깨지도록 박아봐도 빠지지가 않고 있다. 고통은 나를 지구 끝까지 미끄럼 태우려는 것 같았다.    


'과연 6개월 전으로 돌아가면 멈출 수 있을까? 과연 잔액이 끝없이 오르던 그때가 오르막이었을까?'


뒤늦게 돌아보니 그곳은 고통의 끝과 다른 편에 있는 쾌락의 끝으로 가는 내리막길이었다. 따도 잃어도 똑같이 내리막이었다. 두 개의 내리막이 있는 미끄럼틀이 도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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