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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디뇽이 Mar 27. 2024

히키코모리 10년 경력자의 일기.48

레몬 동산을 가지고 싶어요

요즘은 일기를 쓰는 것이 휴식이고 놀이다. 해야될 것들이 하기 싫을 때 하니까. 고등학생 때 입시 공부가 너무 하기 싫은 날, 야자시간에 감독 선생님 눈치보면서 책 읽는 게 사치스럽고 행복한 오락이던 때가 생각나는 요즘이다. 그 시절에 읽었던 <천 개의 찬란한 태양>, <워크 투 리멤버>, <맥도날드 맥도날드화> 같은 책은 아직도 기억이 난다. 그리고 <동물농장>, <멋진 신세계>, <총,균,쇠> 같은 것들은 기억이 잘 안 난다. 읽었었다는 기억이라도 있다는 게 어딘가 싶다. 제목조차 기억에 못 남은 책들도 있겠지.


워크투리멤버는 소설을 읽고 영화도 봤었는데 영화 삽입곡인 <only hope>를 좋아했다. 처음 들은 지 15년 정도 됐는데도 요즘도 가끔 듣는다. 김연아 선수가 갈라쇼에서 이 노래로 연기했을 때 반가웠던 기억도 난다.  


오늘은 요 며칠 쌓인 9개 정도의 해야 될 일 중에서 6개에 똥글뱅이를 쳤기 때문에 저녁과 밤에는 숨도 좀 돌릴 겸 글을 쓰면서 쉬려고 한다. "흐음-", 후우-" ... 좋군.   


1. 커버 이미지.

큰 누나가 지하철로 한강을 건너면서 보는 석양이 너무 아름답다는 말을 하길래 강이 있는 방향을 바라봤더니 노을빛이 건물까지 분홍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예쁘다. 석양은 힘이 굉장히 세구나. 저 시멘트 덩어리를 저렇게 예쁘게 만드네.'

고등학생 때 무슨 조화인지 하늘뿐 아니라 땅까지 진한 분홍빛이 농밀하게 가득 찼던 날이 생각난다. 내 평생에 그런 날은 지금까지도 단 하루뿐이었다. 교실 창가에서 그 현상을 감상하면서 뭐라고 표현할지 고민하고 있으니 옆에 있던 쌩양아치 친구 녀석이 "몽환적이네."라고 알려주었다. "몽환적-" 하고 조용히 그 말을 따라 곱씹던 나는 너무나 적절한 그 표현과 친구의 의외의 어휘력 중에 어디에 더 놀랐던 걸까.

  

누나의 말에 왼쪽으로 고개 돌려 발견한 풍경. 카톡이 없었다면 못 보고 지나칠 뻔했다.


2. 엘베 앞 프랑켄슈타인.

작년 2학기에도, 올해 1학기에도 나와 같은 5층에 사는 한 학생이 있다. 오늘도 엘리베이터 앞에서 4번 정도 마주쳤다. 키가 크고 인상이 <두치와 뿌꾸>의 프랑켄슈타인을 떠오르게 하는 사람이다. 순해 보이는데 힘이 셀 것 같은.

저번 학기부터 매일 아침 학생식당에 밥 먹으러 순위권으로 와있는 걸 볼 때마다 참 성실한 친구구나 생각했다. 일찍 일어나서 아침을 챙겨 먹는 나랑 생활 패턴이 비슷한 거 같으니 '저런 사람이랑 룸메가 걸렸으면 조금 더 편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했었다. 낮 12시, 2시까지 잠을 자던 당시 룸메 말고.


이 사람의 특징은 엘리베이터 앞 공간에서 걷기를 한다는 것이다. 오늘만 네 번 정도 마주친 이유도 그 때문이다. 작년에 그의 이 행위를 처음 몇 번 봤을 때는 통화를 하기 위해 방 밖으로 나온 것이라고 생각했다. 엘리베이터 앞의 세 평, 네 평 정도 되는 공간에서 걷기 운동을 할 거라고는 쉽게 상상할 수 없었던 것 같다.


'밖에 나가 좀 걷든지, 밑에 가서 러닝머신을 좀 하지, 저 좁은 데서 운동하겠다고 저러고 있네 한심하게.'

'정말 대단하다. 저렇게라도 안에서 많이 걷고, 밥 먹고 소화시키고 매일매일 하네. 다른 사람들 지나다니면 신경도 쓰일 텐데.'


둘 다가 나의 솔직한 생각이다. 운동이 되냐 마냐로 따졌을 때 운동도 되지 않을 행위를 하며 복도 문을 열 때마다 거슬리게 만드는 게 싫었다. 운동이 되려면 걷기도 숨이 가빠올 정도로 해야 한다. 그런데 '운동'을 신체 기능의 '향상'이 아니라 최소한의 '유지' 정도를 위한 것으로 보면 분명히 저런 것도 운동이다. 0과 1의 차이는 분명히 있다. 하는 것과 하지 않는 것. 난 오랫동안 하지 않는 0의 상태로 있었기 때문에 유지조차 되지 않고 신체와 정신이 무너져 내렸다. 복구하려고 애쓰는 요즘이 쉽지만은 않다. 그래서 저 친구를 볼 때마다 진심으로 대단하다는 생각도 드는 것이다.


3. 레몬 나무

학교 강의에서도, 구독 중인 브런치스토리 작가님의 글에서도 '뭘 하고 살고 싶냐'는 화두를 최근 자주 접했다. 그래서 며칠 전 레몬 나무를 사버렸다. 화원이나 꽃나무 숲을 가지고 싶다는 꿈이 어릴 때부터 있었는데 한 3년 전부터는 구체적으로 레몬 나무 동산을 상상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동산이든 숲이든 밭이든 비닐하우스든 디테일은 아직 모르겠다. 단지 레몬을 키워보고 싶다는 생각을 이번 기회로 드디어 실행으로 옮겼다.


20살 때 동아리 MT에서 벌칙으로 먹은 레몬이 너무 달고 맛있었던 기억, 지난 몇 번의 겨울 동안 집에서 레몬청을 만들면서 행복을 느꼈던 기억들이 영향을 조금씩 줬다. 레몬청은 만들어 먹는 일이 나에게 일종의 힐링이 되면서 행복한 기억으로 남았다. 셋째 누나는 레몬동산 따위를 얘기하는 나에게 "너도 약간 망상하는 게 좀 있네."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얘기는 안 했지만. 그래, 망상이어도 좋으니까 일단 좀 해볼게. 이래야 죽을 때 후회를 좀 덜한대.


히키코모리일 때는 밖에서 사람들과 어울리거나, 어른이랑 소주 하면서 인생 얘기하는 게 꿈이었는데 최근 이루어졌다. 재입학을 했고, 서울시 고립은둔청년 지원사업에 용기있게 신청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아이들을 좋아하고, 학생과 인간적인 교감을 하는 선생님이 되고 싶은 적도 있었는데 이것도 유치원에서 아르바이트하면서 어떻게 "선생님"소리를 들으면서 일부 이루어진 면이 있기도 하다. 마찬가지로 내 열망을 따라서 다른 곳이 아닌 유치원을 근로지로 신청했기 때문에 이루어진 일이라고 생각한다.

바라고, 그 방향으로 가는 선택과 결정까지도 해야 그때부터 비로소 꿈이 이루어질 가능성이 생기는 것 같다고 요즘 느끼고 있다. 되든 안되든 일단 접근부터 해야 하겠지.


그럼 나는 레몬 숲을 가진 아저씨든 할아버지든이 되고 싶으니까 일단 레몬을 키워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식물 공부를 더 하고 준비를 다 해서 시작하자니 자꾸 레몬 숲이 머릿속에 아른거리는 채로 영원히 남아있을 것만 같다. 대뜸 레몬 나무를 사버린 것이 내가 <소비자 행동론>에서 배운 "인지적 종결 욕구가 커져서 충동구매를 하게 되는 심리적 상태"에 도달해서 그런 걸까? 뭐 그러든지 말든지.


신문지에 싸여서 내 방 창가로 이사 오게 된 '오렌지 레몬 나무(한목대) 2개 묶음판매 7,500원' 군은 향기가 좋다. 수업이 끝나거나, 알바가 끝나고 방에 들어와 책상 의자에 앉아 가방과 함께 내 지친 마음을 풀고 있으면 화분에서 향이 나풀거리면서 내 앞으로 마중을 나온다. 디퓨저보다 효과가 좋은 것 같다. 물을 주면 올라오는 흙냄새도 마음을 편안하게 해준다. 이래서 식물을 키우나?


잎에서도 운향과스러운 냄새가 제법 나고 꽃에서는 더 진하게 난다. 꽃이 있다 심지어. 하나는 핀 채로 배송 오고 하나는 와서 피었다. 꽃이 없는 화분이 내심 좀 섭섭했는데 그 녀석이 며칠 만에 꽃을 피워 보이는데 그게 어찌나 기쁘고 흐뭇한지. 일 년에도 여러 번 꽃이 핀다고 하니 기대가 된다.


조건이 널널하지 않은 만큼 레몬 나무들이 내 손에서 죽을 수도 있다. 확률은 아마 그게 더 높을 것 같다. 자연과 생명에 대한 책임감은 글을 쓰고 있는 이 순간이 돼서야 가식적으로 떠오를 뿐 구매 시점에서는 고려조차 한 적 없었다. 미안 얘들아. 그냥 내가 너희가 필요했어. 해소해야 했어.


순수한 사랑이냐 필요냐? "겸사겸사." 그래, 이번에도 겸사겸사라고 하자.

따지지 마라. 그냥이다 그냥. 이유가 있어야 되면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선택하기보다 이유를 대기 쉬운 결정을 하게 된단다. 무의식영역에서 '그냥' 내린 결정이 이후에도 더 만족도가 높다고 한다.

'와, 나는 이런 걸 이제 처음 배워서 겨우 알까 말까 하고 있는데 본능적으로 이걸 하고 있는 너는 뭐죠?'

나보다 빨리 배울 수 있었던 박터지는 삶을 살았던 것이든, 타고난 재능이든 존경스럽다는 것은 변함이 없다.


나는 지금도 여전히 그렇지만, 평생을 이원론적 사고로 나를 괴롭혔던 것 같다. 저런 '겸사겸사'의 태도를 좀 배워야겠다.

"종교나 도덕적 기준으로 스스로를 피곤하게 검열하고, 아닌 척하면서 남에게도 자신의 피곤한 잣대를 들이대는 쫌팽이 놈."

각자의 작가가 나라는 인간을 묘사하는 차갑고 아픈 한 줄들 중에는 이 문장도 분명 있을 것 같다. 얼마 전 <불교와 정신분석학> 강의를 듣던 중 "법집"이라는 단어가 너무 반가웠던 것도 그 때문인 거 같고. 앞으로는 조금 덜 피곤한 사람으로 묘사될 수 있게 변해봐야지.


4. 일상

    

목련
비가 오면 문 앞에서 귀엽게 기다리는 우산들
공연이 있구나
까먹게 되더라도 좋았던 순간을 다시 떠올릴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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