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에 대한 역치가 높아서 자극적인 메뉴를 선호하는 사람이 있다. 본인은 불편하다든지 뭐 우짜든둥 나는 그걸 보고 있으면 재밌다고 생각해버리거나, 니치 입맛 메뉴를 모아놓고 파는 식당을 떠올려본다든가 하기도 한다. 인간은 역시 공감을 쉽게 할 수 있는 존재는 아닌 것 같다. 뭐, 메뉴야 따로 먹으면 되니 문제 될 일도 아니기도 하고, 아쉬운 점을 찾자면 그런 사람과는 동일한 것을 두고 같은 즐거움을 누릴 수는 없다는 게 있겠지만 그런 아쉬움도 욕심의 하나라고 생각하고 넘기면 된다.
어제는 모임이 파하고 혼자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가면서 나의 '재미에 대한 역치'가 높다는 걸 살면서 처음으로 분명하게 깨달았다.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는 늘 그래왔듯 사람들이 재밌어하는 일에 재미를 잘 느끼지 못하는 내가 있었고, 혼자 지하철을 타고 갈 때는 내가 쉽지 않은 상황 속에 놓여있음을 깨닫게 하는 해프닝이 있었다. 그런데 그 순간 그 모든 상황이 너무나 재밌게 느껴져서 웃음이 나와버렸다.
어릴 때부터 어렴풋이 이런 재미에 대한 역치가 평균보다 조금 높은 사람이라는 조짐들이 보이긴 했다. 6,7살 때쯤 집에서 뛰다가 책상 모서리에 귀가 걸려서 귀가 찢어졌을 땐 뭐 때문인지 마취를 못해서 그냥 꿰맸었는데, 나는 울지를 않았다. 귀가 아주 뜨끈뜨끈하고 살을 왔다 갔다 하는 따끔한 것을 느꼈지만 '이거 안 울 수 있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던 기억이 있다. 이미 이때부터 이런 것들이 내 안의 게임이었나 보다. 스스로에게 "야 너 이거 할 수 있어?" 하는.
1) 친구의 친구를 소개받을 때는 복면을 쓰고 나오면 재밌겠다는 말에 복면을 쓰고 나가는 것이 재미있었다. 사람 많은 시내에서 그런 이상한 짓 할 수 있어? 인 것이다.
2) 여기를 진짜로 넘어가면 재밌겠다는 말에 위험한 짓을 진짜로 할 때 재미있었다.
3) 엉덩이에 불이 날 때까지 넘어지고 연거푸 슬로프에서 위험천만하게 굴러버리면서도 쉬지 않고 일어나서 다시 스노보드를 배우던 것이 재미있었다.
4) 계곡 래프팅을 가서는 절벽에서 앞으로 회전을 하며 다이빙을 하는 것이 재미있었다.
5) 모두가 만약 실수해서 자기 손이나 참호 안에서 터질까 봐 겁을 먹던 세열 수류탄을 목표 지점에 정확하게 안착시키는 일이 재밌었다.
6) 무서워서 아무도 하겠다고 손을 못 들던 절벽 레펠을 가장 먼저 하겠다고 신이 나서 할 때 재밌었다. 다리가 떨릴 만큼 무서웠지만 그래서 재밌었다.
7) 산을 하루에 두 개씩 탈 수 있다면 그렇게 하는 것이 재밌고, 산을 타다가 뛰고 싶을 땐 뛰어야 재밌다.
즉, 나는 무섭거나 힘들거나 조금 이상하다는 이유로 남이 잘 굳이 하지 않는 짓을 해야 재미를 느끼는 인간인 것이다. 어쩌면 너 20대 10년 버리고 멀쩡하게 사람 구실하며 살 수 있어?라는 것도 무의식적으로.. 아니다 너무 갔다.
근데 나처럼 이런 걸 좋아하는 사람이 평균적인 집단에서 썩 많지는 않다. 살면서 조금 외롭다고 느낄만했다. 그래서 어제는 내가 친구들 사이에서도 가끔 외로움을 느끼던 이유를 하나 찾은 것 같아서 마음이 푸근하고 안심이 됐다. 난 이상한 인간도 이상한 인생도 역시나 아니다.
희망고문이라는 말이 있다. 이 경우에 나 같은 사람은 방점을 희망에 두든 고문에 두든 둘 다 즐기는? 편이니까 꽤나 인빈서블한 거 아닐까. 꽤나 아귀가 맞아떨어지는 문제라고 생각하며 자아도취에 빠져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